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8
“하아···. 하얗게 불태웠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나 어렵게 나올 줄은···.”
“아니, 난 진짜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맨 뒷장이 하얀 백지였다니까?”
“그건 좀···.”
세상을 다 잃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솔직히 5서클까지 올라 회귀한 사람으로서 아카데미 1학년 수준은 당연히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약초학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시험지를 받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이 교수님이 매니악하게 문제 내는 것으로 유명했던 것을. 회귀 전 산술학 때문에 꽤나 고생했던지라 이쪽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가물가물했다.
“젠장. 수석은 물 건너갔군. 쩝···.”
“그러려니 해야죠.”
“어, 저기 사티넬 온다. 큭큭, 근데 쟤도 표정이 영 아닌데? 푸하하.”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습니다.”
“풉!! 큭큭큭, 야야! 사티넬! 론이 너보고 무슨 실연한 비련의 여주인공이녜. 푸하하하.”
“...”
크루딘이 신나 달려가며 소리쳤다.
기분이 영 아닌지 사티넬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채 걸어올 뿐이다.
“으으, 너무 어려웠어요. 하···그 관엽식물 편 구석에 있는 부분에서 나온 건 알겠는데, 그 구석에 있는 걸 누가 유심히 봐요!”
“푸하하하, 사티넬이 화내는 건 처음 보네. 큭큭큭.”
“크루딘님은 시험 잘 보셨나 보네요?”
“어어? 나···? 하아···. 그냥 뛰어내릴까?”
“풉, 킥킥킥···.”
마지막 시험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끝이 났다.
아카데미에서의 첫 학기.
여러모로 재밌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의 가장 큰 지분은 바로 저들일 것이다.
사티넬과 크루딘.
함께 해 준 그들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어? 사티넬. 론 저거 웃는데? 아까 시험 못 봤다더니, 다 거짓말이었던 거 아냐?”
“농은 그만하십시오. 식사나 하러 가죠. 고등마법관 쪽 식당에 오늘 페퍼치킨 나온답니다.”
“네! 좋아요! 식당 아주머니한테 얘기해서 매콤 소스 좀 많이 뿌려달라 해야겠어요. 아주 맵게!”
음식 얘기에 사티넬이 양손을 불끈 쥐었다. 시험의 아쉬움도 페퍼치킨의 매콤함에 날아가길.
그렇게 론의 일행은 하얀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며 식당으로 갔다. 아니, 가려고 했는데.
툭툭.
“저거, 이도르 아냐?”
가던 길을 멈추고 크루딘이 말했다.
“그으렇네요···.”
사티넬이 긴장하고,
론은 그저 바라만 봤다.
이왕 부딪힐 거면 도망쳐 봐야 의미가 없다. 그리고 딱히 피할 이유도 없었고.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백작가 밖에서 그 권위를 드러내고 싶다면, 온전히 실력으로 드러내야 한다.
선왕 로이드 4세는 아카데미와 왕실 부처의 연계, 사병 제한과 왕국군 배치, 감찰부 등등을 통해 이 토대를 교묘히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로부터 300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뭐 그래도 부딪혀 온다면, 나도 가진 걸 좀 드러내야겠지.’
15세 아카데미 학생이 세 단계 이상의 오버스펠을 한다고 하면, 왕실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게다가 명분은 자신에게 있지, 이도르에게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아우···. 뭔 놈의 시험이 이따위로 어렵···.”
흠칫.
한껏 화를 내지르던 이도르가 움찔거렸다. 론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크흠.”
잠시 두리번거리던 이도르는 같이 다니던 이들이 나오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뭐야, 재미없게.”
“그럼 뭐 싸우기라도 해야 했습니까?”
“아니 그냥···. 근데 싸움이 될만한 상대가 아니긴 하네. 큭큭.”
꽁무니 빼고 달아나는 그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좀 이상했다.
이도르, 아니 그들이 가다 말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나쳐 한 학생이 다가왔다. 막서스였다.
서로 간에 뭔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이.”
그런 그가 론에게로 와 아는 체한다.
“둘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겁니까?”
“뭐 그냥 사내들끼리의 찐한 대화라고나 해야 할까? 딱히 학년 ‘수석’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막서스가 찡긋거린다.
