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26
라포르가 처음 마나지배를 펼쳤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가 풀어내는 마나의 양도 양이지만, 무엇보다 흉포한 기세와 감정들이 그대로 마나에 묻어져 나왔다. 불쾌, 분노, 경멸, 증오.
무엇이 그를 그리 화나게 한 건지 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난장판은 한쪽이 쓰러져야 끝난다는 것.
‘잘 쳐 줘봐야 3서클.’
출력하는 마나량이나 컨트롤 수준으로 보건대 4서클은 아니었다. 한껏 거리를 벌린 그가 가슴 앞으로 양손을 모았다.
“복합마법진?”
일전에 론이 이도르 앞에서 이처럼 복합마법진을 펼친 적이 있었다. 당시 이도르뿐 아니라 막서스도 놀랐던 이유는 오버스펠뿐만이 아니었다.
한 손.
숙련치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론은 다른 손의 도움 없이도 펼친 것이었다.
“그래. 네 놈이 마법을 좀 다룬다는 건 인정하지. 그런데 과연 3서클 마법도 펼칠 수 있을까?”
타당한 질문이었다.
마나컨트롤, 센스, 공간지각력, 그리고 부동심 등 각종 복합마법진을 펼칠 수 있는 요소들을 갖췄다 해도 그것이 3서클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개념들의 완전한 이해, 일정치 이상의 숙련도. 그리고 이 모든 걸 한 번에 담아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비로소 3서클 마법이 시전되는 것이다.
라포르가 이전에 보이던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되찾았다.
우우우웅우웅.
그의 가슴팍에는 정사면체의 복합마법진이 형성되더니 이내 회전하기 시작했다.
론이 재빠르게 그가 펼친 진(陳)과 그 안의 식(式)들에 대해 훑었다.
‘원소는 바람. 도입한 개념은 속도, 크기, 집약. 3서클 중에서도 꽤나 고급식을 끌어왔군. 헌데 밀도가 아니라 순간적 집약이면···.’
에어로 봄(Airo Bomb)이었다.
바람이 가득 집약된 덩어리를 터뜨려 데미지를 입히는 마법.
‘그렇다면.’
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하하하. 그래, 그럼 그렇지. 3서클은 개나 소나 오르는 게 아니야. 이 잡것아.”
스스로의 실력을 맹신하는 라포르조차 3서클 마법은 양손으로 펼친다. 그런데 론은 한 손만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라포르는 생각했다.
고작 2서클 수준에서 어떻게든 대처해보겠다는 뻔한 심산이라고.
하지만 론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히 라포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투 앞에서, 특히나 마법 시전을 앞두고 불필요한 대화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가 펼칠 마법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심상에서 삭제시켜 버렸다.
카운터 스펠.
원소 마법을 비롯한 각종 마법에 있어 상성을 이용해 상대의 마법을 제압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카운터 스펠의 핵심은 시전 타이밍이었다. 자신이 상대방의 마법진을 보는 것처럼 상대 또한 자신의 마법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히 압도하는 형세가 아니라면, 마법진은 최대한 미루고 미룬 뒤 한 번에 끄집어내야 한다. 상대가 마법진에 상당한 마나를 공급해서 더 이상 물릴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라포르의 가슴팍에 있던 정사면체의 복합마법진에 선명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마나 공급이었다. 물릴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지났다.
‘어스 스피어.’
머릿속에 홀로 고고히 존재하던 마법진이 순식간에 론의 오른손으로 튀어나왔다. 정사면체의 복합마법진이 형성되고 강렬한 빛을 발하며 회전한다.
라포르의 두 눈이 의문으로 물들 무렵, 양 측의 마법진에서는 이내 곧 마법이 발현되었다.
에어로 봄.
그리고 어스 스피어.
식(式) 자체는 에어로 봄이 더 고급식이었지만, 문제는 상성이었다. 그리고 경험도.
쾅! 쾅! 쾅!
단 세 발.
모든 마법들이 중간에 충돌했다.
