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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 마법사의 회귀-9화 (9/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

9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안도였다.

회귀하면서 마주한 불편한 진실. 그리고 그로 인해 감당해야만 했던 삶의 중압감. 마냥 외면할 수도 없었고, 또 그로 인한 무력감 때문에 답답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러한 것들이 한 소년의 작은 몸짓에 의해 걷히는 것 같았다.

크루딘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강의실에 나타났다. 물론 어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얼굴에 창백함은 조금 남아있었다.

“재밌는 싸움이었어.”

크루딘이 손을 내밀었다.

“크루딘 안데르손.”

“론 스펜서입니다.”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론이 말했다.

“스펜서라면···. 슬리온 스펜서, 디엠버 스펜서, 키릴 스펜서, 아르윈 스펜서. 불 마법으로 정통한 가문이었지 아마? 쿨럭! 뭐 아무튼 반가워.”

“네, 반갑습니다.”

론도 더듬더듬 기억하는 조상들인데 크루딘은 틀리지도 않고 정확히 짚어냈다. 창백한 안색과는 별개로 총명한 눈빛으로 남의 가문을 기억해주니 괜한 호감을 자아냈다.

“결투도 시원하게 한 판 했겠다. 말 편하게 하지.”

“저는 이게 편해서 말입니다.”

“친하게 지내자는 말인데.”

“네, 그러시죠.”

생각지 못한 론의 뚱한 반응.

크루딘이 무안해하자 옆에 있던 사티넬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론님이 배려를 좀 심하게 하는 편이라서요. 헤, 헤헤···.”

그러자 크루딘은 그렇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론의 옆자리에 앉았다.

‘흠···.’

아직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그런데 과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과거에 크루딘과는 수업이 겹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있는지조차 몰랐다. 2~3학년쯤 돼서야 그에 대해 알게 됐었다.

그리고 사티넬.

그녀는 심지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런 둘과 같이 수업을 듣고 있자니 론은 참 감회가 새로웠다.

“같은 원소 마법끼리의 충돌 시에는 타 원소 때와는 다르게 원소 지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크루딘과 론의 마법 충돌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요?”

티라우스 교수는 어제의 일을 꺼내며 학생들에게 물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자 티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보라는 뜻이었다.

“아닙니다. 어제의 경우 크루딘의 어스 마법이 형태변환을 통해 론의 모래 파도를 그대로 뚫어냈습니다. 지배가 아니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크루딘의 모래 창이 론의 마나 흐름을 뚫은 것이죠. 만약 크루딘 학생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통제를 잃은 론 학생의 모래까지 가져올 수도 있었겠죠.”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가자면 크루딘의 모래 창은 칼로 썰어내듯 론의 모래 파도를 완전히 끊어낸 것은 아니었다. 마나 흐름 가운데 구멍을 좀 크게 낸 것뿐.

5서클까지 경험한 론이라면 충분히 망가진 마나 흐름을 복구하고, 통제를 잃은 모래들까지 수거가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것은 3서클의 개념을 마법식이 아닌 그저 심상만으로 구현한 크루딘보다 더 심각한 비약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2서클의 원소마법을 이제 막 배우는 이들에게는 소원한 개념이었다. 해서 론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티라우스 교수는 그러면서 이번에는 다른 학생을 불러냈다.

“파이어!”

티라우스의 요구에 따라 한 학생이 불을 피워내자 그녀도 이어서 비슷한 크기의 불을 만들어냈다.

“어어···.”

그리고는 어제 론이 했던 것과 비슷하게 불의 크기를 불려갔다.

화르륵.

대치하는 것도 잠시, 티라우스의 불은 학생이 피워낸 불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불은 덩치를 두 배 가까이 불렸다.

“이게 바로 원소 지배입니다. 원소 간의 싸움에서 우위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상성 원소로 대처하는 것보다 같은 원소로 대처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죠. 상대의 마법을 뺏어올 수 있으니까요. 리드먼, 수고했어요.”

불려 나갔던 리드먼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티라우스의 지시로 자그만 불을 만들어서인지 마법 파훼 당했음에도 딱히 큰 탈력감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말야.”

