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5
참 고마운 친구들이다.
얼마나 봤을까.
고작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어느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잘해주고 싶었다.
아직 제 앞가림하기에도 바쁘지만, 누군가 그랬던 것 같다. 멀리 오래 가려면 함께 가라고.
적어도 이들과는 멀리 오래,
같이 가고 싶었다.
‘서두르는 감이 좀 있긴 한데, 이번 방학 때 가능하려나.’
크루딘의 선천성 폐병은 마법사로서 너무 치명적이다. 회귀 전 그가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몰라도 해결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을 터였다. 가뜩이나 서클 늘리는 것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너무 안타까운 시간인 것이다.
‘피에타 유적의 숨겨진 방.’
회귀 전 유적관리단 말단일 당시 유적 보수 때문에 간 곳. 갑작스레 일정이 잡혀 무슨 일인가 했는데, 가보니 웬 도굴꾼이 왔다갔었다.
가져갈 것이라고는 남지않아 그 흔적만을 보러 가끔 관광차 가는 그런 곳이었는데, 도리어 우리가 그 흔적을 봐야했다. 도굴꾼이 다 털어간 숨겨진 방을 말이다.
다른 내벽에 비해 풍화를 거의 겪지 않아 색깔부터 차이가 나는 새로운 공간. 그 숨겨진 방에는 있는 게 얼마 없었다. 일지와 몇 가지 실험 도구 정도.
하지만 고위 마법사들은 그것 만으로도 그곳이 어떤 곳이었지 유추해냈다.
고대 연금술사 혹은 마법사의 창고.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엘릭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는 점. 엘릭서란 고대 신비의 묘약이다. 절단된 신체마저도 복구하며 몸 성한 이가 취하면 환골탈태까지 가능하다고 전해지는 묘약.
당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실에서는 감찰부를 파견했다. 엄청난 효력과 희소성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거래되는 엘릭서. 이를 도난당했다고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감찰부는 조사 끝에 엘릭서 혹은 그에 가까운 물품이 있었을 것으로 결론지었고, 당시 유적관리단장은 파면을 당했다.
그런 살벌한 조치가 이뤄지는 가운데 론은 묵묵히 유적 보수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감찰부와 유적관리단 고위 마법사들이 하는 얘기를 적잖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핵심인 방을 여는 방식까지도.
‘그래, 딴 사람한테 주느니 차라리 크루딘이 먹는 게 낫지. 또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약 한 달 후면 시험도 끝나고 학기 일정이 마친다. 시험 즈음으로 해서 운을 띄우면 어떨까 생각하는 론이었다.
“와···. 진지한 거 봐. 너 진짜 기사 서약이라도 하게?! 오, 주여. 사티넬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거절은 하지 말아줘. 아이고야···.”
“넷, 네에?! 에이···. 서, 설마요···. 하, 하하···.”
그러면서도 사티넬이 힐끔힐끔 론을 쳐다본다.
“...”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둘이서 아주 쿵짝이 잘 맞는다.
“농은 그만하고 마법 대결이나 하시죠. 크루딘. 저번 주에 하고 안 하지 않았습니까.”
피에타 유적이 어디 미개척 험지에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비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이참에 매일 저녁마다 하자고 할까.’
“응? 대결? 대결 좋지!”
대결이란 말에 금세 눈빛이 바뀐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하곤 했는데, 역시나 크루딘은 대결 좋아한다.
“1서클 안 거치고 바로 원소로 가겠습니다. 공방 중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음···. 방어. 방어로 할게, 이번엔.”
“오, 웬일로 크루딘이 방어를.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야.”
‘뭘 준비한 건가?’
크루딘, 그 자신에 비하면 거의 무한한 수준의 마나통을 가진 론이었기에 대결을 할 때면 그는 항상 공격권을 쥐었었다.
방어로 흙벽을 세워봐야 론은 그가 마나가 고갈될 까지 무심히 마법을 쓸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나마 허점이라도 노릴 수 있는 공격권을 취하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불이나 바람은 쉬울 테니, 물로 가겠습니다.”
기초 마법일수록 상성은 절대적이다. 변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크루딘이나 론은 3서클의 개념식을 심상 혹은 진(陣)으로 구현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대련이 아니게 된다. 특히 크루딘 같은 경우 죽기 살기로 달려드니 생사 결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둘의 대결은 항상 2서클의 개념식을 벗어나지 않는 게 룰이었다.