우웁!
옆에서 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즐거운 한 학기였어. 아, 혹시 방학 때 수도에 머무를 거면 얘기해. 우리 가문의 저택도 있고 해서 머무르기 딱 좋거든.”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허, 앞일은 모르는 거라고. 너무 칼같이 그러지는 마. 너한테 만큼은, 아니 너희들한테는 관대하니까 말야. 큭큭.”
“예, 호의 감사합니다.”
“그럼 다들 즐거운 방학 보내라고.”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막서스는 가버렸다.
“참 특이한 분인 거 같아요. 저 막서스라는 분도.”
“특이하고 뭐고 간에 어으···. 아까 눈탱이를 껌뻑대는 거 봤어? 웩! 아주 토할 거 같더라. 펜팔인지 페피인지 아무튼 그 치킨 좀 먹으러 가자. 속이 느글느글해 아주!”
“페퍼에요, 페퍼! 페퍼치킨!”
“아아, 그래그래 페퍼치킨.”
막서스 진. 그리고 진 자작가.
어찌 보면 현 왕실과 가장 가까운 귀족이다. 가문 대부분이 왕실 직속 감찰부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매년 차출되는 그들도 신기하긴 하다.
‘실력이 그렇게나 뛰어난 걸까.’
그 때문인지 막서스는 볼 때마다 여유로웠다. 물론 그 또한 그에 걸맞은 힘도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분명 마주칠 일이 또 있을 것이다.
‘괜한 척을 질 필요는 없겠지. 딱히 소문이 흉흉했던 가문도 아니었는데.’
**
우물우물.
“아니 글쎄, 쩝쩝. 이걸 론이랑 둘이서만 그렇게 먹고 다닌 거야? 쩝쩝, 와···. 사티넬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우물우물.
“아닝, 크루딩닝하고능 오후 수어비 다으자나요. 그리구 저네도 쓰읍···. 하아···. 말 해떤걸료?”
입가에 소스를 묻혀가며 열심히도 먹어댄다.
슥슥슥.
티슈 함에 있던 것을 몇 장 빼내 둘에게 나눠줬다.
“오오, 고마워.”
“강사항니당.”
“확실히 매콤해서인지 스트레스가 확 가시는군요.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어우, 가시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예 잊었어. 오전에 무슨 일이 있긴 했던 거야?”
“킥킥킥, 켁! 콜록! 콜록···.”
“어우···저건 좀 아플 듯.”
소리 내 웃던 사티넬이 사레가 들었다. 눈물이 아주 그렁그렁 이다.
슥슥슥.
뽑은 티슈와 티슈 함까지 밀어줬다.
“쯧쯧쯧···. 쩝 쩝쩝.”
“...”
크루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잘 먹었다.
“콜록! 콜록···. 크흠, 큼.”
벌컥벌컥.
물 마시고, 눈물도 닦고, 콧물도 닦고, 입도 닦은 사티넬이 그제야 좀 괜찮아졌는지 호흡을 골랐다.
“으어···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으구, 사티넬. 이거 나한테 페퍼치킨 안 알려줘서 그런 거야. 다음부터는 날 깜빡하지 말도록.”
“크루딘님, 진짜...”
“큭큭큭.”
어느 정도 식사도 끝나가기에 론은 둘을 보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전에 얘기했던 탐방 여행 말입니다.”
“아아, 그렇지. 우리는 아직 남은 게 있었지.”
“네, 맞아요!”
나쁘지 않은 반응에 론이 편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일단 생각한 곳은 왕국 남쪽의 브뤼센 영지입니다. 정확히는 그 브뤼센에서도 변방에 있는 피에타 유적이구요.”
“아아, 브뤼센 영지면 알지. 서남쪽이라 우리 영지하고도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야.”
크루딘의 가문인 안데르손 영지는 동남쪽이라 아무래도 가깝긴 했다.
“네, 그렇지요.”
“그런데 피에타 유적은 처음 들어보네. 뭐 아무튼, 거기로 생각한 이유는?”
“먼저는 피에타 유적이 과거 마법사들의 거처였다는 점. 그리고 두번째는 브뤼센이 변경 숲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겨울이면 먹잇감 때문에 몬스터가 뛰쳐 나온다는군요.”
