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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 마법사의 회귀-12화 (12/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2

“플라델님은 그럼 저 같은 평민 후배들도···.”

“사티넬, 저거 크루딘 같지 않습니까?”

“네?”

크루딘이 모습을 드러낸 건 사티넬이 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다른 이에게 업힌 채 내려오고 있었다.

론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잠시만요!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음? 아, 신입생! 아는 사람이야?”

“네, 친···, 구입니다.”

순간 친구라는 말이 어색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크루딘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전에도 한 번 봤었다. 마나 고갈로 인한 탈진.

‘아니 대체 거기서 뭘 했길래.’

“그럼 다행이군. 뭘 했는진 몰라도 쓰러져 있더라고. 어서 데려가 봐.”

“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론이 크루딘을 넘겨받았다. 그러고는 바로 치료실로 달려갔다.

“론님, 치료실 어디인지 아세요? 새벽인데 열었을까요? 크루딘님은 괜찮은 거겠죠?”

사티넬도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였다.

“네 열려 있을 겁니다.”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 표방하는 아들렌 아카데미다. 치료실 정도는 24시간 개방이었다.

“헉, 허억···. 헉···.”

이럴 땐 참 전사들이 부럽다.

마나로 신체를 단련한 만큼 몸 쓰는 데에는 자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고위 마법사에 이르면 공간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지만, 론에게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허나 그 때문이라도 마도사가 꼭 되어보고 싶은 론이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

불이 켜진 몇몇의 건물 중 론이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

쾅. 쾅. 쾅.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

“심각한 내상인가···.”

“네?”

“아, 아닙니다.”

“크루딘님 얘기하시는 거죠?”

식당에서 수프를 떠먹다 말고 무심코 뱉은 말이었는데, 사티넬이 놓치지 않고 반응했다.

“네. 실은 맞습니다. 전에 마법 시범을 하다가 탈진했을 때는 더 심각했던 거 같은데 하루 만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랬었죠. 걱정되시나 보네요?”

“뭐 그냥···.”

“곧 일어날 거예요. 강한 분이잖아요.”

“그렇죠.”

그는 정말 한 시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생각해 볼 시간도 갖지 않고 밀어붙인다.

몸이 부서져라.

미련 없이 생을 다 바쳐서.

‘기대고 있었구나.’

압도적인 재능과 신념을 본 뒤로 어느샌가 자신을 잊고 있었다. 마주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막막하다는 핑계로.

저녁 식사 후 보충수업을 들으러 가는 사티넬을 배웅하고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이래저래 드는 생각들.

정리 혹은 결론이 필요했다.

기숙사 뒤편의 숲으로 갔다.

“이왕 사고 칠 거면, 제대로.”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다.

불의 마법으로 정통한 스펜서 가문은 불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다들 참 열정적이었다.

말투와 성격으로 드러나는 가족도 있었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나가는 이도 있었다.

“그래 물러서지 말자. 정확히 마주하고 부딪혀 보자. 뒈지면 뒈지는 거지.”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심지어 80년의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넘어 온 귀한 차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간 배웠던 마법들을 되돌아보며 하나하나 점검했다.

1서클의 마나 감응, 컨트롤, 출력.

식과 진을 이용한 원소 발현, 2서클.

복합마법진을 이용한 형태 조형 및 변화, 3서클.

복사와 출력, 컨트롤, 부동심 등을 통한 4서클의 원격 마법.

그리고 뇌가 쪼개지는 듯한 다중 마법, 5서클. 이는 마치 양손에 깃펜을 쥐고 각기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생에 5서클에 올랐었음에도 론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감각이었다. 이론과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해가 아니라 무의식.”

그것이 모호하게나마 그가 말할 수 있는 5서클이었다.

‘마치 눈을 감고 뜨듯,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왼발 오른발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걷듯.’

“그래, 처음부터 발현 좌표를 없애는 건 너무 터무니없었어. 차근차근 천천히 나아가보자. 내 페이스대로.”

마나 호흡은 이따 플라델의 미로에 가서 해도 충분했다.

슈우우욱.

