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
늦가을의 선선함 때문일까.
정오 가까이에서 비춰오는 햇빛이 더욱 따사롭게 느껴진다.
론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향했다.
회귀 전에도 많이 다닌 곳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과거와 달랐다.
건물 몇 개를 지나치자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한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을 지탱하는 8개의 굵직한 기둥은 언제봐도 장엄하다.
전에는 동기들과 우스갯소리로 아카데미 설립 초 구박을 받아서 이런 산지에 도서관을 지었다고 얘기하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긴 인생을 한 번 살고 와서일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지성인가.”
도서관을 올려다보며 론이 말했다.
그 무엇보다도 지성을 최고로 삼는 마법사 정신을 그대로 담아, 아카데미에서 최고로 높은 위치에 도서관을 배치한 것은 아닐까.
“끄응···.”
허나 감상은 감상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적잖은 계단을 계속 오르자니 다리가 쑤셔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다리가 기뻐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론님! 로온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티넬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
“수정에 손을 대고 잠시 기다려주세요. 마나출력이 가능하시면 더 좋고요.”
론이 마나를 주입하자 수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네, 론 스펜서님 등록되셨습니다. 앞으로 책을 빌리실 때 층별로 배치된 수정에 손을 얹은 후에 안내에 따라 책을 대시면 대출됩니다.”
“오오···.”
뒤에서 보고 있던 사티넬이 나직이 감탄했다. 그런 그녀가 이어서 회원 등록을 하는 동안 론은 도서관을 둘러봤다.
로비와 직원실 그리고 곳곳에 열람 테이블로 채워진 1층과 계단 너머로 보이는 다음 층.
건축가의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계단은 한쪽에 몰아서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타원형으로 네 방향의 모든 벽을 타고 올라가서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책은 다음 층부터 있었다.
2층은 교양 및 일반 서적, 3~4층은 마법 서적이 있었는데 책꽂이를 제외하면 모두 열람 테이블로 가득한 곳이다.
과거 지겹도록 와 본 곳이었기에 론은 양피지 종이와 깃펜을 빌려 1층의 테이블로 갔다.
곧이어 사티넬도 회원 등록을 마쳤는지 그의 앞으로 왔다.
“론님, 도서관 처음 왔는데 구경 안 해보시나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론이 무덤덤하게 가져온 양피지로 고개를 떨구자 사티넬도 더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그럼 도서관 구경 좀 하고 올게요.”
“네, 편하신 대로.”
그녀가 가고 론은 잉크통에 담갔던 깃펜을 꺼냈다.
『
23살 - 파견 나간 왕국 최남단 피에타 유적의 숨겨진 방. 유적 끝 제단의 문양이 숨겨진 방을 여는 열쇠.
27살 – 대륙 최서단 아르귈 왕국의 드래곤 레어 유적의 드래곤 본 도굴.
29살 – 아들렌 국제 은행의 트리마이어 계좌 도난. 금고를 여는 방법이 한때 유행을 하여서 지금도 기억.
···. 』
회귀 전 겪었던 큼직한 일들.
론도 사람인지라 누군가 취했던 기연들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차례차례 쓰고 있던 것이었는데.
『 ······
30살 – 샤허드 제국, 미라지 사막 폭풍의 제단 붕괴. 전설 속 스콜피온 킹의 신물 도난.
32살 – 안데르손 자작가 흑마법가로 전향. 그 후 남쪽 영지의 대부분이 흑마법가로 전향. 그 아래 있던 폼페이아 왕국 흑마법 옹호.
40살 – 언데드 군단 동대륙 침공···.
동대륙의 대부분 국가 흑마법에 수용, 라스카 교국 고립···. 』
회귀 전 론은 가뜩이나 유적관리단에 있었기에 유적에 관한 정보에는 빠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금 의아했다.
본 드래곤, 스콜피온 킹, 히드라.
과거 이 땅을 재앙의 흑마법으로 물들인 주범들인데, 어째 모두 유적들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관련 유적들은 본체들이 활개를 치기 전에 다 박살이 났었고.
‘설마···제물 소환이었다고?’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흑마법.
언제부터였던 걸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말 당황스럽게도 처음에는 분명 흑마법이 아니었다.
‘그래, 어둠의 원소.’