그런데 라포르의 공기 폭탄이 꿰뚫려 터지는 위치가 점점 당겨졌다. 론의 어스 스피어 발사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에어로 봄의 시전자인 라포르조차도 그 영향에 휘말릴 정도였다.
“크학!”
라포르가 보기 좋게 뒤로 나자빠졌다.
“아이구!”
“오오!!”
“마, 마탑의 마법사가 진 건가?”
“아카데미 마법사가 이겼다!”
“어이! 말조심해! 게티아에 마탑 지부가 있다고!”
도심 한가운데서 펼친 난전.
덕분에 꽤나 많은 관중이 이 모습을 함께 했다.
뒤로 나자빠진 라포르의 귀에도 그 모든 게 생생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
‘분명 또래이건만...’
완패였다.
엄청난 타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포르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 오던 혈통의 자부심. 그리고 마탑의 긍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토록 부정하고 경멸하던 아카데미.
그 아카데미가 앞섰다.
모든 면에서.
“하···.”
망연자실한 라포르 앞으로 론이 다가갔다.
“이게 그 잘난 혈통의 힘인가. 좋은 머리 뒀다 애먼 데 쓰는군.”
론이 무심히 말을 내뱉었다.
라포르가 그랬던 것처럼.
“가시죠.”
“아, 네!”
“큭큭큭, 론 미친 거 아냐? 그 상황에서 카운터 스펠을 쳐 하고 앉아 있네? 와아...”
말 그대로였다.
카운터 스펠은 고위 마법사들의 마법 전투에서나 볼 수 있는 ‘묘기’다. 그런데 잘 쳐줘도 3서클 수준밖에 안 되는 마법사들의 대련에서 그럴듯한 카운터 스펠이 나왔다.
크루딘이야 아들렌 명가로 발돋움하는 가문의 자식이기에 마법 지식이 풍부했지만, 사티넬은 크루딘의 설명을 듣고서야 얼마나 대단한 건지 깨달았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론님.”
잡을 만 하면 저만치 앞서가는 론과 크루딘.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들과 함께한다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회귀 전 경험이 없었다면 사실 그도 불가능했을 일.
허나 론은 가진바 모든 걸 꺼내서라도 부시고 싶었다. 저 쓸데없는 가치관은 하릴없이 마법 사회를 좀먹어갈 뿐이었으니까.
론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겸양을 펼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화기애애한 아카데미 학생들.
그들을 보며 라포르는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
노을 빵집의 저녁 식사 시간.
가게 안은 시끌벅적했다.
“그래서 크루딘님, 아니 크루딘 형이 막 손에 흙 망치를 두르고요! 막막! 휘둘렀어요! 그랬더니 마탑의 마법사들이 퍽퍽! 하더니 쓰러졌어요!”
“어이, 리키. 흙 망치가 아니야. 그냥 작은 흙 방패였다고.”
“아 그랬었나요?! 헤헤. 그렇게 해서 아무튼 크루딘 형이 마탑 마법사들 절반 이상을 때려눕혔어요!”
“껄껄걸, 정말 대단하시군요.”
“에이. 근데 대단하려면 끝까지 대단했어야 했는데, 아직은 이 녀석한테 안 됩니다. 이 놈은 정말...”
웬일로 크루딘이 겸손을 떨며 론을 가리켰다.
“오오!”
이샤가 포크와 스푼을 쥔 양손을 들썩였다.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나 보다.
“맞아요! 마지막은 론님이 해결하셨어요! 사실 뭐가 뭔지 저도 잘 못 봤는데, 막 뭔가 펑펑 터지더니 마탑 마법사 대장님이 쓰러졌어요!”
킥킥킥.
리키의 두서없는 얘기가 재밌었는지 사티넬도 웃음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 마법사님이 대장이에요?”
이샤가 해맑은 눈으로 론에게 묻는다.
피식.
아이들의 순수함이란 참 신기하다. 무지 속에서 돋보이는 그것은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인위적 가치관이 아닌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까.
“그런가?”
론은 그저 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다.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론과 크루딘이 머무는 다인실로 삼인방이 모였다.
“그래서 그게 진짜 운이었다고?”