“오오, 마법사의 유적 견학과 동시에 몬스터 퇴치! 좋은데?”
“예, 맞습니다. 알아보니 브뤼센의 영주님은 매 겨울마다 몬스터 토벌을 한답니다. 시일이 맞으면 같이 해서 학생 평판 쌓기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학생 평판?”
“그게 뭐예요, 학생 평판이?”
열심히 설명하던 론은 이들이 아직 1학년이란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 아카데미 2학년부터는 공통수업이 줄어들고 특별 활동으로 대체되거든요, 학생 평판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내부 학술회, 외부 활동, 교환 학생, 토벌 미션 등등이죠. 그리고 종종 아카데미에서 선별적으로 제공하는 몇 가지 기회들이 있는데, 평판을 쌓은 학생일수록 유리하죠.”
“오오, 그런 게 있어? 가끔 보면 론은 아카데미 2회차 같단 말이야. 모르는 게 없어.”
론은 순간 뜨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크흠! 커리큘럼 가이드에 다 나와 있었습니다만···.”
“아아, 맞아요. 커리큘럼 설명회 때 저도 그거 가져가서 봤었는데 기억나네요. 학생 평판. 그럼 1학년 때 왕창 쌓아놓으면 2학년 때는 신경 안 써도 건가요?”
“아닙니다. 2학년 때 것은 2학년 때 쌓아야 합니다. 다만 1학년 때의 것은 스펙이 되는 거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아하! 이해했어요! 그럼 정말 좋은 기회네요.”
“그러게 말야. 뺄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그 토벌한다는 몬스터는 많이 안 위험할까요? 저희가 사냥할 수 있을지···.”
사티넬이 내심 걱정된다는 듯이 물어본다.
“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커럽트 보어라고 해서 마나를 품은 멧돼지 정도인데, 2서클 선에서 해결 가능한 몬스터입니다. 변수가 생긴다 해도 여기 크루딘은 3서클까지 가능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하하하 그래, 사티넬 나만 믿으라고.”
“킥킥, 네 알겠어요. 그럼 뭘 준비하면 될까요?”
크루딘과 사티넬이 눈에서 빛을 낸다. 어서 가고 싶은 눈치다.
“준비보다 중요한 게 일정이라, 저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내일이라도 바로 가고 싶은데 둘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바로 가야지! 그런 거 아니었어? 아, 난 또 그렇게 알고 있지.”
“······”
론이 남은 사티넬을 쳐다봤다.
“바, 바로요? 그···죄송한데 제가 여행 자금이 부족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방학 때 아카데미 평민 학생들은 수도에 일자리 제공해 준다고 해서 거기서 좀···.”
“됐어, 됐어. 사티넬, 돈 걱정은 하지 말라구. 우리들 사이에 무슨. 내가 다 낼게.”
“아닙니다. 이런 것일수록 정확하게 하는 게 맞습니다.”
크루딘의 훈훈한 말을 자르며 론이 끼어들었다.
“네, 맞아요. 저도 괜히 두 분께 민폐···.”
“저와 크루딘 반반으로 하지요. 그게 정확합니다.”
“네?”
“푸하하하, 난 또 뭐라고. 그래그래.”
혹시나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잘 얘기된 것 같았다.
“그럼 일단 크루딘과 저는···.”
말을 꺼내려던 론이 순간 멈칫했다.
유적 탐방과 토벌 일정상 아무래도 새해는 밖에서 보내야 한다. 때문에 가문에 편지 정도는 보내야 할 거 같아 말하려 했는데, 문득 사티넬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 너, 왜?”
“아, 아닙니다. 저희 그나저나 오늘 시험도 끝났는데, 수도에 바람이나 쐬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수도요?”
“학기 내내 아카데미에만 있었지 않았습니까? 연말이라 행사도 있을 거 같은데 보고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 좋아요! 저번에 잠깐 들렀을 때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던데 아쉽더라고요. 일정 때문에 그냥 지나쳐 와서···.”
“그럼 바로 갈까요?”
“네!”
“어어? 이봐! 알았다고. 같이 가.”
허둥거리는 크루딘을 보며 사티넬과 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서두르지 말자. 같이 가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