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9
한 해의 마지막, 서리달.
“연말이면 다들 집에서 조용히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뭐? 안 들려! 크게 말해, 사티넬!”
“아니에요!!”
“그래!”
추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도의 번화가는 시끌벅적했다.
아들렌에는 마법 아카데미 말고도 각종 교육기관이 존재한다. 전반적인 기초 교육을 담당하는 스쿨, 고등교육의 수도원, 각종 길드의 마이스터, 기사 아카데미 등등
그리고 이러한 모든 교육기관은 서리달 끝 무렵에 학기를 디 마친다. 때문에 근방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수도로 온 것이다.
아카데미 입학 때와는 수준이 다른 인파. 사티넬이 당황했다. 그런 그녀와 론을 뒤에 세우고 크루딘이 길을 만들어 나갔다.
“정신없죠?”
“아, 네. 헤헤···.”
그나마 바로 옆에 있어서인지 론과 사티넬은 비교적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후우! 일단 여기서 1차 휴식! 둘 중에 어디로?”
크루딘이 목적한 곳에 당도했는지 뒤돌아서며 물었다. 턱짓으로 양쪽을 한 번씩 가리키며.
[ 미뇽 카페 ]
[ 카브잔 살롱 드 떼 ]
“어···.”
“카페는 커피 위주의 마실 것을 파는 곳이고, 살롱 드 떼는 홍차 위주입니다. 사티넬은 어떤 게 좋습니까? 뭐 저나 크루딘은 아무 데나 상관없습니다.”
어리둥절하는 그녀에게 론이 서둘러 설명했다.
“그래, 사티넬 어서 골라.”
“그럼 미뇽 카페요?”
사람이 많았기에 서둘러 들어가 주문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와, 바깥이 다 보이네요?!”
“아무렴! 내가 이상한 곳으로 데려왔으려고, 하하. 사실 카브잔 찻집 2층은 뷰가 안 좋아서 고민했는데, 사티넬이 잘 골랐지 뭐. 큭큭큭.”
“그런가요? 힛.”
크루딘은 일부러 광장이 보이는 곳으로 왔다. 이왕 몸을 녹이는 거 구경도 하면 더 좋지 않은가.
덕분에 론 일행은 실내에서 편하게 광장 행사들을 볼 수 있었다. 거리의 악사, 광대들의 공연, 마법쇼, 차력쇼 등등.
그렇게 주문한 커피도 마시며 몸을 녹이는데,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오오오오!!]
웬 허름한 복장의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펼치는 묘기는 절대 허름한 것이 아니었다.
화르륵!
기름 헝겊을 두른 쇠막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신 들린 듯 춤을 추는 공연인.
“어머머!”
그 위험한 묘기에 카페 안의 사람들도 덩달아 소리를 지른다. 이윽고 행사는 막바지. 공연인은 관객들을 천천히 쳐다보며 한사람 한사람 집중시킨다.
과연 무엇을 할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순간. 그는 대뜸 불타는 쇠막대를 치켜 올리더니 입을 벌렸다.
“아니겠지.”
“에이, 설마.”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론과 크루딘이 중얼거렸다.
허나 공연인은 무심히도 이를 쑤셔넣었다. 그의 입 속으로.
“헙, 어떡해!”
“이야···. 뭐 마법을 쓰기라도 한건가? 와···.”
원소 마법을 능숙히 다루는 그들이었음에도 불 쇼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볼 때마다 신기하군요.”
“응? 볼 때마다? 스펜서 영지에는 저런 사람이 많아?”
“큼! 아, 그냥 거점도시에 몇 번 갔을 때 본 기억이 떠오른 것 뿐입니다. 크흠.”
“오오, 순회도 하는가 보군. 솔직히 대단한 묘기이긴 해.”
론이 몰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끔 크루딘 이렇게 예리하게 파고들 때면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앉아서 몇 가지 공연을 더 보았다. 나름 마법사인지라 마법쇼는 보고 일어나려 했는데, 두 시간이 지나도록 기미가 안 보여 셋은 카페에서 나왔다.
“오오! 저기 봐요! 신기한 동물들이 있어요!”
오후 느즈막. 길거리는 조금 한산해졌다.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셋은 마음 편히 돌아다녔다.
노점 음식과 각종 이벤트, 게임, 다양한 상인들이 내놓은 물건들.
이미 한 차례 긴 세월을 지낸 론이였음에도 노점상들이 내놓는 다양한 물건과 먹을거리들은 전혀 질리지 않았다.
그렇게 론의 일행은 저녁까지 수도에서 돌아다니다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그럼 내일 도서관에서 의논 좀 하면서 준비해 보도록 하죠.”
“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헤헤.”
“그래, 그럼 내일 도서관에서 보자고. 사티넬.”
“네, 알겠어요. 두 분도 들어가세요!”
사티넬을 보내고 남자 기숙사동으로 가는 길.
“아까 하려던 말 있던 거 아녔어?”
피식.
역시 크루딘은 잊지 않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도서관으로 가시죠.”
“응? 도서관?”
“늘 가문에서 같이 맞이하던 새해를 타지에서 맞게 됐는데 편지 한 통 정도는 보내야지요.”
“아아! 그것도 그렇군. 그나저나 뭐야, 그럼 사티넬 생각해서 이걸 미뤘다는 거네? 론. 정말 기사 서약이라도 할 생각이야?”
“...”
“크으~ 내가 사회는 봐줄게.”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기사 서약에 사회가 웬 말입니까.”
“에이, 그래도 역사적인 순간인데 관중 하나쯤은 있어야지.”
“시끄럽습니다. 크루딘.”
“어허! 같이 가자고!”
론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
‘편지라···.’
사실 회귀 전에도 편지는 그리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다.
