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25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개성이 없는 듯한 표정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리키가 가장 큰 이유였다.
“리키.”
“마법사님! 아···.”
순간 리키는 샌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투숙하는 분들이 귀족 혹은 마법사인 걸 소문내고 다니지 말라는.
“너, 괜찮은 거냐? 옷이랑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이상할 정도로 늘어난 튜닉의 목 부분. 그리고 눈물이 번진 양 볼은 론 일행으로 하여금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 모습에 리키가 울컥했다.
마법사란 얘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걱정을 해줬다. 말라 있던 리키의 눈가가 다시 뿌예졌다.
“흑흑, 흐아앙···. 그냥 제가 흑! 잘 못 했는데, 그래서 막 혼났는데···. 저분들이 왔어요. 흑···.”
리키가 가리키는 이들.
론 일행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 외 특징적인 게 있다면 딱 봐도 귀족이라는 점. 고급스러운 옷이 그 증거였다.
평범한 소시민, 그것도 고아인 리키에게 저들이 무언가 요구했다면,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으리라.
“어이, 거기! 와서 뭘 그렇게 처했길래. 애가 이 모양이지? 똑바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뚜둑. 둑.
결국 참지 못한 크루딘이 목을 좌우로 흔들며 소리쳤다.
“저, 저···! 감히 라포르님 앞에서 무례하게!”
“라포르님!”
라포르는 짐짓 가만히 있으라는 듯 왼손을 뒤로 들어 올렸다.
“별거 없다. 아까 말한 대로 그쪽이 마법 아카데미 학생들인지 확인했을 뿐.”
“리키, 저 말 맞아?”
“네···.”
어떻게 자신들이 아카데미 학생인 걸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리키의 상의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으며, 누가 그의 눈물을 쏙 빼놨단 말인가.
크루딘의 눈빛이 날카로워질 찰나.
“꼬마야, 그런데 다른 하나는 네가 말해야 하지 않겠니?”
라포르가 말했다.
여전히 높낮이 없는 묘한 말투.
그것이 론 일행들을 은근히 거슬리게 했다.
“어, 그···. 제, 제가 빵 배달을 하다가 실수로 어떤 용병님의 옷을 더럽혔거든요···. 그래서 막 혼나고 있는데, 저분이 구해주셨어요···. 돈도 대신 지불해주시고요···.”
“돈?”
“제가 그···용병님의 옷을 더럽혔잖아요. 그래서···.”
“하···!”
딱 봐도 길거리 깡패 새끼나 다름없는 용병이 강짜를 부린 게 틀림없었다.
“에구구, 그랬구나. 많이 놀랐었겠다. 리키.”
리키의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은 사티넬이 그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꺼림칙한 무리는 적어도 잘못 한 게 없는 것이다.
크루딘이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론이 나섰다.
“해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오? 개념은 좀 있군.”
“따로 바라는 거라도 있습니까? 나서서 평민을 도와줄 정도면 딱히 보상을 바라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보상을 바라진 않았으나.”
라포르가 마치 깔보듯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보고 싶긴 했지.”
“보고 싶다라. 무얼 얘기하는 건지···.”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 아니, 개라고 불러야 할까.”
마지막 말을 기점으로 장내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처음부터 묘하게 거슬리던 말투. 그것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군. 개라···.”
크루딘의 눈빛이 점점 무거워진다.
마치 대련할 때처럼.
차가운 이성만이 그의 뇌리를 장악해나갔다.
“게티아에는 무슨 일이지?”
“놀러.”
“말이 짧아.”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도 못 하는 ‘짐승’ 새끼한테 격식을 차릴 이유는 없는데?”
피식.
실소는 덤이었다.
상대는 십여 명.
무엇 때문에 이리 기괴한 술수를 부린지는 몰라도 더 이상 곱게 봐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또래였다. 그럴만한 힘이 있기에 저리 날뛰는 것일 터.
크루딘은 내심 먼저 달려왔으면 했기에 웃음도 아끼지 않았다.
“저것들이 감히!!”
“도를 지나쳤습니다. 라포르님,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저희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한편 그런 그들을 보며 론은 생각에 잠겼다.
성년이 지나지 않은 십대들이 같이 활동하는 단체. 필시 교육생 아니면 수련생일 터였다. 체형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은 없다. 그러했기에 육체 관련 계열을 배제하고, 외모와 그 외 특징적인 것을 추리니 어렵지 않게 결론이 나왔다.
