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천여 명이 넘는 인파가 아카데미 대연회장에 모였다. 졸업식과 입학식을 위해.
참고로 아들렌 아카데미는 졸업식과 입학식을 같은 날 치른다. 입학생들의 마음을 고취시키기 위한 아카데미의 의도였는데 300년째 이어오는 전통이다.
“다음 순서로 졸업생 대표 브랜든 블룸벡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대연회장의 행사를 이끌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검은색 학사모를 쓴 백여 명의 학생들 사이로 한 명의 학생이 나아간다.
“반갑습니다. 과분하게도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된 브랜든 블룸벡입니다.”
“휘유~!”
“호오오오오~!”
‘저 사람이었구나.’
졸업생들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론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
과거에는 졸업생들의 기에 눌려 꽤나 긴장을 했었다. 그 때문인지 당시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어제 봤던 그 브랜든이 연설을 시작했다.
“아들렌 마법 아카데미에서의 3년은 제게 끝없는 실패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십, 수백 번의 실패를 했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물론 손가락질도 받았습니다. 꽤나 망신도 당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다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가지지 않습니다. 생명이 위험해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브랜든이 좌중을 둘러보며 최대한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수십, 수백, 수만 번의 끊임없는 실패가, 여러분을 위대한 성공으로 이끌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끝으로 제가 지금에 오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함께해 준 모든 동기와 교수진께 이 영광을 바칩니다.”
“호오오오오!!”
“와아아!!”
짝짝짝짝짝.
지금까지의 식순 과정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끊임없는 실패라···.”
코끝이 찡했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이들은 그냥 알아서, 타고나서, 쉬워서, 머리가 좋아서. 그래서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끊임없이 실패 했단다.
망신과 창피 속에서도 그래도 했단다.
마음가짐의 차이였던 걸까.
이후 식순은 짧았다.
졸업생 대표와 입학생 대표의 선물 증정식. 졸업생은 입학생에게 마법 서적을, 입학생은 졸업생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그리고 이어진 총장의 훈화와 입학생 환영을 끝으로 모든 식은 끝이 났다.
졸업생과 그 가족들이 빠져나가고 한참 뒤에야 신입생들은 대연회장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니칸, 사브르에소, 다이라 등등.
다들 밝아 보이는 게 졸업생들이 남기고 간 열정이 꽤나 고무적이었나 보다.
론 자신 또한 그랬고 말이다.
처음 회귀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5서클에 해당하는 깨달음이 있으니 어딜 가서 뭘 해도 성공하지 않겠나 하는.
물론 지금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회귀 전 기억을 통해 마나 스팟 정도는 꿰고 있어서 부족한 마나를 채우면 서클쯤은 금방 늘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각종 발생하지 않은 기연들까지 따지면 효율상 당장이라도 가문을 뛰쳐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는 5서클까지만이다.
회귀 전에도 80년 통짜 인생의 결과물이 5서클이었다. 기연 몇 번을 통해 더 오른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했다가 20대에 5서클이 된 후 그대로 멈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천재들은 과연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했기에 그들은 더 나아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 입학식에서 론은 조금은 느꼈다.
“오길 잘한 것 같다.”
***
입학식 다음 날 하루 동안은 수강 신청을 하였다.
1학년은 공통과목만 있기에 요일과 시간만 선택하면 되지만 2, 3학년의 경우 선택 과목 교수와의 면담이 필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어제부터 수강신청을 하고 있는 중이다.
“론님은 언제 들으실지 정하셨나요?”
일반 마법학 건물의 대강당이 소란스러웠다. 130여 명의 신입생이 이제 막 커리큘럼 설명을 듣고 난 참이었기 때문. 그리고 그 설명이 끝나자마자 사티넬이 물어왔다.
“아직···. 음?”
탁. 탁. 탁.
허나 고민은 짧았고, 단상에 새로이 등장한 사람에게 모두가 집중했다.
총장이었다.
졸업 및 입학식 때 졸업생들 뒤에서 멀찍이 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성성한 백발과 기다란 흰 수염. 충분히 지적으로 보일만 한 외모였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웬만한 기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덩치와 특유의 분위기가 상당한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총장 럼블 아그네스 카운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럼블 아그네스 카운트.
전 세계를 통틀어 몇 없다는 7서클의 대마도사 중 한 명이다. 외양도 외양이지만 마법사라면 한 번쯤은 선망해 봤을 대마도사의 등장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흐음? 이번 신입생들은 인사할 줄을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예의가 없는 건가요?”
“바, 반갑습니다! 총장님!!”
“반갑습니다!!”
그제야 대강당 곳곳에서 인사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먼저는, 입학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방금의 일 때문인지 귀족 무리에서 한 명이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럼블도 그게 나쁘진 않은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총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심심한 축하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흐음···어디 보자.”
럼블이 대강당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쭈욱 훑었다.
“흙갈색 직모에 짙은 눈썹 그리고 갈색 눈동자, 바쿠만 가문이군요.”
“예 맞습니다. 스텐리 바쿠만입니다.”
럼블에게 지목하당한 스텐리가 일어었다.
“아브렘 바쿠만, 리키 바쿠만. 그리고 대대로 바쿠만 가문은 모두 준수한 성적과 모범적인 생활을 했지요.”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스텐리가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런데 입학한 귀족들 모두가 그와 같이 준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을까요?”
몇몇 귀족들은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해 했고, 또 몇몇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소곤거렸다.
“300년 아카데미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 입학생 기준으로 귀족은 단 한 번도 평민에게 밀린 적이 없습니다.”