론이 소리가 날 정도로 체내에 있던 마나를 풀어냈다. 눈을 감고 마나에 집중했다.

이 땅의 모든 만물이 가지는 고유성에 다가갔다. 피상적으로, 지식으로, 오랜 인식대로가 아니라 그 자체에. 마치 꼬마 아이가 멋진 집을 보고 들어가고 싶어 두드려 보듯. 정중하고, 선입견 없이.

우우우웅.

계속해서 마나를 뿜어내던 서클이 이내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내 느껴지는 감각과 기분. 론은 이을 거르지 않고 통째로 식과 진에 비춰봤다.

현상 혹은 원소에 지나지 않는 자연이 어떻게 식과 진을 근본으로 둘 수 있을까. 허나 자연은 글자 이전부터 존재한 역사다.

상식을 넘어선 마법.

허나 그 마법은 치밀한 법칙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 법칙이라는 건 무엇일까.

긴 시간이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지나가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냄새. 조심스레 신발을 벗자 느껴지는 흙의 감촉, 느낌. 그 모든 게 법칙이었다.

오랜 교감은 생각을 단순화했다.

자연은 어렵고 인위적인 게 아니다.

이는 마치.

“이름 혹은 약속.”

실낱같이 희미했지만, 론의 결심과 의지가 만들어낸 그 편린은 상당한 깨달음이었다.

“아···.”

특별히 정령사의 찬가로 마나 호흡을 한 것도 아닌데, 주변으로부터 진한 생동감이 느껴져 왔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손을 펼쳤다.

“윈드.”

우웅.

쉬이이익.

“이건가?”

마법진의 형성과 발현이 이전보다 빠르고 부드러웠다. 아직 확실하게 정리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방향은 조금 잡은 것 같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꽤 오랜 시간을 마법 수련 없이 그저 명상만을 하며 숲을 거닐었다. 명상과 숲을 거닐었다는 게 좀 안 어울리긴 했지만, 론이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 어느새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명상하다 눈을 뜨니 밤이었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고.

“슬슬 갈 시간이군.”

플라델의 미로를 두고 사티넬과 의논을 좀 했었다. 정말 대마법사가 후배를 위해 남긴 것인지. 해가 없는지 등등.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같이 만나 확인해보자고 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은 미로가 열리는 시간이라 추정되는 자정 무렵.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론은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

은은한 백금발.

분명 연갈색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로등 빛을 받아 다르게 보인다. 전설 속 엘프들이 지녔다는 백금발과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무심코 떠올랐다.

하지만 론이 마주한 사티넬은 특유의 회색빛 눈동자로 마주 볼 뿐이다.

“오셨네요.”

“네, 좀 늦었습니다.”

“저도 방금 막 도착했어요. 어?”

“왜 그러시죠?”

“뭔가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아서요, 론님.”

“그렇습니까?”

“아닌가? 히. 어서 올라가 봐요. ‘플라델의 미로.’”

끝에 ‘플라델의 미로’는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게 그녀도 내심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앞장서 올라갔다.

“사티넬.”

“음? 부르셨어요?”

“사티넬의 꿈은 뭔가요?”

문득 한없이 달려 나가는 주변 사람들의 꿈이 궁금했다. 꿈만큼 그 사람에 대해 잘 말해주는 건 없으니까 말이다.

“꿈···. 저는, 세계수를 보고 싶어요. 소르디아크의.”

“신들의 세상, 소르디아크···.”

“네 맞아요. 힛. 좀 터무니없죠?”

“아니요, 사티넬이라면 정말 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네에?!”

“입학시험 날, 장학생이 되어보겠다 한 말도 거의 지켜가고 있지 않습니까.”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하고도 꽤 시간이 지났다. 중간중간 과목마다 테스트를 치곤 했는데 사티넬은 늘 상위권이었다. 평민 중에서는 독보적이었으며 간혹 벌써부터 밀리는 귀족도 있을 정도.

“네···. 뭐···.”

늘 무덤덤하기만 하던 론이 칭찬해서일까.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티넬, 그곳에 꼭 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저도 데려가 주세요.”

“헤헤, 네! 당연하죠!”

사티넬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계단을 오르며 신나게 재잘거렸다.