편지 쓸 시간에 가문이나 한 번 더 오라던 아버지 덕택에 편지라고는 업무용 서신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깃펜이 잘 안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나 그래도 편지 때문인지 고향의 가족들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매번 귀향했을 때마다 반겨주던 가족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낸 유서와도 같은 아버지의 편지.
오랜 기억이 아련한 향수에 젖게 했다.
『 친애하는 아버지께.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 해가 지는 서리달이 되었습니다.
늘 가족들과 영지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기억이···.』
감상에 젖어 깃펜을 휘두르고 있는데, 양피지 위로 그림자가 졌다.
크루딘이였다.
“친애하는 아버지께,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 해가 지는···. 어우···.”
론의 편지를 보더니 질색을 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론, 너 무슨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냐? 누가 보면 보어헨 교수님보다 더 지긋한 어르신인 줄 알겠어.”
“흠! 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쓰겠습니까.”
‘문체가 너무 점잖은가. 크흠···.’
“그러냐? 아···. 실은 미치겠다. 무슨 약초학 시험보다 더 어려워. 솔직히 난 가족들에게 편지란 걸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고.”
그 말에 론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과거 15세 때의 자신을.
“그러고 보니 저도 처음이긴 합니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 맞았다.
“정말로? 전혀 아닌 거 같은데? 맞아?”
“... 정 어려우면 저기 문학 코너에 가서 편지 소설 같은 거라도 살펴보십시오.”
“하···. 됐다, 됐어. 그냥 쓸래.”
크루딘은 결국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테이블 위로 구겨진 양피지가 꽤나 보인다.
가문에 대해 얘기할 때면 늘 우중충하던 크루딘인데, 그래도 아버지와 사이는 나쁘지 않은 걸까? 그리 무거운 표정은 아니다. 그저 곤란해할 뿐, 크루딘 특유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안데르손 자작가.
자작가 중에서는 상당한 위세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래도 3대째 6서클 마도사를 배출하다 보니 왕실 요직은 물론이고, 각종 왕국 사업에 상당한 발언권을 지녀 꽤나 세를 불렸더랬다.
‘가문 내 원로들의 압박이 센 건가.’
의문을 뒤로 한 채 론은 멈추었던 편지를 마저 썼다.
**
츠츠츠측.
눈앞에 자신이 썼던 편지가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다.
사람이 워프게이트를 통해 공간 이동을 하듯 간단한 서신 및 물품 같은 경우 이렇게 우편 전송기를 이용할 수 있다. 구동 방식도 간단하고 그래서 비용도 싸다보니 평민들도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게다가 아카데미 도서관은 기기의 구동비 정도만 받기에 안 쓸 이유가 없었고 말이다.
“으어···. 겨우 다 썼네.”
“수고했습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뭘 어떻게 해?”
론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여줬다. 시침이 막 자정을 지나는 중이다.
미로에 갈 거냐는 질문.
아까 사티넬과 헤어지며 오늘은 푹 쉬자고 했었기에 딱히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가자, 안 그래도 오늘 여기저기 갔다 와서 몸이 뻐근했는데, 함 풀어줘야겠다.”
“좋습니다.”
둘은 그대로 4층으로 올라갔다.
누군가 봤다면 뻐근한 몸을 풀러 도서관 4층을 간다는 게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이들에게는 일상이었다.
슈우우욱.
익숙한 전이음과 함께 캄캄한 동공에 떨어졌다.
학기가 끝났다는 사실 때문일까. 론은 감상에 젖어 벽에 손을 짚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플라델님 한 학기 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학기 중에 2서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상당한 성취를 했다. 체감되는 마나량만 놓고 보면 이미 전생의 2서클을 이미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방학도 있고 말이다.
시간은 충분했다.
괜한 초조함은 사고의 폭만 좁힐 뿐이다.
플라델의 오푸스리에로와 환상 마법. 정말 많은 것들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이 중에는 플라델의 안배인지도 모른 채 넘어간 것들도 많을 것이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긴 세월을 살았던 론은 플라델의 가치관에 대해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과 죽음의 목도는 생 자체를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플라델의 미로.
이곳의 끝없는 어둠은 그저 어둠뿐인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순백의 공간.
이는 마치 태초와도 같았다.
벽을 짚은 오른손과 허공을 유영하는 왼손이 어둠을 만끽한다.
정령사의 찬가에 나오는 구절, ‘태초에 어둠을 가르는 빛.’
딱히 함부로 해석한 적은 없었다.
편협한 인식과 이해는 본연의 의미를 탈락시키기에 그저 다가오는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선연히 느껴져 온다.
‘아···.’
의지, 폭발, 빛, 진동.
그 느낌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우우웅 우우웅 우웅.
눈을 떴을 땐 다른 세상이었다.
배로 늘어난 듯한 마나가 받아들이는 감각은 이전의 것을 완전히 초월해 버렸다.
그렇다.
2서클이었다.
이미 회귀 전 올랐던 경지임에도 새로웠다. 말 그대로 과거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일정량 이상의 마나가 쌓이면 마법사는 마나 컨트롤 수준에 따라 마나써클을 추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론은 이미 5서클에 올랐던 만큼 마나의 총량만 채워주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순간의 깨달음이 마나 감응력에 변화를 주었다. 마나 수급뿐 아니라 마나에 대한 감각이 전과는 확연히 다름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하···!”
말하면서도 헛웃음이 삐져 나왔다.
웬지 당연하게 될 것 같은 직감.
“4서클, 어스 골렘.”
두두두두둥.
동공에 빛이 들어오고.
구구구궁.
커다란 공간이 만들어졌다.
우우웅.
그리고 마법진 위에서 점점 형체를 이뤄가는 그것을 보며, 론은 그저 여유롭게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