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0
“나 자는 거 아니야. 집중하느라 눈 감고 있는 거야.”
“네, 맞아요오. 저도 집중하고 있다고여어···.”
“···”
누가 봐도 조는 게 틀림없는데.
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회중시계를 꺼내 보니 곧 자정.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면, 그때는 인정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끄으응···.”
론이 기지개를 피며 계단으로 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 비효율적인 구조란 말이지.’
계단이 한쪽 벽에 몰려 있지 않고 층별로 각기 다른 면에서 내부로 튀어나와 있다. 게다가 그 방향도 곡선.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배치다.
“그리고 정문은 가운데도 아니고 모퉁이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정문을 나선다.
캄캄한 밤하늘.
별들이 희미했다.
가문에 있을 적에는 별들이 정말 또렷하게 보였는데, 수도 외곽임에도 구름이 낀 듯 뿌옜다.
“도시긴 도시인가 보네.”
늦가을의 쌀쌀함에 딱히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도서관 건물을 천천히 돌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조용히.
한 바퀴.
두 바퀴.
‘음?’
세 바퀴.
뭔가 이상했다.
네 바퀴.
“황금비율이었다고?”
설마 하는 마음에 두 바퀴나 더 돌아봤는데 역시 틀림없었다. 도서관의 밑면의 짧은 쪽과 긴 쪽의 비율이 1 대 1.618 정도.
황금비율이 확실했다.
이를 받아들이자 자연스럽게 피보나치수열이 떠올랐다.
[1, 1, 2, 3, 5, 8, 13, 21···]
연속하는 두 항의 비의 값으로 만든 수열의 항은 결국 1.618에 가까이 수렴한다.
1학년 때는 아니지만 아카데미 산술학 시간에도 이를 배우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수열이 가진 규칙성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바로 자연이 선택한 수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 비율, 꽃잎, 열매 모양, 조개껍질 방향 등등처럼 말이다.
“맞네, 그러면 말이 되네!”
공간 활용에 있어 비효율이라 여겼던 도서관의 층별 계단의 위치가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마치 앵무조개 껍질처럼 정문을 시작점으로 회전하듯 벽면을 타고 계단이 설계된 것이었다. 허나 수열을 기준으로 봤을 땐 정문이 끝이었고, 시작점 또한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뭐가 있을까?’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고 론이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다다다.
“학생! 도서관에서는 정숙이에요! 조용히 다니세요!”
“아! 예, 예!”
정신이 팔려 들입다 뛰었더니 담당자가 한소리를 했다. 최대한 소리를 줄이며 론은 계단을 올라갔다. 정문, 1층 계단, 2층 계단, 3층 계단 그리고 4층. 역순으로 계산을 했다.
대앵. 대앵. 대앵.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카데미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느껴지는 묘한 감각.
굳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면 지나칠 뻔했다. 하지만 론에게는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의도하기라도 한 듯 삼면이 책꽂이로 막혀있는 공간. 그곳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주저 없이 마나를 풀어냈다.
우우웅.
보통의 자연물과 달리 잘 동화되지 않았다. 애초에 희미하기도 했거니와 다가갈수록 인공적인 느낌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후우···.”
허나 론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놈이 꺼려하는 듯한 감정, 기분, 느낌, 기운 등을 천천히 마나에서 솎아냈다.
샤아아악.
어느샌가 나타난 무채색의 회색빛이 론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눈을 떴을 땐 온통 새카맸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해도 사물의 유무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허나 지금은 정말로 완전한 암흑이었다.
적어도 달빛을 받을 만한 외부는 아니란 얘기였다.
“빛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윽!”
갑작스런 광원에 도리어 눈이 멀어 버렸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뜨니 횃불처럼 벽에 걸쳐진 빛들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뭐, 뭐야···?”
론이 벽을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 걱정과는 달리 빛 덩어리는 나아가는 길마다 계속해서 나타나 앞을 밝혀주었다. 다만 꽤나 걸었음에도 끝이 보이기는커녕 갈림길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침착하자.”
회귀 전 유적관리단에 근무할 때 지하 동굴, 그러니까 던전형 유적을 관리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곳은 대부분 초입부터 어느 정도 내부에 대한 단서가 있기 마련이었다.
즉 무리하게 걸어 다니며 정보를 찾기보다는 천천히 시작점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게 나았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길이라든가, 던전의 특징, 목적 등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들어올 때와 같이 주변 마나에 감응을 시도했다.
“후웁, 후우우···. 후웁, 후우우···.”
충분히 여유롭게 느껴본 첫 감상.
그것은 ‘충만’하다는 것이었다.
론이 회귀하고 지나온 그 어느 곳보다 마나가 가득했다. 이러한 곳을 흔히 부르는 명칭이 있는데.
“마나 스팟.”
론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감각을 집중했다. 천천히 더욱 침잠해 들어갔다.
굵직한 마나의 통로라 느껴지던 것은 하나가 아니었고, 이웃한 통로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한데 모인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각각의 통로들은 커다란 줄기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커다란 줄기에서 벗어나 전체로 나아가기까지 한참.
“아···.”
커다란 맥이었다.
바로 로키아 산맥.
아들렌 왕국의 수도를 등지고 있는 커다란 산맥의 심처인 것이다.
“이렇게 영험한 산지인 줄은 몰랐군.”
론이 아는 마나 스팟만 해도 몇 군데가 있는데 모두 다른 지형이었다. 대륙의 깊은 골짜기부터 해서, 섬나라들이 있는 바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화산 활동이 활발한 화산지대 등등.
잠시간의 감응이었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이곳은 로키아 산맥의 영맥(靈脈)에 만든 장소였다.
“스팟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는 건가.”
