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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 마법사의 회귀-17화 (17/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7

250년 전의 아들렌 왕국.

아들렌 아카데미의 연혁이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약 50년.

허나 50년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선왕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계에는 마법 열풍이 일어났다. 귀족의 전유물이던 마법이 평민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 속에서 마나석을 찾아내고, 몬스터를 처치해 마정석을 얻고, 이를 이용해 마법사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온 마법 물품들이 평민들에게도 뻗어갔다.

이러한 순환은 마법의 보급을 더욱 가속시켰다.

하지만 이런 시대의 흐름을 모두가 반긴 건 아니었다. 지방의 영주, 즉 귀족들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의 전유물이던 마법을 말이다.

‘마법 앞에 혈통은 무의미하다. 오로지 재능으로 선발하여 왕국의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 아카데미 내에서 귀족법은 폐한다.’

파격 그 자체였던 선왕의 칙령.

전성기의 선왕과 세기의 현자라 불리던 7서클 필리어스 초대 총장이 다지고 간 초석이 아니었다면, 아카데미는 진즉에 사라졌다.

허나 선왕도 초대 총장도 세상을 등지자, 귀족들은 하나둘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탑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실 부처의 임용 체계가 아카데미 학생을 우선으로 하였기에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귀족 자녀들은 아카데미로 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선왕의 칙령에 곧이곧대로 어울려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가 플라델이었다.

‘교수님, 우리끼리만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굳이 저것이랑 섞여야 합니까?’

‘역시 마법을 선도하는 건 고귀한 혈통이죠.’

‘어짜피 이해도 못 할 테니 우리가 먼저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재능과 성적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물고라도 트인 듯 평민들을 압박했고, 마탑과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교수진들은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들 편에 선 자들도 있었고.

때문에 플라델은 억울했다.

허나 그럼에도 그것이 현실이었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아가려면.

플라델이 분에 못 이겨 감정을 드러내고 상황을 악화시킬 만큼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숙여주었다.

고학년에 들어서며 얻게 되는 각종 기회를 양보했고, 비켜주었으며, 멀리서 바라만 봤다. 그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갔다. 상황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고, 끊임없이 본질을 추구하였다.

그렇게 귀족에게 자리를 내주고 평범하게 졸업한 플라델. 그는 더 이상 왕국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왕실 몇몇 부서에서 임용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다.

가봐야 귀족들의 개가 될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그가 치열하게 느끼고 경험한 마법은 고작 혈통과 계급 따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었다. 수십억 역사를 고이 간직한 자연, 그리고 그 자연을 매개로 한 마법은 미미한 인류의 가치관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플라델은 아들렌을 떠났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들이 경험한 자연과 역사를 마주했다.

긴 여행이었고, 끝이 없을 여행이었다.

허나 그런 그가 아들렌으로 돌아왔을 땐 대마도사가 되어있었다.

생의 느즈막.

약육강식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자연의 섭리, 자연의 순환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고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종(種)의 유희였다. 감정, 욕구, 본능에서 벗어나 나름의 가치관을 만들고 살아가는 인간 말이다. 그가 보고 느낀 마법을 후대도 경험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들렌 아카데미의 미로였다.

“껄껄걸, 딱히 제가 혈통과 계급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는 데 있어 아주, 아주 편한 방식이지요. 옳고 그름을 논할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군요.”

론도 80년의 세월을 살았었지만 플라델은 초연했다. 그의 진중하고 깊은 얘기에 론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다만 마법의 극의를 보고 싶다면 사사로운 가치관에 얽매이면 안 되겠지요. 유희는 유희일 뿐, 자연은 자연입니다. 혈통과 사회에 얽매인다면 그 이전부터 존재한 자연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

깊은 얘기였다.

흔히 7서클 대마도사를 두고 현자라 칭하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현기. 그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아득히 초월해버렸다.

“또한, 이 미로에도 얽매이지 마십시오. 미로는 잠시 잠깐의 안식처일 뿐, 마법과 자연은 저 밖에 있으니까요. 껄껄걸.”