짙은 녹색의 복식.
그것은 오랜 지오르 마탑의 상징이었다. 고위 마법사들은 저 로브 위로 몇 개의 선이 더 그어지지만, 저들은 수련생이기에 없는 게 분명했다.
“지오르 마탑이군요.”
“음? 의외군.”
“긴 서론은 각설하고, 뭘 보고 싶다는 겁니까. 열 명씩이나 되는 인원들이 할 일 없어서 이 시간에 기다리지는 않았을 텐데요.”
라포르의 입가가 씨익 벌어진다.
“과연 아카데미 학생이라 그런가? 다들 예의가 없어. 라포르 베킷이다. 니들이 그리 말하는 재능을 확인하고 싶어서 왔다. 과연 수백 년의 체계를 무너뜨릴 만큼 특별한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구구구궁.
라포르의 말을 끝으로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나 지배?’
마법사들의 전투 방식은 다양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이며 원초적인 것을 말하라 하면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마나 지배라고.
마나 지배.
가진바 모든 마나를 풀어내 일대를 장악하는 것이다. 오직 마나의 양과 그 컨트롤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인데, 비등비등한 관계에서는 잘 하지 않는 방식이다.
마나의 양이 앞서더라도 컨트롤에 밀려 이것이 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기 때문이다.
즉, 눈앞의 라포르는 넘치는 자신감을 믿고 그냥 찍어누르려는 것이었다.
“큭···! 뭐, 뭐야!”
“흐읏. 모, 몸이 안 움직여요. 리키, 물러나!”
크루딘과 사티넬이 힘겨운 듯 말을 더듬었다.
“역시 네 놈이 대장인가?”
라포르는 여유로웠다.
아직 더 힘쓸 여지가 있다는 얘기였다.
허나 론이 잠자코 이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저 자만심 가득한 면상은 아까부터 영 보기가 껄끄러웠고.
손끝으로 마나를 모았다.
한 방.
상대가 상대인지라 어줍잖케 움직였다가는 바로 대응할 게 뻔했기에 론은 마법진 없이 심상을 구축해나갔다.
짓누르는 힘으로 보아 상대는 3서클 이하다. 밀도와 속도. 이 두 가지면 충분했다.
론이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그저 간결한 동작.
허나 그 동작이 일대를 누르던 힘을 단번에 와해시켜버렸다.
“커억!”
통제하고 있던 마나들이 한순간에 썰려버리자, 라포르는 마치 자신의 신체 부위가 떨어져 나간 듯했다.
“라, 라포르님!”
“라포르님!! 괜찮으십니까!”
“이것들이 감히! 뭣들 하느냐! 없애버려!”
라포르의 가장 측근에 있던 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이들이 이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들은 라포르를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왔다.
“하아···.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내가 풀 수 있었는데. 쳇! 대신 쟤들은 내가 잡는다, 론.”
크루딘이 잔뜩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예. 원하시는 대로.”
론도 딱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아주 호되게 당하리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것들이 적당히 나대야지. 뭐 지오르 마탑?”
쫙 펴진 크루딘의 오른손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미 상당히 경험해본 론이었기에 보조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과연 골방에 처박혀 선민의식이나 내세우는 저들이 크루딘의 마법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윈드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워터 애로우!”
마탑 수련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가 공격 마법으로 밀어붙였다.
“어스!”
사티넬이 혹시라도 발생할 피해를 위해 모래 파도를 일으켰다. 상당한 숙련도에 이른 그녀의 원소 마법은 같은 2서클임에도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이제 막 튀어 나가려는 크루딘을 숨기기에는 모래 장벽만 한 게 없었다.
“어스!”
사티넬과 같은 영창.
허나 크루딘의 손에서 펼쳐진 그것은 손바닥보다 작았다. 작은 원 모양의 흙 방패. 그는 그것을 펼친 채 그대로 눈앞의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퍽! 퍼버벅! 퍽! 퍽!
“컥!”
“큭!”
“이, 이게 뭐···. 큭!”
론이 나설 것도 없었다.
마탑 수련생들은 둔기에라도 후려 맞은 듯 방 한 한 방에 픽픽 쓰러졌다. 게다가 조준은 또 얼마나 잘했는지 소리마저도 아주 통쾌했다.
“이게 끝이냐?”
우우우웅우웅.
크루딘의 손끝에는 여전히 조그만 흙 방패가 유지되고 있었다. 붉은 피를 묻힌 채로 말이다.