“마검사인 둘째 형과 가끔 수련을 하다 보니 자연히···.”
“참···. 당최 스펜서 가문이 왜 변방 남작가로 남아있는지 난 이해가 안 간다. 마검사라는 네 형이나 너를 보면 전혀 아닌데.”
사실 둘째 드락사가 특출나긴 했다. 론이야 회귀한 인생이었으니 가능했지만, 드락사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별의별 방법을 써가며 마법을 펼치곤 했었다.
“크흠, 그 얘기는 그쯤으로 하고. 그나저나 내일 아침 일찍 상행단이 출발하는데, 오늘 수련은 다들 어떻게 할 겁니까?”
“어떻게 하냐니? 설마 카운터 스펠을 연습하자는 거야?!”
“킥킥킥. 내일 일찍 일정이 있으니 할지 말지 정하자는 것 같아요. 크루딘님.”
“뭔 소리야. 당연히 가야지. 야, 론. 말 나온 김에 우리도 그 카운터 스펠 연습할 수 있을까? 너가 형하고 수련했다며.”
“예?”
분명, 하기는 했다.
다만 그게 회귀 전 아주 정말 가끔, 손에 꼽을 정도일 뿐이라 그렇지. 그저 상황에 맞게 둘러댔을 뿐인데 크루딘은 상당히 진지했다.
“아니, 근데 진짜 카운터 스펠만 잘 써도 웬만한 마법 전투에서는 상당히 우위를 점하겠더라.”
맞는 말이었다.
특히나 마나 유지력 면에서 불리한 크루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술.
“이게 되려나···.”
“해봐요!!”
“어?”
웬일인지 사티넬도 강력하게 의지를 표명해 왔다. 이제껏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정도였나.’
사실 론의 카운터 스펠도 카운터 스펠이지만, 오늘 론이 퇴패시킨 건 오랜 마법사들의 상징 마탑의 수련생들이었다. 모두에게 상당한 충격이었으리라.
아무리 대세가 마탑이 아닌 아카데미로 돌아섰다지만, 젊은 나이. 그것도 십대에 마탑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국제 대회, 골든 스태프 경연이 아니고서는 더더욱.
게대가 상대는 지오르 마탑이 기대하는 신예였다.
오늘 벌어진 일은 분명 호사가를 통해서든 어떻게든 게티아 행정청 직원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는 거치고 거쳐 결국 왕실에까지 들어갈 것이고.
론은 생각지도 못하겠지만, 나비의 작은 날갯짓은 이미 퍼져 나갔다. 그것이 어떻게 돌아올지는 아직 그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론 일행은 결국 또다시 산으로 향했고, 상행을 떠나는 날 새벽까지 열심히 수련했다.
“잘 묵고 갑니다.”
“너무 안락하고 좋았어요. 덕분에. 잘 쉬다 가요!”
“아닙니다. 덕분에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식사 때마다 꽤나 신경 썼던데, 받으십시오.”
“아니 뭘 이런걸! 아침도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크흠···. 손이 무겁습니다.”
론이 곤란한 듯 내민 손을 그대로 둔 채 말했다.
“아이고···.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가시는 길 조심히 가십시오. 여정에 행운이 깃들길 기도하겠습니다.”
“참, 혹시나 마탑이나 다른 곳에서 행패를 부리면 이곳으로 연락하세요. 아버지가 모른 체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꽤나 소란을 피웠다.
혹여라도 앙심을 품은 자가 나타날까 싶어 론은 가문과 자신의 서명이 적힌 종이를 남겼다.
“어이, 꼬맹이들.”
“넷!”
“네에!”
약속이라도 한 듯 리키와 이샤가 같이 대답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커라. 알았어?!”
“넵!”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커라. 네 개.”
이샤가 쪼그만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외웠다.
“큭큭큭.”
“엑.”
크루딘이 그런 이샤의 머리를 헝클어놨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또 오세요오!”
게티아에서의 4일.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알차고 재밌었다. 그리고 아직 이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남아있었고.
론 일행은 부푼 기대를 안고 상행단이 기다리는 상인 길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