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
긴 시간이었다.
스펜서 가문의 셋째로 태어나 생을 마감하기까지.
아들렌 마도 왕국의 스펜서 남작가. 왕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귀족가였다. 피 튀기는 후계 싸움이 당연시되는 그런 귀족가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런 혈투와 거리가 멀긴 했다.
대대로 조상의 성향이 모나지 않았던 탓인지 출가를 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 나는 적잖은 가문의 도움을 받았었다.
말 그대로 평탄대로의 삶.
그 때문에 삶이 더 길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래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마법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술이나 혹은 정령술, 신성력 등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는 마법사로 명맥을 이어 온 가문의 전통을 따랐다.
아카데미에서 성실히 마법사 수업을 따랐고, 졸업 후에는 가문의 비전서를 탐독하며 수양의 깊이를 더했다.
“그 정도면 드레드에게 귀띔 정도는 할 수 있겠구나.”
성년이 지나고 내가 3서클의 성취를 얻자 아버지는 작은아버지, 즉 동생과 만남을 가졌다. 작은아버지는 왕국 마법병단의 현역 장교셨는데 연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얘기는 잘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왕실 소속 유적관리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온 가족, 온 가문이 축하해주었다.
그렇다. 조그마한 가문일수록 서로 돕고 밀고 당겨주는 것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가문의 응원이 무색하지 않도록. 그리고 왕국 소속 마법사 직함을 지키기 위해.
고대 유적들을 관리하며 틈틈이 마법 연구를 하였고, 그 성실함과 유지 및 보수 실적 덕분에 나는 유적관리단의 부단장 직위까지 올랐다.
이례적이었다.
평범한 서출이 왕실 요직에 앉는 건 흔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허나 그랬기에 나는 가문의 자식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밀려나듯 퇴직을 했다.
평생을 마법에 심취하고 가문을 위해 바친 삶.
가정이라고는 있을 리 없었고, 그저 내 취향껏 마법을 연구하며 노년을 보냈다.
그런 내게 하늘이 감동이라도 한 걸까?
소위 천재들이 삼십 대 혹은 사십 대에 이르곤 하는 엘리멘탈리스트, 즉 원소 마법의 스페셜리스트가 되었다. 내 나이 여든에 말이다.
재능 있는 자가 아니면 오를 수 없는 영역. 나이를 떠나 그 영역에 발을 디딘 것에 정말 행복했다.
생의 느즈막.
주마등처럼 스치는 기억들 끝에 꽤 괜찮은 피날레였다.
괜찮은 가문의 배경, 마음껏 열정을 피울 수 있었던 청년기, 만족스러운 노년까지.
옅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밀려오는 짙은 수마.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겸허히 받아들였다.
**
생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어 어느 순간 살아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거기에 선택은 없다.
누구는 유복한 가정의 자식으로, 누구는 부모도 모르는 고아로, 또 누군가는 복잡한 가정사를 안고 있는 자식으로 태어난다.
비단 배경뿐만이 아니다.
천재, 영재, 범재, 둔재 등 재능 또한 아쉽게도 취사선택이 불가하다.
“천치가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인 건가.”
어느 귀족가의 조촐한 서재.
그곳에서 한 소년이 속삭였다.
론 스펜서였다.
탁! 소리와 함께 들고 있는 책이 접힌다. 요 며칠간 론은 서재에 처박혀 온갖 책들을 뒤적거렸다.
‘어휴, 막내 도련님께서 웬일이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저 나이 때에 저렇게 책에 빠져 있던 분은 없었던 거 같은데···.’
‘글쎄, 아까는 눈도 멍하던데 혹시 뭔가를 깨달으신 걸까요?’
주변에서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 경험한 것은 대륙 어디에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
‘회귀.’
한평생을 살았던 사람이 과거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냥 꿈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허나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들은 너무도 또렷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하룻밤 꿈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줄 알았던 기억들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종결시키듯 론의 손바닥에서는 하나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륵
마법사라면 어렵지 않게 발현시킬 수 있는 기초마법 파이어. 허나 그 흔한 불꽃이 내비치는 색깔은 흔한 붉은 색이 아니었다.
심해처럼 짙은 파란색.
그저 단순한 마법에 무슨 해괴한 짓을 한 거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자라면 바로 알아볼 것이다.
푸른 불꽃이 붉은색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에너지와 온도를 뿜어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는 이맘때의 자신이라면 꿈도 못 꿀 수준의 불꽃이기도 했다.
그저 색깔 차이긴 하나 이처럼 고에너지와 고온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산소 주입이 필요하다. 즉 불 마법과 더불어 바람 마법을 중첩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아···하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심장에 걸쳐있는 써클이 마나가 없음을 시위라도 하듯 뻑뻑하게 회전한다.
허나 그럼에도 론의 눈빛은 총명했다.
“뭐가 어찌 됐든···.”
‘돌아왔다는 건 확실하군.’