“오케이. 들어오라고.”
방금까지 장난을 치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둘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사티넬이 어리둥절하게 볼 뿐이고.
크루딘과의 거리는 약 20미터.
론은 워터 애로우를 제외한 모든 생각을 심상에서 지워나갔다.
“후우···.”
“후우···.”
심호흡하며 서로 주시했다.
그러기를 한참.
“근데 우리 언제 시작하는 거냐?”
“아아, 사티넬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사티넬 좀 부탁합니다.”
“아, 제가 하면 될까요?”
“네.”
“그럼 시작!”
“?!”
너무 갑작스러워 론이 당황했지만 이내 손을 펼쳤다. 어짜피 공격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워터 애로우.”
“어스.”
푸슝. 푸슝. 푸슝.
2서클의 대결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4대 원소 중 밀도와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흙은 방어, 상대적으로 가볍고 추가 특성이 있는 불, 바람, 물은 공격으로.
퉁, 퉁, 퉁.
흙벽이 물화살을 가볍게 막아냈다.
그래서 둘의 마법 시전 속도가 비슷할 경우 대부분은 유지력 싸움이 되어버리곤 한다.
‘음? 뭐야.’
크루딘의 흙벽이 평소와 달랐다. 크기가 상당히 작다. 론이 이에 의아해하자 크루딘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다.
‘호오? 그렇다면.’
조준점을 바꿨다.
명치 부근이 아닌 신체 모든 곳으로.
“워터 애로우!”
퉁.
“워터 애로우! 워터 애로우! 워터 애로우!”
퉁, 퉁, 퉁.
크루딘은 유지력 대신 효율을 선택한 것이다. 그 자신의 신체 상태를 고려한 최고의 방법. 날아오는 마법의 궤적만 정확히 계산한다면 마나 소모 면에서는 확실히 우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5서클에 이르렀던 자.
‘어디까지 가능한지 한번 보자고.’
다다다다.
“워터 애로우! 워터 애로우!”
론이 대각선으로 달려 나가며 마법 시전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발사지점, 궤적, 시전 속도에 계속 변화를 줬다.
퉁, 퉁, 퉁, 퉁.
“읏···!”
역시 조금씩 버거워 하는 게 느껴진다.
‘여기까지군. 그래도 크루딘, 그 정도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론이 막판 스퍼트를 냈다.
슈웅, 슈웅, 슈웅, 슈웅, 슈웅.
퉁, 퉁. 퉁.
“어?”
발사 소리에 비해 적게 들리는 타격음. 그런데 웃긴 건 그렇다고 크루딘이 물화살에 맞은 것도 아니었다.
“하아···. 하아···. 어이, 론 더 해 봐.”
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크루딘은,
그것을 피했다.
흙벽을 유지한 채로.
이는 별 생각 없이 그저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법진을 유지한 채 위험 속도로 날아오는 발사체를 인지하고, 궤도를 예측해 피하는 것은 상당한 정신력을 요구한다.
“허! 그래.”
실소를 터뜨린 론이 다시 마법을 이어나갔다.
슈웅, 슈웅···.
털썩.
“윽···.”
끝내 한 발을 허용한 크루딘이 주저앉았다.
허나 이 승부의 승자는 따로 있었다.
“허어···. 허어···. 허어, 크루딘. 뭡니까 대체. 언제부터 가능했던 겁니까?”
“으윽···. 어지러우니까 말 걸지 마.”
마법 파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꽤 큰 듯했다. 그도 그럴게 단순 마법 파훼 뿐 아니라 몸동작에도 상당한 집중을 하던 그였다.
‘방금 그건 마치···.’
마검사 같았다.
회귀 전 가끔 가문에 들렀을 적에 둘째 드락사형의 훈련을 몇 번 본적이 있다.
왕국군 마검사단 소속이었던 둘째 형은 방금 크루딘처럼 마법진을 펼친 채 몸을 움직였다. 단순 걷고 달리는 정도가 아닌 무술을 펼쳤다. 마치 5서클 마법사가 전혀 다른 마법을 동시에 펼치는 것처럼 말이다.
마검사야말로 절대적인 재능의 영역이다. 물론 지금 크루딘이 무술의 묘리가 담긴 행동을 펼친 건 아니다. 허나 그에 비견되는 움직임을 보인 건 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과거에 활약한 건가.’
“하, 유적···. 꼭 가긴 해야겠네.”