크루딘이 앞을 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론, 너는 어제 최선을 다한 것 같지는 않던데. 모래 창을 짓누를만한 모래 파도를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녔어?”

‘음?’

마나 감응력이 정말 높은 수준이 아니고서야 상대의 마나 보유량은 쉽게 짐작할 수가 없다.

“뭘 근거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냥. 여유가 느껴졌다고 그래야 하나? 뭐 당황한 표정이긴 했지만 말야.”

“여유···말입니까?”

“응. 난 항상 서클이 진탕되도록 마법을 써서 그런지 가끔 그런 게 느껴지더라고. 뭐 내 착각일 수도 있어.”

“흠···. 그렇군요.”

론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자가 가문에서 재능이 없다고 외면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명문이란 곳은 대체 얼마나 요구를 하는 걸까.’

그 후 수업은 순조롭게 흘러갔고 이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약 40명의 교수진, 400명의 학생 그리고 50여 명의 아카데미 직원들을 수용하기 위해 아카데미 식당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오전 수업이 끝난 론 일행은 가까운 식당으로 갔고, 뷔페식으로 구성된 음식들을 적당히 퍼다가 테이블에 앉았다.

“오오, 그럼 사티넬 양은 론이 아니었으면 입학시험도 못 치를 뻔했다는 거군요.”

“네, 맞아요! 헤헤. 저 그런데 들었다시피 저는 평민이에요. 말 편하게 하세요.”

“뭐 그래봐야 저도 자작가의 도련님일 뿐입니다. 후계자가 아닌 이상에야 작위는 제 것이 아니니. 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서로 말 트죠.”

“예?”

“설마 아카데미에 입학까지 해놓고 4서클도 못 넘겠다는 건 아니겠죠? 사티넬 양?”

4서클.

크루딘이 말한 4서클은 왕국에서 업적을 인정해 부여하는 최소한의 단승 작위였다. 5서클 남작위 밑의 준남작위.

지금까지 수많은 마법사가 달성했기에 4대째라고 해서 영지를 주고 세습 귀족으로 명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엄연히 왕국에서 부여하는 단승 작위였다.

그리고 크루딘은 가문과는 별개로 오로지 마법만을 놓고 사티넬을 대하는 것이었고.

‘참 하늘도 무심하지. 이런 사람이 학년 탑을 하고 가문의 후계자가 돼야 하는데···.’

나이대답지 않게 혈통에 얽매이지도 않고, 마법만을 추구하는 모습에 론은 내심 감탄했다.

“하, 하하···. 그, 그렇죠.”

“오케이. 그럼 사티넬하고도 친구로.”

어느새 크루딘의 화술에 넘어간 사티넬은 그의 친구가 되어있었다.

“크루딘, 저녁 식사 후엔 뭐 합니까?”

그런 그에게 론이 물었다.

“나야 뭐 항상 훈련장에 있지.”

“그럼 이따 저도 가겠습니다.”

“호오? 왕국 서부의 빛나는 재능, 론 스펜서와의 훈련이라···.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크루딘, 당신만 하겠습니까.”

단 한 번의 대결이었지만, 크루딘의 재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 이가 성격도 좋고 친하게 지내자는데 굳이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의 수준은 론이 당연히 우위를 점하지만, 크루딘은 그 나이대에 지니기 어려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웃고 떠드는 지금과 마법 대련을 할 때를 비교하면 가히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삶과 그의 마법은 처절했고, 마치 벼랑 끝을 거니는 것 같았다.

밋밋하기만 했던 론의 인생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더 끌린 것일지도 모른다.

크루딘과는 산술학과 약초학 시간이 달라 오후에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

해가 진 저녁.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이외에도 훈련장에는 빛은 많았다.

“파이어볼!”

“파이어애로우!”

“라이트!!”

4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하다 보니 아카데미에는 야외 훈련장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기사 아카데미의 훈련장 못지않게 컸다. 그럼에도 훈련장은 대낮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학생들의 마법으로 가득 찼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하아···하아···. 왜, 뭐가.”