‘그나저나 전설 이야기에나 등장하는 소르디아크에 가려면 대체 몇 서클의 마법사가 되어야 할까?’

공간이동 마법을 펼치기 시작하는 게 6서클이다. 그런데 소르디아크는 타 차원. 즉 차원 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소 7서클.

‘내가 보는 눈이 낮은 건가.’

몇 없는 주변 사람들인데 어째 다들 무지막지한 목표로 나아가고 있었다. 뜨겁다. 실패 따윈 상정하지 않는 도전.

론 또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더해졌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라 그런지 1층은 한산했지만, 2층부터는 학생들이 차 있었다. 론과 사티넬이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4층으로 올라갔다.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은 4층에 오를 때부터 이미 미로가 열렸음을 알려왔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책장들 사이로 움직이는데.

“어이, 늦었다고.”

크루딘이었다.

책장에 기댄 채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론과 사티넬의 얼굴이 환해졌다.

론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며 말했다.

“30분···. 많이 늦긴 했군요.

피식.

모두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응, 너무 푹 쉬었더니 오히려 찌뿌둥하다고.”

사티넬의 물음에 여유롭게 대답하는 게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다.

“적잖이 엄살 피우지 그랬습니까.”

“엄메? 그걸 알아보네. 큭큭, 날카로워졌어. 론.”

“당신이 무뎌진 거 같습니다만.”

“좀 무뎌지긴 했지.”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크루딘의 눈빛은 전보다 한층 더 단단해 보였다.

“플라델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나름 찾아봤거든요. 아, 플라델의 미로부터 뭔지 설명해야 하나?”

“책이라면 이미 찾아봤어.”

“찾아보셨다고요?”

론과 사티넬의 의외라는 눈빛으로 크루딘을 쳐다봤다.

“플라델 카운트. 아들렌 마법 아카데미 47대 졸업생. 평민으로 7서클 대마도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샤허드 제국의 정복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양민구휼에 힘쓴 선의의 마법사. 별칭으로는 여명의 이슬.”

크루딘이 허공을 보며 천천히 읊었다.

“신기하더라고. 그리고 놀라웠어. 평범한 수준의 졸업생이 대마도사가 됐다는 게. 그는 졸업 후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았다더라고. 골방에 처박혀 연구만 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런 그가 말년에 아들렌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 돌아오고부터는 아카데미 학생들의 수준이 올라갔지. 신기한 점은 그 때부터 평민들도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크루딘은 미로의 입구를 향해 턱짓했다.

‘역시는 역시인가.’

3대째 6서클 마도사를 배출한 안데르손 가문. 대(代)가 끊어지지 않고 고위 마법사가 나왔다는 건 그만큼 특별한 가규(家規)와 전통이 있다는 얘기였다.

명문이라는 말이 무색지 않게 크루딘은 혼자서도 방향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크루딘은 그의 미로를 믿는 겁니까?”

“믿냐고? 나는 최선을 다해 이용할 건데? 누가 봐도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야. 다만, 재밌는 건 서클의 제한이 아닌 마나 감응력, 센스에 초점을 맞췄다는 거지. 재능만 있다면 늦게 시작한 평민도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는 듯이 말야.”

크루딘이 사티넬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가 내 앞에 있고 말이야. 젠장, 너무 빛나서 눈이 부시는군. 어우.”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눈을 가린다.

킥킥. 사티넬이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론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제야 좀 같이 있는 것 같았다.

“굳이 공개하지 않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만든 이유도 있겠지.”

“네, 맞습니다.”

론은 이미 오랜 세월을 경험해 봐서 힘이 가지는 양면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흑마법. 패악으로 가득 찬 어둠이 세상을 오시했었다.

플라델이 옳고 그름을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힘이 남용되게끔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아가 평민에게도 더 나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

‘잘 쓰겠습니다.’

“어서 가자고. 몸이 아주 근질근질해.”

“이번에는 쓰러져도 안 업고 갈 겁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약속이라도 한 듯 셋은 동시에 마나를 감응시켰다.

샤아아악.

예의 무채색의 회색빛이 론의 일행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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