처음에 그들은 어둠도 하나의 원소라며 마법 사회의 인정을 요구하였었다. 당시 꽤나 저명하던 마법사들과 이를 따르던 적잖은 무리가 동참했었기에 이는 곧 자연스레 수용되었다.
그렇게 양지로 스며든 어둠의 세력.
아카데미와 마탑 등 각종 교육기관을 비롯해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자 그들은 그때부터 권하기 시작했다.
바로 흑마법을.
철저한 지성과 끈기 그리고 인내로 정진해야 하는 보통의 마법과는 달리 흑마법은 그러지 않았다.
억눌린 본능과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게 했다.
그 달콤함에 취한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이윽고 그들은 목적했던 바를 드러냈다. 바로 죽음과 영혼. 죽은 것을 살려냈고 영혼을 강제로 다스렸다.
이것이 단순한 어둠의 원소가 아니란 걸 사람들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대륙의 절반이 흑마법으로 물든 후였다.
‘흑마법···.’
딱히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다.
“아···.”
허나 떠오르는 기억을 멈출 순 없었다.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끌려다니고, 쳐다봐도··· 모른 체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시대의 편승이라 여겼기에.
“우웁!”
자신 스스로가 역겨웠다.
부끄럽고 역겨운 기억.
토악질 속에 뱉어내고 싶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있는데 문득 한 기억이 떠올랐다.
가문과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와 둘째 형. 그리고 그런 둘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가문을 책임졌던 첫째 형.
‘난··· 뭘 한 거지?’
자신과 같은 약자는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그저 생존해 나가는 것뿐이라며 애써 자위하던 기억들.
“하아···.”
파지직.
론이 쓰고 있던 양피지를 구기며 도서관을 나섰다.
그냥 되는대로 막 걸었다.
대충 사람들을 피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 뒤편의 깊숙한 숲이다.
휘이익. 툭.
손에 있던 양피지 조각을 던졌다.
우웅. 손에서 마법진이 펼쳐졌고, 양피지 조각은 붉은빛을 띠더니 이내 재가 되어버렸다.
털썩.
딱히 힘이 빠진 건 아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무력감에 버틸 수가 없었다.
“아···.”
***
한동안 멍하게 지냈다.
아카데미 일정이야 한 번 경험했던 것이기에 어려운 것이 없었고, 게다가 옆에는 사티넬도 있었다.
“론님, 수업 끝났어요.”
“아아,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요즘 통 집중을 못 하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론의 무덤덤한 반응에 사티넬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허나 그러고는 이내 하려던 말을 마저 이었다.
“마법이론 교수님이 숙제로 가(假)마법진 연습해 오래요. 보충수업이 필요한 사람들은 저녁 먹고 오라 했는데, 론님은 필요 없겠죠?”
“사티넬도 필요 없지 않나요, 그 정도는?”
가마법진은 론이 입학할 때 자격인증으로 했던 것이었다. 현상 발현이 목적이 아닌 마법진 그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
“할 순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교수님이 봐주신다고 해서 저는 가보려고요.”
“네, 뭐 그것도 좋겠네요.”
여전히 영혼 없는 저 말투.
사티넬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입학식 때의 강렬했던 인상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마치 진짜 신기루마냥 사람이 희미해져 버렸다.
걱정도 되고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말하든 상황이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사티넬이 물러섰다.
‘난...그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론의 무기력은 한동안 쭉 지속될 줄만 알았다.
“크루딘 안데르손 그리고 론 스펜서.”
“론님!”
자신을 호명하는 목소리에 론이 멍한 정신을 깨웠다.
원소마법 시간이었는데 티라우스 교수가 ‘원소 지배’라는 현상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두 학생은 준수한 성적으로 본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죠. 크루딘, 론. 모두 기초 원소마법 어스(earth)를 펼칠 수 있죠?”
“네.”
“예.”
“그러면 두 사람이 이제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상대의 원소마법을 제압해 보세요.”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아니 오히려 엄청 쉬웠다.
다만 먼저 훈련장으로 나서는 크루딘 안데르손을 보는데 마음이 심란했다.
회귀 전 그의 가문은 흑마법 가문으로 전향하고 얼마 후 폼페이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당연히 아들렌 왕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는데, 저 크루딘만은 아들렌에 남았다.