이후 플라델의 신변잡기식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졌다.

“허···.”

긴 이야기였다.

플라델의 환상이 사라진 지는 이미 한참 전. 허나 그 여운은 짙었다.

오푸스리에로 마법으로 그의 아카데미 시절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짐작할 순 있었다. 그가 그토록 마법에 매진하고 본질을 추구해야만 했던 상황을.

“그래, 매몰될 필요는 없는 거지.”

미로에서의 마나 호흡은 중요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밖에 나가고 싶었다. 바람을 쐬고 싶었고, 자신이 딛고 사는 이 땅과 자연을 맞대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벽뿐인 곳을 바라보며 론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추수기의 풍요로움도 겨울의 쌀쌀함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아카데미는 학기 말 시즌이 되었다.

사브작 사브작.

간밤에 내린 첫눈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론이 천천히 그 위를 밟았다.

다다다다.

그러는 것도 잠시 저 멀리 누군가 부리나케 달려온다.

‘어스.’

콰아아앙.

크루딘이었다.

“에이···. 론, 너무 각박하게 살지 말라고.”

지난 마법 대결에서 나름의 결실을 본 크루딘은 그 후로 신체 단련을 착실히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행동이 과격해졌다.

투두두둑.

론과 크루딘 사이에 있던 흙벽이 허물어졌다. 만약 어스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면, 론이 직접 저 몸통 박치기를 받아내야 했으리라.

“그쪽이야말로 과격한 것 같습니다만. 크루딘, 졸업 후 마검사단이라도 지원할 생각입니까?”

“크으···! 마검사단 좋지. 일반병은 물론이고 마법사단보다 대우가 좋잖아. 흐음···. 근데 지원하는 건 또 모르겠네. 어디까지나 무력은 보조 수단이라. 난 마법으로 끝을 볼 거야.”

팡팡.

양 주먹을 부딪치며 크루딘이 다짐한다. 딱히 마법으로 끝을 보겠다는 이의 몸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캬아~ 내가 1등이란 걸 해볼 줄이야! 론! 내가 1등을 했다고! 1등을!!”

“네, 어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크루딘은 산술학에서 전 학년 1등을 했다. 물론 론 또한 만점을 받아 공동 1등이긴 하지만 산술학 1등은 다른 과목과 조금 달랐다.

애초에 가문에서 유수의 교육을 받고 입학한 게 귀족들이다. 때문에 1학년 마법이론과 원소마법 시험은 매년 만점이 수두룩하다.

해서 실질적으로 상위권 성적을 구분 짓는 과목은 마법의 역사, 산술학, 약초학과 같은 보조 과목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산술학에서 크루딘이 1등을 한 것이었다.

“전 학년 1등.”

“예?”

“전 학년 1등이 목표라고. 어이, 론. 긴장해. 난 더 이상 호락호락한 네 친구가 아니라고.”

“예, 전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습니다.”

론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걸어갔다.

“야!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호락호락하게 여기는데?”

“후우···. 크루딘. 당장 당신이 학년 수석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부심, 자존감 가지십시오! 그럴 자격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론이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크흠! 음! 그,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한다.

충분한 재능이 맞다.

다만 명문에 얽매인 가문의 영향이 적지 않은 듯했다. 물론 폐병으로 인한 한계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 하나 때문에 항상 주눅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크루딘. 시험 얘기 말고, 방학 때 말입니다.”

“방학? 방학이 왜?”

“그때 같이 수행을 나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수행을 나가다니? 뭔 수행···. 음? 론.”

턱.

잘 걷던 크루딘이 론의 어깨를 잡고는 멈춰 세웠다.

“너 설마, 대선배 플라델님께서 졸업 후 세계를 누비며 하신 마법 수행, 이거 말하는 거야, 설마?”

“······”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아?”

이미 반쯤 수락한 표정이다.

아니, 이제는 자기가 먼저 가자고 할 기세였다.