푸른 불꽃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간 론의 생각을 어지럽히던 혼란도 사그라든다.
탈력감에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눈을 감자 이맘때쯤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부터 해서 굵직굵직한 기억들이 나열된다.
회귀 전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마법사였다. 아니, 좀 더 냉정히 말한다면 둔재라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하···하하···.”
하지만 그랬기에 론의 입에서는 더더욱 실소 터져 나왔다. 범재건 둔재건 뭐건 간에 어찌 됐든 자신은 80년이라는 세월을 가지게 됐다.
한동안 서재를 뒤지며 걱정도 했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론 스펜서, 자신은 돌아왔고 그것만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거추장스러운 삶의 철학 같은 것들에 얽매여 사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현실을 보자.
행운이 넝쿨째 들어왔다.
“아카데미에도 안 간 꼬맹이가 엘리멘탈리스트라니···. 하하하!”
론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
“론, 한동안 서재에만 박혀 있더니 뭐 재밌는 거라도 발견한 게냐?”
기다란 식탁의 상석. 에레드 스펜서의 커다란 목소리가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아버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성량은 쩌렁쩌렁했다. 성격 또한 화통해서 혼내고 다그치기보다는 사고 한 번 제대로 쳤다며 웃어넘기는 쪽이셨다.
서출인 자신에게 홀대 없이 대해준 아버지였기에 지금도 론은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회귀해서인지 마주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상념에 젖게 했지만, 지금은 가족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 아버지. 이리저리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할 겸 들렀는데 나름의 성취가 있었습니다.”
나름의 성취가 아니었지만 굳이 나댈 필요는 없어 보였다.
“호오 그래?”
“으응? 거짓말! 오빠 맨날 책만 뒤적거리고 있었으면서 무슨 성취야아!”
식탁 맞은편 첫째 어머니 옆에 앉아 있던 꼬마가 스스럼없이 외쳐댄다. 동생 레비아다.
피식. 어릴 땐 더 해맑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네 살 터울인 그녀는 애교가 많아서 가족들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곤 했었다.
그런 레비아를 놀라게 해 줄 겸 론은 손을 뻗었다.
“워터.”
손가락 끝에 조그만 마법진이 생기고 곧이어 물방울이 생겨난다.
퍼석.
다만 그 위치가 장식용 촛대 앞이었기에 촛불이 꺼져버렸다.
“파이어.”
그리고 이어진 론의 영창과 함께 조그만 불꽃이 촛대를 다시 밝혔다.
“에엑! 재미없는 오빠가 이상해···.”
“스읏! 레비! 오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첫째 어머니가 다그쳤다.
그러면서도 커진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는 게 여간 놀란 게 아닌 듯했다.
‘음···. 이맘때 치고는 너무 과했나.’
아니나 다를까.
레비아를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입을 쩍 벌렸다.
“흐음···. 드로고.”
“예, 아버지.”
“혹시 네 옆에 앉은 게 둘째 드락사인 거냐?”
“크흠. 아버지, 론이 맞습니다.”
“하, 하, 하하하···.”
상당히 파격적이었는지 헛웃음 끝에 받아들이는 아버지였다.
“론.”
“네, 아버지.”
“네 열다섯 살 생일 선물이 무엇이었었지?”
“올해로 열다섯이고, 아직 생일은 안 지났습니다.”
“아차차. 그랬지!”
농담 반, 확인 반.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다.
“하하하, 이거이거 스펜서 가문이 이제 좀 날개를 피는 건가. 렉스터! 마르코비치 와인 좀 가져오게!”
“예, 가주님.”
식탁 입구에서 하인과 대기하고 있던 쉐프가 대답했다.
아버지의 기분이 아주 좋은 듯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꺼내지 않는 귀한 와인을 꺼내는 걸 보면 말이다.
그 후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평소보다 커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식탁을 가득 채웠고, 레비아는 시끄럽다며 지지 않고 소리쳤다.
꽤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식사 자리가 파해졌다.
“론.”
묵직한 목소리에 방으로 향하던 론이 고개를 돌렸다. 맏형이자 차기 가주인 드로고다.
“예, 형님.”
“기특하구나.”
“네?”
“재능이 없다고 투정 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멋진 날개를 감추고 있었어.”
“아, 네. 하하···.”
열 살 터울인 맏형과는 속 깊은 얘기는 많이 안 나눠서 유대감이 크다고는 생각 안 했는데, 저렇게 말하니 론은 괜히 콧등이 시큰거렸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론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드로고가 자신의 방으로 갔다.
“후우.”
한동안 미친 척 서재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다.
회귀를 받아들인 것이 첫 번째였고, 그다음은 앞으로의 행보였다. 열다섯,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여러모로 따져봐도 아카데미 말고는 없었다.
결국 혈통과 계급 다음은 학연이니까 말이다.
“한 달 정도인가?”
앞으로 한 달.
회귀 전 성취를 정리하고 앞으로 행보를 위해 다듬어야 할 시간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