회귀하고 나서 과거의 성취를 되찾기 위해선 마나서클만 복구하면 됐었다. 허나 이는 꽤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조급해하지 않으려 했는데, 뜻밖의 기연을 얻었다.
“그런데 고작 마나서클 연공만을 위해 이렇게 기묘한 공간을 만든 거 같지는 않은데.”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도서관, 피보나치수열, 황금비율, 어둠, 빛, 통로···. 음?”
순간 떠오른 게 있었지만 너무 황당했다.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애써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내심 기대가 됐다. 그랬으면 하는 사람의 심리.
밑져야 본전이다.
손해 볼 게 전혀 없기에 론이 입을 뗐다.
“어스 골렘.”
구구구구궁.
갑자기 통로가 확장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공동으로 변했다.
그 한 가운데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새겨지는 마법진. 마나의 공명음이 생겨나기 무섭게 땅에서 흙들이 치솟아 형체를 이루었다.
쿵, 쿵, 쿵.
놈은 놀랄 틈도 안 주고 다가왔다.
“워터 애로우!”
서둘러 마법을 시전했다. 익숙한 마법진이 손끝에서 생겨나고, 있는 힘껏 마나를 쏟아부었다.
푸슈욱.
푸슈욱.
푸슈욱.
다중 마법은 마법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마법진에서 분출되는 마법치고는 상당한 회전율이었다. 초당 한발에 가까운 물화살이 계속해서 어스 골렘에게 꽂혀갔다.
처음의 강한 기세는 어느새 짓눌렸다. 워터 애로우로 인해 적지 않은 물이 어스 골렘의 곳곳에 침투했고, 그 결과 놈은 눈에 띄게 굼떠졌다.
다행히 하급 골렘이라 그런지 론이 상성만으로 쉽게 승기를 잡아낼 수 있었다.
“휴우···.”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당황스러운 건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저 말만 했을 뿐인데, 던전은 이를 현실화시켜버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일단 당장 눈앞의 것부터 끝내야 했기에 다시 마법진을 펼쳤다. 아까보다는 단순한 마법식이었지만 그 크기는 배 이상이었다.
“워터!”
론의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물줄기가 쏟아져나왔다.
푸슈우우욱.
그리고 골렘을 충분히 짚어 삼킬만한 수준이 되자, 그대로 그것을 향해 내리쳐 박아 버렸다. 퍼어억.
쿠웅. 투웅. 퉁.
점점 굼떠지는 골렘. 그러더니 결국에는 통제력이 사라졌는지 뭉쳐있던 흙들이 풀어졌다.
퍼석.
커다란 물 덩어리에 갇혀 있던 골렘이 그 형체를 잃고 그저 평범한 흙으로 돌아갔다.
“하아···. 하아···.”
론이 마나 공급을 끊자 커다란 물 덩어리 또한 통제력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 뭐 이런 미친 곳이 다 있어.”
론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도 눈앞에는 방금의 일이 허상이 아니었다는 듯 진흙들이 그대로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게 가능한 거지?”
영맥까지는 그렇다 쳐도 어스 골렘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그 자신의 말을 영창으로 삼기라도 한 듯 실제 골렘을 토해냈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럼 설마 돌아가는 문도 가능한 건가? 문!”
론은 그저 횡설수설대며 외쳤을 뿐이었다. 헌데 던전은 알아들은 것인지 이내 반응을 보였다.
구구구궁.
벽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문이 생겨났다. 그저 평범한 여닫이문. 하지만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걸 만들어 준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허···.”
뭐가 됐든 결국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론이 다가가 문고리를 잡고 밀려고 하는데 문고리에서 음각된 굴곡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떼고 가까이 살펴보았다.
[ 플라델의 미로 ]
***
커다란 집무실.
테이블에서 깃펜을 휘두르고 있던 럼블이 고개를 들었다.
“호오? 1서클이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군. 1학년···일리는 없고. 그럼 2학년 평민인 건가? 껄껄걸.”
촉.
럼블이 깃펜을 잉크통에 꽂고는 창가로 갔다. 그의 집무실은 첨탑처럼 건물 고층에 있었기에 아카데미 전경이 훑어졌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음에도 간간이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보인다. 도서관은 여전히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장차 거목이 될 유목(幼木, 어린나무)들이 뜨거운 열정을 발하고 있었다.
“이번 골든 스태프 대회는 아주 재밌어지겠어.”
럼블이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있던 서신을 쳐다보았다.
골든 스태프 대회.
5년에 한 번씩 전 세계에 있는 엘리트 마법 수련 생도들이 모여 경연을 펼치는 대회다.
그런데 아들렌처럼 총 학년수가 3학년 혹은 4학년인 교육기관이 대부분이다 보니, 골든 스태프 대회는 시기가 잘 맞아야지만 참여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때가 맞지 않으면, 그 나이대에는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를 꿈꾸는 이라면 이 영예를 굉장히 높게 쳤다. 실제 각국의 마법부 또한 그랬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아들렌 아카데미의 총장 럼블은 입가에 깊은 미소가 지어졌다. 간만에 평민이 플라델의 미로에 진입한 것이다.
1서클이라고는 하나 미로를 찾아낼 정도의 지성과 마나 감응력이라면 기대해볼 만했다.
과거 아들렌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그 럼블조차도 플라델의 미로는 2학년이 돼서야 들어갔었다. 즉 저 평민은 절대 만만한 실력이 아닌 것이다.
“플라델 어르신. 간만에 그리 원하시던 평민이 들어 온 거 같습니다. 끌끌끌.”
플라델 카운트.
평민 출신이었지만 7서클의 대마도사에 이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렌 아카데미의 졸업생이었다.
아카데미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총장 집무실에서 럼블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