“네, 뭐···. 좀 비슷하지요.”

“크으! 역시 내 친구 론!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낭만이 있는 친구야. 낭만이!”

팡! 팡!

그가 거칠게 론의 어깨를 두들겼다.

“힘 좀 빼시죠. 조금 아픕니다만.”

“어허! 론, 이거 시험 기간이라고 앉아만 있어서 그래. 어깨 뭉친 거 좀 내가 풀어줄게!”

주물주물.

힘을 좀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거북한 론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둔 곳은 있어?”

덩치가 머리 하나는 더 큰 게 눈을 말똥거리며 쳐다본다.

“네, 생각해 둔 곳이 있긴 합니다. 사원 혹은 유적 쪽으로 해서.”

“캬아. 론, 네가 다른 학생보다 앞서나갈 때부터 뭔가 좀 다른 녀석이구나 했었는데···. 역시!”

그저 운만 띄웠을 뿐인데 크루딘은 덥석 물어버렸다. 이어서 자기가 아는 사원과 유적에 대해 떠들어 대는데 귀가 아파져 올 지경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저 멀리 구원자가 보였다.

사티넬이었다.

첫눈이 내려서일까.

이른 아침부터 두 사람의 에너지가 넘친다. 그들에게로 가는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밤새 깔린 하얀 카펫이 그녀의 걸음에 흥을 돋웠다.

“킥킥,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아, 사티넬 왔구나. 아니 글쎄, 론이 또 엄청난 걸 준비했지 뭐야, 크으.”

“으음? 엄청난 거요?”

“응, 그렇다니까.”

자신감에 차 말하는 크루딘이나 그의 말 한마디에 혹해 눈을 빛내는 사티넬이나. 피식. 론이 옅게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

“그냥 방학 때 어디 수행 아니면 탐방하는게 어떤가 해서 말입니다.”

“수행이나 탐방이요?! 와아!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그렇지? 난 벌써 가져갈 거 생각해 놨어. 듣기로 기사 수행 나갈 때 초심자 용병 세트가 꽤 도움이 된다 하더라고. 그래서 그거 챙기려고.”

“와, 그렇군요!”

“저기 방금 말했습니다만···.”

“사원 아니면 유적 쪽이라는데 사티넬은 어때?”

“당연히 좋죠!”

“이게 또 우리 아카데미의 대선배 플라델님께서···.”

론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어댄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하며 고민했던 것은 기우였다. 그리고 저리 좋아해 주니 론 또한 기대가 됐다.

“저 그런데 다들 오늘 시험인 건 아시죠?”

그들의 눈빛이 금세 정돈됐다.

방금까지 재잘대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네. 당연하죠. 원소 마법이랑.”

“마법의 역사.”

“뭐 다들 잘 치실 거라 믿습니다. 다음 주에 약초학까지 치면 끝이니까 마지막까지 한 번 최선을 다해 보죠.”

론의 말에 금세 결심을 다지는 이들이다. 아직 어리긴 했다. 십대의 풋풋함이 마음을 간질였다.

“아, 사티넬. 참고로 기억해 둬. 나 이번에 전 학년 1등 할 거야.”

“와아. 기억해 둘게요! 그런데 조심해야 될 거예요. 저도 지금까지는 모두 만점이니까요. 힛.”

“아아, 주여!”

공교롭게도 지금 얘기하는 셋은 모두 만점자였다. 마법 이론, 산술학 시험에서 누락된 점수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사티넬은 이대로만 간다면 장학금도 무난했다. 평민의 경우 학년 수준을 고려해 중위권만 가도 장학금 대상자가 되는데, 이미 그 수준은 확실히 넘었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냥 넘은 게 아니라 수석을 노리고 있었다.

“뭐 원소 마법은 매일 저녁 같이 연습했으니 어렵지 않겠죠.”

“아무렴요.”

“자, 어서 가자고 1학년 수석들이여.”

크루딘이 양팔로 론과 사티넬에게 팔짱을 낀 채 건물동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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