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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 마법사의 회귀-4화 (4/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4

슬리푸스 산지에서 수에즈까지 약 사흘이 걸렸다.

바로 수도로 갈 수도 있었지만 론과 나트람은 수에즈에서 하룻밤을 더 묵었다.

마음이 심란했던 론이 주저한 것이다.

“드시지요. 론 도련님.”

“예.”

‘하루 더 버텼다고 역시 달라질 리가 없지. 그래, 부딪혀 보자.’

환한 빛으로 주위를 가득 채우는 게이트를 향해 론이 몸을 밀어 넣었다.

슈우우욱.

무언가 몸을 감싼다는 느낌.

그 느낌이 들기 무섭게 곧바로 빛에서 토해져 나왔다. 회귀 전 유적 파견으로 수십 번을 이용한 게이트였기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능숙하게 먼저 나온 론이 나트람을 기다렸다.

파지직.

“후유···.”

양손에 묵직한 짐 꾸러미를 든 나트람이 게이트를 나오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트람도 처음은 아닐 텐데. 많이 안 타봐서 그런가.’

나트람의 안색을 확인 후 론은 출입 절차를 따랐다. 명부 서명과 몇 가지 조항의 확인.

모든 절차가 마치고 게이트 관리소를 나서자 수도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멋있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에서는 일부러 게이트를 고지에 설치한 게 아닌가 하는.

높다란 곳에서 보이는 수도의 모습은 장엄했고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장관 끝에 위치한 국왕성. 이는 그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

한참을 감상하고 있자니 어느새 나트람이 다가와 말했다.

“도련님은 처음이신데도 능숙하시군요.”

그 또한 개인 절차가 끝났나 보다.

“뭐 건너건너 들은 것도 있고, 대충 봐도 어서 와서 해달라는 눈빛이잖습니까.”

“오오, 그렇군요.”

“그럼 움직이죠.”

“예.”

계단 밑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 행렬로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배경으로 수도의 번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추수기가 끝나서 그런지 거리는 활기가 가득했다.

“저들 중에도 아카데미 입학생이 있겠군요.”

여행객용 마차에 탄 것이었기에 나트람이 론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러겠지요.”

조그만 창문에 눈을 그대로 고정한 채 론이 대답했다.

나트람의 말 때문이었을까.

론은 회귀 전 함께 다녔던 아카데미 친구들이 떠올랐다. 니칸, 사브르에소, 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만.’

그들과는 졸업 후 연락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둘째 도련님의 입학식 날에는 시험을 보겠다고 몰려온 이들이 얼마나 많던지. 줄이 끝도 없었습니다. 올해는 과연 어떨런지요.”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사브르에소도 세습 귀족이 아니었기에 입학 시험을 치르고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했었다.

꽤나 영특했고 그래서 같이 다닐 때면 은근히 두뇌 역할을 하던 친구였다.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장 1학년 때였다.

시험 항목이었던 2서클의 어스를 제대로 시전하기 위해 우리는 밤을 새웠었다. 그때가 아마 처음 우리가 모인 날이었을 거다.

가문의 특기였던 불의 마법은 다른 원소들에 비해 특히나 심상에 치중된 마법이었고 흙과는 성질이 반대였다. 가뜩이나 둔재였던 론은 처지가 비슷한 이들과 모여 시험 준비를 했고, 그 계기로 그들과 친해졌다.

부단히도 노력했던 기억.

비굴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난 삶과 동일하게 2서클 마법에 목을 매며 밤을 새우고, 룬어를 공부하며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유대감은 그 당시 여러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 생긴 것이었다. 즉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쉽지 않네.’

회귀는 마냥 기쁜 게 아니다.

불편한 과거를 마주해야 한다. 마냥 반복되는 과거라며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카데미에서의 일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아···.”

애초에 무던한 성격이라 특별한 사건 없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졸업식이 충격이었다.

은연중 귀족이라는 우월감에, 정통 마법사 가문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살아온 론은 입학 초 서클도 만들지 못한 평민에게 실력을 추월당했다.

어찌 보면 둔재인 론에게는 예정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서야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마법사 사회에서 혈통은 재능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귀족 무리와 다니며 은연중에 평민들을 무시했던 기억이 그의 얼굴을 붉히었다.

‘다시는 그렇게 못하겠네.’

그때의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생에는 그 무리에 자신이 없을 것임을 인정했다.

‘어렵군. 돌아와도···.’

론은 고개를 젖히고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흘려보냈다.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론은 자연스럽게 호흡에 집중했다.

들숨, 날숨.

그리고 속에 담긴 마나.

시끌벅적한 바깥만큼이나 존재하는 마나들은 모두 개성이 넘쳤다. 아무리 마도 왕국이라 해도 도심은 그 인공적인 특성 때문에 자연 가득한 숲속보다는 순수한 마나의 양이 떨어진다.

그래서 론은 마나 축적 보다는 정령사의 찬가를 되뇌며 각각의 마나에 교감했다. 마나 감응력 수련에만 매진한 것이다.

사람, 개, 화분, 곡식, 음식점···.

평소와는 달리 교감에만 집중하니, 마치 눈으로 창밖을 구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제2의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론은 깜짝 놀랐다.

사람의 마나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다 하지만 본디 종(種)이 가진 특질처럼 공통된 느낌이란 게 있다.

헌데 지금 그의 감각에 잡힌 이는 무언가 달랐다. 규칙적인 사람들의 배열들을 보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람이 맞았다.

론이 눈을 뜨고 말했다.

“마차를 멈추세요.”

“예? 아 예예.”

탕. 탕. 탕.