3대째 6서클 마도사를 배출한 안데르손 가문. 4대째에 해당하는 크루딘은 형제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형들에게 치이고 밀렸음에도 그는 과거 전쟁에서 꽤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며 아들렌을 수호해냈다.
“화이팅이요!”
사티넬의 작지만 힘 있는 응원에 회고는 끝이 났다. 크루딘은 이미 내려가고 있었기에 론도 서둘러 따라갔다.
두 사람이 훈련장에서 적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서자 티라우스 교수가 말했다.
“하나 둘 셋 구호와 함께 마법을 시전하세요.”
“네.”
둘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외쳤다.
“하나, 둘. 셋!”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마법 시범.
기억 속 크루딘은 악랄한 성격도 아닌데다 굳이 봐줄 이유가 없었기에 론은 적당한 선에서 눌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스!”
둘이 동시에 마법을 외쳤다.
땅바닥에 뻗은 손 아래로 마법진이 생겨났고, 이내 마나 공명음이 들려왔다. 우우웅. 마법 발현이었다.
마법진은 론이 조금 더 컸다.
실은 크루딘이 만드는 걸 보고 맞춰서 대응한 것이다. 괜히 엄청 커다랗게 했다가 과도한 관심 세례를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
슈우우욱.
마법진에 새겨진 마법식이 제대로 발동했고 모래들이 마나처럼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리고 크루딘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흙을 다 끌어 올렸는지 곧이어 론에게 다가왔다. 론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퍼억.
마치 사람이 힘겨루기하듯 두 모래 파도가 부딪혔다.
론은 크루딘이 너무 허무하지 않도록 잠깐동안 비등비등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적당하다 싶은 순간 그가 마법진에 마나를 더욱 부여했다. 우우웅. 모래 파도가 크기를 불려갔다.
원소 지배는 단순하다.
같은 원소 간의 대치 시 커다란 쪽이 약한 쪽의 주도권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론은 적당히 힘든 척 연기하며 모래 파도의 덩치를 불려 나갔고, 이내 크루딘의 것을 삼킬만한 수준이 되었다.
‘그럼 이만.’
한 번 뒤로 젖힌 모래를 관성을 이용해 그대로 찍어 눌렀다.
콰아악.
“헉!”
훈련장의 한쪽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외부요인에 의해 강제로 마법진이 파훼 됐기 때문이다.
털썩.
그런데 그게 크루딘이 아니었다.
론이었다.
투자한 마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너무 당황한지라 순간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이 접혔다.
솨아아아.
한껏 높이 치솟았던 론의 모래 파도가 통제력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모래더미에서 묵묵히 형상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창 형태의 덩어리.
크루딘은 형태변환 마법진 없이 오로지 심상만으로 모래를 창으로 만든 것이었다.
‘미친...놈인가.’
론의 모래 파도가 다 내려앉자 크루딘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헌데 그의 모습은 좀 심각했다.
“하아···. 하악! 하아···.”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호흡은 무척이나 불규칙했다.
“그만!!”
티라우스 교수의 중재 소리. 동시에 크루딘의 모래 창이 무너졌다. 퍼석 소리까지 나는 걸 보면 상당한 마나와 심력이 소모된 게 틀림없었다.
물을 것도 없이 티라우스 교수는 크루딘에게 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들 돌아가서 복습하고 내일 보도록 하죠.”
수업은 그대로 끝이 났다.
그녀가 급히 크루딘을 치료실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회귀 전과는 정말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건가.’
1서클 유저가 3서클의 개념식을 심상만으로 구현했다.
‘크루딘 안데르손. 안데르손 가문에서도 뒤처져서 내 논 자식 아니었나. 과거에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훈련장 좌석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방금 펼쳐진 마법이 그냥 단순한 원소마법이 아니라는 걸.
사티넬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네, 뭐 보다시피.”
“아쉽지만 그래도 대단하셨어요. 그런데 저 크루딘이라는 분도 참 대단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미친놈이 있었을 줄이야. 하하···.”
졌음에도 론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훈련장 바닥에 누웠다. 근래 참 많이도 바닥에 드러눕는 거 같다.
“로. 론님?”
왠지 모르게 마음이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