‘시작됐군.’
론이 속으로 생각했다.
대부분의 귀족은 그 자라온 환경 때문에 평민이라는 존재를 철저히 ‘아래’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결과는 처참하다.
“허나 졸업생 기준으로는 어떨까요? 약 15퍼센트. 지난 300여 년간 48회의 수석 졸업생이 평민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럼블은 침잠해진 귀족 무리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엔 귀족 전체로 봐볼까요? 역사적 통계에 따르면 귀족들의 절반이 졸업할 땐 평민들에게 따라 잡힙니다. 심지어 그 따라 잡힌 귀족 중엔 말만 들어도 다 아는 백작가 혹은 후작가의 자식도 있었지요.”
“...”
침잠하다 못해 똥 씹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얼굴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평민들도 있는 이곳에서 굳이 귀족들의 체면을 뭉개는 럼블의 연설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마법은 혈통과 계급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럼블이 대강당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특히나 귀족 무리가 있는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마법은, 혈통과 계급이 아닙니다. 오직 지성과 끈기만이 마법의 극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추가 부연 설명은 없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올 정도면 머리도 나쁘지 않거니와 이쯤 했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추가로 평민이라고 해서 제 집 하인 다루듯 명령과 강압적 어조를 사용한다면, 경고 없이 ‘제명’입니다. 해당 학생뿐 아니라 해당 가문의 4대에 이르도록 ‘제명’입니다.”
귀족과 평민 너나 할 것 없이 좌중이 고요했다.
“이는 아카데미를 설립한 로이드 4세 선왕 폐하때부터 내려온 칙령이며 아카데미의 근간입니다. 이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지금 나가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없지.’
저 말은 아카데미뿐 아니라 마도 왕국 아들렌에서 나가라는 말과도 같았다.
왕국이 마법 인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나라를 운영하는지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 말하는 이가 7서클 대마도사 럼블이었으니, 한껏 자만과 우월감으로 찌들었던 귀족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으리라.
“그럼 이상으로 여러분들 모두의 뜻깊은 아카데미 생활이 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럼블은 대강당을 나갔다.
“아···.”
옆을 보니 사티넬이 가슴에 두 손을 모은 채 나직이 소리를 냈다. 꽤나 감동을 받았는지 사라지는 럼블의 뒷모습까지 쫓는 그녀다.
북부의 오지로부터 대륙을 횡단한 그녀임에도 그 나이대의 풋풋함은 아직 그대로인가 보다.
론은 미소를 살짝 띠며 마저 하던 수강 신청에 대해 생각했다.
1학년의 수강과목은 마법이론, 원소마법, 마법의 역사, 산술학, 약초학이다. 마법이론과 원소마법은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 두 시간씩 고정이었고, 역사와 산술 그리고 약초는 1시간씩 주당 3회였다.
즉 앞의 둘은 시간대만 정하면 되고, 뒤의 셋은 요일과 시간대까지 정해야 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론은 이내 결정을 마치고 단상으로 튀어 나갔다.
“로, 론님?!”
단상의 한쪽에 커다란 게시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강의 별 신청 기입란이 있었다. 강의당 정원이 22명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알아서 꽉 차면 다른 시간대로 들으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다른 말로는 선착순이라는 얘기였고.
론이 신청란에 서명을 다 하고 마지막에 담당자에게 전체 시간표를 제출했다. 그가 확인하는 건 인원 초과 강의에 신청했는지와 신청한 강의 간 시간대가 겹치는지 최종 확인하는 것이었다.
“네, 겹치는 것 없습니다.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시간표를 잘 접어 재킷에 넣고는 론이 강당을 나섰다.
“아 참.”
가는 길에 비치된 아카데미 커리큘럼 가이드 책자도 하나 챙겼다.
***
붉은 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푸른 눈동자.
수도에 돌아다니다 보면 한두 번쯤은 볼 법한 그런 곱상한 귀족의 외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전까지는.
어릴 적 인적이 드문 숲속에 살면서 부모님에게 마법을 배웠다. 부모님은 마나 호흡법이라며 암송 구절을 알려줬는데, 나이가 차오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눈에 띄지 않았다. 또래에 비해 곱상한 외모였음에도 음심을 품기는커녕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거의 아는 체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로웠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다가와 주는 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서 어린 애들이 당하는 취급, 약한 여자가 당하는 일들을 보고는 안심했다.
어릴 적 부모님이 가르쳐 준 마나호흡법은 자신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마법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쏠렸고 아들렌 왕국으로 향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서.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마나호흡법 덕분에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 일은 없었다. 적당한 일거리에 지원을 하면 웬만하면 받아줬기에 무사히 아들렌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을 지나쳐 왔었다. 지금까지 그랬기에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멀리서도 나를 정확히 쳐다봤다. 그리고 나를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환상인 줄 알았다.
명색이 마법 아카데미였으니까.
하지만 살을 꼬집고, 마차를 얻어 타고, 하루만에 입학 시험을 치고, 다음날 무심히 자신을 지나치던 그를 보았을 땐.
더 이상 환상이 아님을 시인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귀족이라는 자가 어찌 저렇게 이타적일 수 있는지. 이유가 무엇이고, 평민인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배려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그가 누구보다 빠르게 입학 신청을 마치고 강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커리큘럼에 대해 다 이해는 한 걸까. 그는.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사라졌다.
여전히 조용한 학생들 속에서 사티넬이 일어났다. 수강 신청은 선착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