“어, 어떻게···.”
수련생들에게 명령하던 라포르의 측근이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모르겠으면 처맞아!”
퍽!
“크악!!”
그대로 이마가 쳐 까지며 놈이 넘어갔다.
“어이, 일어나. 무리만 믿고 싸대는 새끼들을 내가 제일 싫어해. 아, 그리고 귀족이랍시고 깝죽거리는 애들은 더 싫고.”
“하하, 하하하!”
이제껏 주저앉아 있던 라포르. 그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감정이 있을까 싶던 이가 웃어 재끼니 기괴했다.
“아주 재밌어. 좋아.”
구구구궁.
둘 사이에 흙벽이 세워졌고, 라포르는 이를 틈 타 거리를 벌렸다.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자고. 윈드 애로우! 윈드 애로우! 윈드 애로우!”
라포르는 주저앉아 있으면서 크루딘의 싸움 방식을 보았는지 주저 없이 윈드 애로우를 날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법 방식. 하지만 이는 마검사도 검사도 아닌 잡것에 불과했다.
솨앙. 솨앙. 솨앙. 서걱. 솨앙. 서걱.
바람의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크루딘이 거리를 좁히려 하면 라포르는 뒤로 물러서며 정확하게 마법을 날려왔다.
하나둘 피해가 누적됐다.
그리고 이는 크루딘의 장점이던 기동성을 저하시켰다.
“하하하! 고작 아카데미에서 가르친다는 게 이거냐?!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마검사도 검사도 아닌 잡종을 길러서 뭘 하겠다는 거냐고! 정말 썩을 대로 썩었단 말이냐!”
뭐가 그리 화가 난 것인지 라포르는 영창도 생략해 가며 마법을 계속해서 날렸다.
서걱. 서걱. 석. 석. 서걱.
“큭···! 젠장.”
결국 참다못한 사티넬이 크루딘을 모래 파도로 감쌌다. 하지만 라포르는 그마저도 바람의 화살로 뚫어버렸다.
크루딘이 눈을 감은 그 순간,
론이 나섰다.
콰아앙!
론의 손끝에서 튀어 나간 바람이 라포르의 그것을 단번에 짚어 삼켜버렸다.
“그만하지. 저 친구는 고작 1서클이다. 네가 그리 자랑스러워하는 마탑이 하는 짓거리가 고작 하위 서클을 린치하고, 상위 마법으로 제압했다며 자위하는 건 아닐 텐데?”
“1서클?”
라포르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자 이제껏 크루딘의 마법 발현 방식이 떠올랐다. 2서클이라 치기에는 확실히 마나 소모량이 적었다. 상당한 컨트롤의 소유자라 당연히 2서클 이상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란다.
“1서클이라고?”
“그래 1서클. 부족한 마나를 다른 것으로 보충할 줄 아는 대단한 친구지. 그런데 잡종이라···. 마탑은 그런 1서클한테도 도리어 까인 거 같은데? 게다가 저기 쳐 누운 몇몇 2서클이고. 참, 심지어 린치까지 했지.”
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누워있던 이들 중 몇몇이 꿈틀거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라포르가 한심하단 듯이 따르는 수련생들을 쳐다봤다.
“그게 마탑 수준이다.”
“뭐라?”
“마탑 수준이라고.”
더 이상의 존대는 없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과 규율, 혈통, 계급이나 내세우며 본질을 흐리는 것. 그게 마탑이다.”
“감히···. 네까짓 게 것이 마탑을! 혈통을 무시하지 마라!!”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마나였다.
“에구머니나!”
“오오!!”
“물러서!”
이제까지의 소란으로 적지 않은 시민들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라포르가 풀어내는 마나에 시민들은 거리를 벌렸다. 평범한 이들도 느낀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라포르는 체내의 모든 마나를 풀었다. 2서클에 오른 지 3년. 3서클이 코앞이었다. 3서클의 개념들은 다 이해했다. 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어떻게 숙련도를 쌓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 누구보다 빠르다 생각했다.
고작 열다섯인데 곧 3서클이었으니까.
때문에 마법 아카데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말만 그럴듯하게 할 뿐 졸업할 때까지 겨우 배운다는 게 고작 3서클 마법인 곳이었으니.
그런데 이들은 아니었다.
눈앞의 놈들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혈통을 무시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잡종들은,
사회를 교란시킬 뿐이다.
라포르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듯 막대한 양의 마나들이 용솟음쳤다.
“없애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