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5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
어느새 마차는 아카데미의 정문에 도착했다.
“여기 앉아 기다리세요. 대리신청자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앉아 있으세요. 제가 그게 편해서 그럽니다.”
“아···네···.”
불안해하는 사티넬을 뒤로하고 론이 마차에서 내렸다. 과거 익히 봐왔던 아카데미의 정문과 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참···그때는 그렇게나 긴장했었는데.”
그래도 이번 생의 첫 아카데미라 그런지 조그만 감상이 일었지만론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할 게 있었다.
마차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커다란 정문 옆으로 사람만 다니는 쪽문. 거기로부터 기다린 줄은 시작되었다.
아카데미 직원이 대기자들을 한 명씩 받고 있었는데, 그 뒤로 론이 찾는 이들이 간간이 보였다.
[시험표 팝니다.]
며칠 노숙을 했는지 지저분한 차림의 사람들이 피켓 같은 것을 만들어 중간중간 홍보하고 있었다.
혹시 못 구하면 어쩌나 했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론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어느새 나트람이 따라붙었다. 사티넬을 마차에 태우기 위해 설득할 때, 그 또한 어느 정도 들었기에 딱히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론이 적당한 거리에 있던 대리신청자에게 다가가자 그 사내가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으리.”
고개를 꾸벅 숙이며 술술 말이 나오는 게 누가 보면 꽤나 알고 지낸 사이라 착각할 정도다.
“긴말은 필요 없을 것 같고, 얼마지?”
괜한 존대로 쉬운 인상을 줄 이유가 없었기에 론은 바로 하대하며 말을 텄다.
“예예, 빠르면 저야 좋지요. 3골드가 적정 시세입니다요. 나으리.”
“3골드라...”
“크흠!”
나트람이 듣고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렌 아카데미의 1년 등록금이 10골드다.
1골드는 100실버이고, 1실버는 100쿠퍼다. 그리고 이러한 화폐로 식당을 이용한다고 치면 평민은 보통 30쿠퍼, 귀족들의 고급 레스토랑은 1실버부터 천차만별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50실버면 4인 평민 기준으로 한 달은 지낼 수 있는 생활비 수준이다. 그런데 3골드라니.
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시다.
“쯧.”
그가 미련없이 줄 뒤쪽을 쳐다봤다.
더 나은 거래 대상을 찾기 위해서.
“나으리?”
론이 바로 발걸음을 돌리자 대리신청자는 당황했다.
“나으리! 죄송합니다! 더, 더 싸게 해드리겠습니다! 나으리!”
이를 무시한 채 론은 그다음으로 보이는 대리신청자에게 갔다.
그들이 물론 밤낮 노숙을 하며 수고한 것은 맞다. 허나 그래도 이는 과했다. 타국의 귀족들을 위해 제재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도 적잖게 있기 때문이다.
당장 사티넬이 그랬다.
평민 중에 1서클이다.
이는 절대 흔하지 않은 경우다. 입학시험을 봤으면 무조건 합격인 수준.
그런데 론은 회귀 전 그녀를 보지 못했다.
크게 한탕 벌어먹으려고 벌떼같이 모인 이들이 아니꼬워서 론 또한 흥정을 시작했다.
“저기서 2골드 50실버를 얘기하던데 자네는 얼마에 팔 건가.”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는 할 말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생각하는 그나마 적정 가격의 대리신청자를 구했다. 정문까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고 말이다.
“그럼 시험표를 받아서 마차장으로 오게. 여기 내 하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 나으리!”
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로 돌아갔다. 뭐 간혹 이런 이들 중에 이중 계약으로 사기를 치거나 거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홧김에 취소해 버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시험은 3일이니까.’
입학시험은 길었고, 대리신청자는 그 뒤로도 많았다. 안달이 나는 건 그들이지 론이 아니었다.
딸각.
어느새 도착한 마차의 문을 나트람이 열었다.
“아, 오셨군요.”
사티넬이 말하며 허둥지둥 나오려고 했다.
“앉아 있으세요.”
“네?”
“대리신청자가 신청하고 오려면 멀었습니다.”
“아아···, 네.”
한탕주의로 살려는 이들을 보다 사티넬을 보니 론의 마음이 풀어졌다. 그녀의 자립심과 결단력은 한평생을 산 그에게도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도 있겠다 문득 그녀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그럼 사티넬 양의 부모님은 마법사였겠군요.”
“네 맞아요. 덕분에 마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힛.”
“아스테리아는 마법을 익히기 좋은 곳이던가요?”
“네, 인적도 없고 마을에서 벗어날수록 오래전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온 곳이어서 정말 좋았어요. 뭐 물론 그보다 마법이 더 좋아서 나오긴 했지만요. 헤헤.”
귀족임에도 적정한 거리를 두며 배려하는 론이 편안했는지, 그녀는 제법 감정표현을 했다.
‘아스테리아의 깊은 산 속이라···.’
회귀 전에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반평생 동안 지낸 유적관리단의 유적이라는 것도 실은 고대인들이 만든 인공 구조물이었기에 인적이 드문 북부의 땅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그런데 왠지 이번 생에는 그곳에 갈 것만 같았다. 그 자신도 가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론은 자신이 가보지 않은, 그리고 경험해 보지 못한 사티넬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똑똑.
“론 도련님, 시험표를 받았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안에 있던 둘의 안색이 환해졌다.
“가시죠. 그럼.”
나트람에게 건네받은 시험표에는 딱히 위조라 할 만한 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평민이 쉬이 흉내 낼만한 그런 게 아니었다. 상당히 고급 기술이란 말이다.