“뭐겠습니까. 크루딘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본원소를 다룰 줄 아는데 왜 아직도 1서클에 머무르고 있는 겁니까? 안데르손 자작가의 마나호흡법과 당신 정도의 마나컨트롤이라면 2서클 정도의 마나는 있을 텐데요? 아닙니까?”

이제껏 둔재로서 마나호흡이 미숙해 마나량이 딸리던 론하고는 달랐다.

안데르손 자작가는 당대 잘 나가는 가문 중 하나다. 그런 가문의 자제가 이런 재능이 있는데, 마나 포션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마나 포션. 비싸긴 해도 마나의 총량을 늘려주는 귀한 포션이었다.

그리고 이미 5서클까지 올랐던 론이 보기에 크루딘은 2서클에 오르기에 충분했다. 3서클의 개념식을 마법진이 아닌 그저 심상만으로 끄집어낼 정도다. 그 하위권인 2서클은 마스터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저 마나가 부족해 두 번째 서클을 엮지 못했을 뿐.

“하아···말이 너무 길어. 하아···하, 일단 쉬자하아···.”

더는 안 되겠는지 크루딘이 그대로 훈련장 바닥에 누워버렸다.

론이 품에 있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곗바늘은 가리키는 건 열시. 중간에 쉬긴 했지만 그래도 3시간 동안 마법을 썼다는 것이었다.

‘정령사의 찬가 호흡법이 이 정도인가.’

같은 1서클이라고는 하나 유지력 차이가 엄청났다. 체감상 론은 아직 마나를 반도 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호흡법의 차이라 해도 크루딘의 상황은 좀 이해가 안 됐다.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무렵, 크루딘이 그대로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선천적인 폐병이래.”

“네?”

“미세한 균열. 그게 폐에 있대.”

크루딘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상생활에는 별문제가 없긴 한데, 마나로 일정 수준 이상의 응집력을 낼 수가 없더라고. 폐의 균열 때문에. 하하···.”

“아···.”

그가 팔꿈치로 얼굴을 가리며 씁쓸히 웃었다.

“교단 성직자도 어떻게 못 하겠대. 선천적인 건 어쩔 수 없다나 뭐라나. 뭐 아무튼 그래서 가문에서는 사실 포기했지 뭐.”

“그런 사정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실언했었군요. 미안합니다. 크루딘.”

“말을 안 했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피식.

크루딘의 입에서 바람 소리가 샜다. 자기 일도 아닌데 론이 마음을 쓰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오면 뭐가 바뀌지 않을까 해서 왔어. 나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나름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는 정말 처절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고작 수업 시범에서 마나 서클이 덜그덕 거릴 정도로 모든 힘을 쏟았다.

“가문의 형들은 곧 있으면 4서클이야. 난···뭐 고작 1서클이지만.”

3대째 6서클 마도사를 배출한 안데르손 가문. 이미 세습 귀족인 자작가임에도 그들이 그리도 열을 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명문.

이는 왕실 역사에 기록으로 남는다. 단순히 하인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높이기 위해 떠드는 ‘유서 깊은’, ‘드높은 귀족가’ 따위하고는 아예 격이 다른 것이다.

그의 가문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당사자가 느끼는 것은 상상 이상인 듯했다.

이제껏 그가 보여온 밝고 쾌활한 모습이 사라지자 어색했다. 그리고 이를 못 참은 론이 말했다.

“도서관으로 가죠.”

“응?”

“마나는 고갈됐어도 책은 볼 수 있잖습니까.”

“책?”

“네, 뭐 그럼 계속 그렇게 누워있을 겁니까.”

“하하하, 그래그래. 나보다 더 열심인 녀석이 있었단 걸 까먹고 있었네.”

크루딘이 제법 괜찮아졌는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꽉 차 있던 훈련장은 어느새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도서관에 가는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기 초라 그런가?”

“그러게 말입니다.”

적잖은 사람을 지나쳤는데 방향으로 봐서는 도서관에서 나오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도서관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3~4층은 고학년생들이 이미 다 차지하고 있었기에 둘은 2층으로 내려왔다.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을 가져와 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티넬이 찾아온 건 덤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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