나트람이 마차 안의 알림 손잡이를 서둘러 두드렸다.

“이보시오! 당장 멈춰 보게! 멈추게!”

히이잉.

말이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론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도련님?!”

시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아까의 감각에 의지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했다.

수많은 사람 속에 단연 돋보이는 느낌. 다행히 마차가 많이 지나치진 않았는지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론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게 맞았고, 마주친 이 또한 사람이 맞았다.

“...”

회색빛 눈동자의 소녀였다.

론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더불어 마치 무얼 알고 찾아온 듯한 발걸음.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쳐다보자 그녀는 당황했다. 그리고 놀랐다.

소녀가 조심스레 론의 위아래를 훑었고, 과하진 않아도 꽤 고급스러운 복장이라 긴장을 했다.

귀족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허나 긴장한 것은 론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신기한 느낌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긴 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애초에 회귀 전 인생을 통틀어 이런 식으로 만남을 가진 적이 없었다.

“크흠···.”

론이 당황한 걸 느꼈는지 나트람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반갑습니다. 이분은 아들렌 마도 왕국의 서부, 불의 마법으로 정통한 스펜서 남작가의 셋째 도련님, 론님이십니다.”

“아! 론님을 뵙습니다. 사티넬입니다.”

손과 발을 이용해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예법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사티넬의 모습에 론이 정신을 차렸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귀족이라고 소개된 이가 존대를 하니 사티넬은 당황했다. 풍문으로 평민에게 존대해주는 귀족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막상 그 실체가 성인도 되지 않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니.

혈통을 떠나 철들지 않은 어린 애는 천방지축이다. 때문에 권력을 실감치 못한 어린 귀족이 벌이는 사고는 항상 예상 밖의 것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어른보다 파릇파릇한 귀족 자식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티넬은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고개를 숙인 채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 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무슨 말을 할까.’

“지인인 줄 알았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괜찮다면 동석하시겠습니까. 저도 아카데미로 가는 길입니다.”

순간 사티넬의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까지 비위를 맞춰주자 생각했는데 귀족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준비를 뭉개버렸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들렌 아카데미는 학년제이기에 당연히 입학생도 1년에 한 번씩만 받는다.

그런데 동석이라니.

그 말은 이 입학시험 대기줄을 이탈하라는 말과도 같았다.

“죗, 죄송합니다! 저는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왔습니다. 도련님의 호의는 정말 감사하지만, 이렇게 긴 줄을 후에 다시 선다면 시험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티넬이 허리까지 푹 숙이며 간절히 호소했다.

“아···.”

그제야 론은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하였음을 깨달았다. 너무도 일방적이었고 무지했다.

귀족의 특권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아들렌 국가의 귀족은 입학시험에서 면제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완전 자유 입학은 아니고 1서클 이상일 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귀족의 면은 세워주면서도 반대로 능력이 없으면 입학하지 못 하게 하는 교묘한 제도였다.

아까 사브르에소를 떠올렸음에도 눈앞의 소녀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사과드립니다.”

론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도련님의 호의를 들어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론은 무심코 줄의 시작점, 아카데미의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번뜩이며 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

다그닥 다그닥.

좀 전과 다를 바 없는 마차와 말발굽 소리가 마차 안을 채웠다.

허나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아까와는 달랐다.

론과 사티넬.

나트람은 마부석으로 갔고 사티넬을 설득해 동승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절박하던 사티넬이 동승까지 하며 감사한 이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입학시험 때문이었다.

아들렌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3일을 두고 열린다. 재능있는 옥석을 가려내기 위해 전 교수진이 동원되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인력이 부족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입학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오다 보니 안타깝게도 매년 시험을 치르지 못한 자들이 꽤나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짐작건대 눈앞의 사티넬은 그 안타까운 희생양 중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왜냐면 론의 감각에 그녀의 심장에는 하나의 서클이 선연히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 입학했더라면 과거 어떤 식으로든 두각을 드러냈으리라.

“대리신청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이면 모르는 게 맞지요.”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자국의 귀족은 능력 여하에 따라 프리패스가 주어지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해외 귀족들은 어떻게 하는가.

물론 그들은 시험을 봐야 한다.

하지만 아들렌 아카데미가 그 정도로 귀족의 면을 안 보는 것은 아니었다. 입학시험을 앞두고 대리신청자들을 매수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고고한 귀족이 평민들과 ‘같은 선상’에서 그것도 ‘기다림’을 가져야만 했다면, 타국 귀족들에게 상당한 불만을 받아야했으리라.

“그럼 아스테리아에서 혼자 온 겁니까?”

“네, 중간중간에 상인들의 잡역으로 마차를 얻어타서 그리 험한 행군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아스테리아에서 아들렌까지라니. 정말 대단하군요.”

딱히 사티넬과의 접점을 만들게 없었던 론은 아까 말한 지인과 비슷하다는 허황된 말을 계속 밀어붙였고 결국에는 제법 그럴듯한 대화로 이어지게 했다.

‘아스테리아라···.’

아스테리아는 아틀란샤 대륙에서도 북부의 깊은 산맥 쪽이다. 그리고 아들렌은 대륙의 중서부. 그 거리는 실로 아득하다.

헌데 눈앞의 소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오직 마법만을 보고 아들렌 왕국까지 왔단다.

과거 그 나이대의 자신이라면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못 했을 것이다.

“등록금은 있습니까.”

“장학생이 되어보려고요. 헤헤.”

귀족으로 태어나 큰 걱정 고민 없이 자란 론. 그로서는 사티넬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라렸다.

히이잉.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말이 멈추는 소리와 함께 나트람이 마부석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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