론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걸까.
크루딘이 고개를 번쩍 든다.
“가긴 어딜 가! 야,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거든? 치료실은 무슨. 잠깐 쉬면 되는구만. 아이고 머리야···.”
“...”
이어 사티넬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다들?”
“저는 괜찮습니다. 여기는 좀 아닌것 같지만.”
론이 어깨를 으쓱하며 크루딘을 가리켰다.
“이렇게 원소마법을 펼치는 건 처음 봤어요. 두 분 다 정말 대단하세요!”
“네, 저도 좀 놀라긴 했습니다.”
솔직한 감상이었다.
안 그래도 말하려 했었고.
“놀라긴 쥐뿔.”
크루딘이 이제 좀 괜찮아졌는지 바닥에 드러눕는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예?”
“살다 살다 우리 형들보다 미친놈은 처음 봤다고. 열다섯 살에 3서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누가 들을까 론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둘러봤다.
“고작 1서클 마법사입니다만. 과장이 심합니다. 크루딘.”
“뭐라는 거야. 넌 그냥 3서클이야. 마나 고리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생길 건데 무슨. 뭐 니가 나처럼 폐병이라도 있냐.”
“...”
예리했다.
다만 그 예리함이 자신 스스로까지 도려낼 정도로 예리해서, 론은 할 말을 잃었다.
이도르와의 결투 말고도 간간이 크루딘과 마법 연습을 하면서 은근히 실력을 드러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조금 더 아는 자로서 보여주기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주기 위해. 마법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니까 말이다.
헌데 크루딘은 그걸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한 것 같다.
‘따라잡을 생각이 아닌, 뛰어넘을 생각.’
마나 서클의 한계, 마나 유지력의 한계, 결국 마법사의 한계를 뚫기 위해 그는 몸을 움직였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의 처절한 몸부림에 마음이 쓰렸다.
론이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방학 때 우리 다 같이 여행이나 갈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고, 꼭 도와주고 싶었다.
**
이후 사티넬과도 마법 수련을 했다. 그녀는 이제 막 원소를 다루는 정도였기에 1서클 선에서만 가볍게 손을 섞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티넬은 마법 이론 보충 수업을 들으러 가자 크루딘도 오늘 대련을 복기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론은 근처의 숲으로 갔다.
거닐며 명상을 하기 위해.
최근 그가 하는 마법 수련이다.
단순히 마법을 많이 펼치며 숙련도를 쌓는 시기는 지났음을 깨달았다. 그 너머, 근본의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마법의 역사 수업 때 보어헨 교수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푸스리에로.
그가 말했던 대로 이는 시전자의 기억을 저장하는 마법. 특정 시점의 기억을 마법 시험관에 담고, 또 불러내서 타인이 볼 수 있게끔 하는 일련의 모든 것이 오푸스리에로다.
그렇다면 아까 왕립도서관에 있다는 말은 무엇일까. 정확히는 아티펙트로 남긴 것이다. 전생에도 이는 일부 고위 마법사에게만 허락된 것이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생겼고.
같은 7서클이었던 플라델은 전대 대마도사 오웬의 유산을 이해했을까.
이해했다면 체득까지 했을까?
그랬다면 이를 미로에도 남겼을까?
7서클의 고유 마법인 만큼 하급 마법사들은 봐도 이해를 못 한다. 때문에 왕립도서관도 제한을 둔 것이었는데 그래서 보고 싶었다.
‘그래도 5서클이면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크루딘의 처절함 때문이었을까.
론의 마음이 뒤숭숭했다.
한 번 들뜬 마음은 잘 주체되지 않았다. 결국 론은 명상을 멈추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자정이 되면 바로 확인해 보기 위해.
그렇게 론은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다가 자정이 되자 그 누구보다 빨리 플라델의 미로에 들어갔다.
캄캄한 어둠이 그를 반겨왔다.
론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오푸스리에로. 만약 플라델이 이 미로에 오푸스리에로 마법을 남겼다면 보여줘.”
고요하다.
마치 미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조용했다.
“후우···. 역ㅅ···.”
화아아악.
이내 마음을 단념하려던 찰나.
엄청난 빛이 주변을, 눈 앞을 가득 채웠다. 아니, 두 눈을 감았음에도 환했다.
둘 중 하나였다.
눈꺼풀을 뚫을 정도의 환한 빛이거나 아니면,
환상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