뭐 사람을 구해 여차저차 만들어 볼 순 있겠지만 그럼 그렇게 해서 귀족에게 사기라도 치겠는가. 효율을 놓고 봐도 1년에 한 번뿐인 장사를 위해 투입되고 산정해야 할 비용과 위험이 너무 컸다.
허나 그럼에도 론은 마지막까지 확인했다.
저 멀리 시험표를 제출하고 입학 시험장에 들어가는 사티넬이 보인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고는 이어 허리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그녀에게 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뒤 뒤돌아섰다. 마무리할 게 있었다.
“헤헤.”
양손을 맞잡고 비비며 기다리는 대리신청자.
“수고했소.”
론이 두툼한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에게 넘겼다.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멀어지는 그를 보며 론이 말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군.”
**
수많은 인파를 받아 시험을 치르는 정문의 입학 시험장과는 달리 자국 귀족들의 자격을 인증하는 곳은 좀 더 들어가야 한다.
정확히는 기숙사 바로 옆.
인증되는 대로 바로 기숙사에 배치할 수 있게끔 한 아카데미의 동선이었다.
“도련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꼭 합격하실 겁니다!”
“예, 당연히 그래야지요.”
회귀 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충분했다.
과거의 향수를 느끼며 기숙사 옆의 학생 강당 입구로 들어갔다. 주황색 건물 벽돌과 그 내부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회귀를 실감케 했다.
‘그래, 그 때랑 똑 같군.’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대기자는 없었다. 그래서 론은 바로 인증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스펜서 남작가의 론입니다.”
“호오! 반갑습니다. 아들렌 아카데미의 일반 마법학 교수 프레드입니다. 스펜서 가문이라면 드로고와 드락사의 가문이군요. 다들 평균 이상은 했었죠.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렌 왕국은 마도 왕국이라 칭해지는 만큼 자국의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특별했다.
서클마다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는데, 5서클의 경우 남작, 6서클은 자작, 7서클은 백작. 이런 식이었다.
이러한 대우는 당대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단승 작위였는데, 만약 4대에 걸쳐 연이어 성취를 이루는 경우 명문으로 취급하여 왕은 영지를 주고 세습 귀족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은 최소 5서클에다가 또한 마법 분야의 조예가 깊은 엘리트들이었기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가 있었다.
“론 군, 그렇다면 바로 시작하지요.”
“예.”
프레드 외에도 양옆에 두 명의 교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어째 첫날부터 심드렁한 눈빛이다. 말 수도 없고.
허나 론은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프레드의 우측은 고대 룬 문자학의 알버트 교수였다. 그는 교수임에도 자신의 과목에 심취하여 학생들에게 무관심했고 성적도 더럽게 짜게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그 알버트 교수에게 상위 성적을 받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디서나 두각을 드러내는 소위 천재들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론은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알버트의 놀란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마나 출력과 마나 유도, 그리고 미리 고지한 가(假)마법진 순으로 펼치면 됩니다.”
“예.”
간혹 그런 이들이 있다.
부모 혹은 고위 마법사의 도움으로 심장에 서클 하나를 만들어 오는.
앞서 프레드가 말한 세 가지 항목은 마나의 세밀한 컨트롤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를 별 어려움 없이 수행할 정도가 되면 스스로 심장에 서클을 만들 수가 있다.
즉, 지금 프레드는 입학생이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서클을 다룰 줄 아느냐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고위 마법사인지라 이미 론이 입장할 때부터 그의 심장에 새겨진 서클쯤은 알고 있었다.
“후우.”
간단한 호흡 뒤 론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가 심장의 서클에 집중하자 이내 그것이 회전하며 마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웅. 푸른 빛의 무형 에너지가 오른손에 모인다. 마나 출력.
이어 정면을 향해 손을 펼치고 뭉친 마나를 움직였다. 완전한 원부터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오각형. 마나 유도였다.
그리고 이것과 더불어 원소를 다루는 마법식을 심상에 새기고 한 번에 출력하면, 그것이 바로 마법진이다.
“음?!”
이제껏 지루해하던 알버트 교수의 눈빛이 크게 떠졌다. 교수진들 앞에 펼쳐진 마법진은 평범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정사면체.
2서클의 기초 원소 마법을 넘어 3서클의 마법을 대입할 수 있는 복합마법진이었다.
자국의 귀족을 대상으로 자격인증은 말 그대로 1서클의 확인이었다. 그래서 평가 항목의 마법진은 말만 그것일 뿐 무언가가 발현되지는 않는 가(假)마법진이다.
즉 완벽한 진의 형성과 그 안에 쓰인 마법식의 인지 여부만을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론은 이를 가뿐히 넘기고 그 마법진들을 모아 정다면체를 만들었다.
“스펜서 가문이 이렇게 영특했었나? 허! 정말 대단하군. 고대 룬 문자학의 알버트 교수네. 심장의 서클은 하나인 거 같은데 복합 마법진은 따로 연습한 겐가?”
그 무관심하던 알버트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예, 2서클을 공부하던 중 복합마법진에 관심이 생겨서요.”
“1서클 유저가 정사면체의 복합마법진이라니! 마나컨트롤, 공간지각력, 부동심 모두 훌륭합니다!”
“껄껄걸, 기대가 되는군요. 론 학생.”
프레드 교수의 좌측에 있던 노년의 교수, 보어헨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승인을 확정 지었다.
그 후 입학식 일정과 훈훈한 덕담 몇 마디 더 듣고는 론은 강당을 나왔다.
“이게 천재들이 사는 세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