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미국 타임스퀘어 메인 광장.
전 세계에서 웬만큼 인지도가 있는 가수에게도 허락되기 어려운 장소였다.
그만큼 그 무대에 선다는 건, 가수에게 그 자체만으로 유의미한 곳이었다.
메튜는 미국에서 이미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 정도 되는 인지도와 인기 절정의 스타가, 그곳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다라.
상상만해도 짜릿함이 밀려왔다.
데뷔 무대를 그곳으로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저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놀라운 소식이었다.
성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와. 그거 대박인데요. 날짜도 정해졌습니까? 우리 소울 씨 무대랑 겹치지만 않으면 꼭 가서 직관하고 싶은데.”
성현은 정말 가고 싶은지 관계자와 천소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진심이라, 천소울은 차갑게 말했다.
저 모습을 보니 조금 있으면 자기한테도 같이 미국에 가지고 할 판이었다.
“직관은 무슨. 그런 녀석 무대를 보러 뭐하러 미국까지 갑니까?”
자신의 의도와 핀트가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둘의 모습을 본 관계자는 뒷목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관계자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바람에 큰 소리를 치려고 했다.
“아니, 그래도...!”
“됐어, 됐어. 이쯤 해.”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이려던 관계자를 막아서는 한 사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또 한 명의 관계자였다.
지금까지 성현과 천소울을 설득하려고 했던 이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는 관계자는 한눈에 알아챘다.
저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좋아요. 음악 방송. 그럼 방송 3사 중 어디 음악 방송을 원하십니까.”
대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한국 지사 측도 체면이 있었다.
다른 나라 지사에 한국에서 우승자가 나올 거라고 떠들어댄 것이 있는데, 그 팀이 볼품없어 보이는 데뷔 무대를 가지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떤 곳이든 상관은 없습니다.”
“흐음. 그래요. 어떤 방송사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죠.”
성현의 말에 관계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일반적인 음악 방송하고는 다를 수 있다는 건 이해하시나요? 애초에 천소울 씨나 이성현 씨처럼 대형 신인인 경우, 데뷔 무대부터 철저히 기획을 하고 들어가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 타협은 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말리는 건 포기했지만, 공중파 음악 방송이란 틀 안에서 최대한 판을 키울 생각이었다.
성현 입장에서도 이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음악 방송을 두 사람이 선택한 이유.
전국민이 무료로 이 무대를 볼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무대가 공중파이기 때문이었으니까.
이 지점이 변치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협상할 생각이 있었다.
“물론이죠. 기획은 언제나 철저한 게 좋죠.”
“그럼 3사 음방 PD 연락 돌리고, 약속 잡겠습니다. 웬만하면 모두 만나보고 최고의 무대를 제공하는 쪽과 방송하도록 합시다.”
생각보다 협상테이블이 커질 모양이었다.
성현은 좋다고 답하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은 PD놀음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PD 개인의 판단과 역량이 주요하게 작용하기에 생긴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음악 방송 PD는 파워가 강하기로도 유명했다.
공중파 3사가 모두 모인다는 것은 자기들끼리도 의식해서 음악 방송 분야의 최고참들이 참석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라면, 천소울과 성현의 데뷔 기획에 조금이라도 더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일정 잡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계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극적인 타협이라 생각할만한 결과를 가지고 퇴장했다.
“최대 스케일의 음악 방송이라. 어떤 형태가 될까요.”
천소울의 표정도 방금 딜에 만족하는 모양인지 밝았다.
“우리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보다, 실력 있는 PD랑 함께 미리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네? 아는 피디라도 있습니까?”
천소울은 성현의 말에 놀라서 물었다.
“있죠. 아주 잘 아는 PD가.”
“잘 아는 PD는 또 어떻게 있는 겁니까. 가만 보면 성현 씨 인맥은 참.”
자신만만한 성현의 대답에 천소울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틀렸어요. 제가 그 PD를 잘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럼?”
“그 PD가 저를, 그리고 천소울 씨를 아주 잘 알고 계시죠.”
***
성현의 사무실에는 반가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김인호 AD를 초대한 것이다.
오늘은 이 자리에 천소울도 함께였다.
이번 본선 9라운드에서 앨범 작업하는 부분부터는 방송에 거의 안 담게 되었다.
그래서 김인호와는 별로 접점이 없었다.
가끔 진행사항을 일러주거나, 앨범에 수록하는 곡을 맛보기로 들려주는 정도였다.
“아이고 우리 성현 님. 이제 정말 귀하신 분이 되셨어.”
김인호은 괜히 서운한 마음에 툴툴거렸다.
그는 아직 더 넥스트 슈퍼스타에서 대놓고 잘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최근에 촬영이 없었을 뿐.
매일매일이 촬영이었던 과거에 비해 촬영이 많이 없었을 뿐이었다.
사실상 잘린 거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셨나. 그것도 여기 또 귀하신 천소울님과 함께.”
김인호는 괜히 깐죽거렸다.
BTG를 찍던 촬영 현장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 ‘더 넥스트 슈퍼스타’도 끝물이었다.
프리랜서로 그때그때 작업을 찾아다니던 김인호에게는 상당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성현은 그런 김인호가 익숙해서 가만히 웃고 있었다.
다만, 천소울은 아니었다.
대번에 인상을 그은 천소울이 김인호를 가리키며 성현에게 물었다.
“김인호 AD. 나도 얼굴은 안다만은, 굳이 이 AD에게 자문을 구할 필요가 있나?”
자문이란 소리에 김인호 AD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네, 그럼요. 실력 좋으신 분입니다.”
성현이 웃으며 대답하자, 김인호의 기분이 좋아졌다.
입술이 이미 씰룩거리는데, 이를 티 안 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성현은 이미 김인호를 어떻게 다루어야 잘 다뤘다고 소문이 날지 잘 아는 사람인만큼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역시나, 김인호 AD는 성현이 드리운 낚싯바늘을 덥썩 물고 말았다.
“자, 자문? 어떤 자문 말하는 겁니까?”
“이제 ‘더 넥스트 슈퍼스타’에는 더 이상 관심 안 두기로 한 겁니까?”
성현은 우선 은근하게 김인호가 섭섭해하고 있는 부분을 건드렸다.
“내가 안 뒀나, 그것들이 나까짓 거에 신경을 안 쓸 뿐이지.”
“이번 라운드가 뭔지는 아시죠?”
“뭐, 데뷔 무대 하는 거요? 듣자 하니 임하나 씨는 챔스 결승 무대에서 한다더만. 와.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돼. 그나저나, 안 그래도 성현 씨는 어디서 하나 궁금했는데, 정했습니까?”
아직 공중파 3사 어디라고 확정된 게 없어서 밖으로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인호가 모를 정도였으니까.
성현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는 충격요법이 오히려 먹힐 수도 있었으니까.
“한국 음악 방송.”
“뭐...?”
“아직 방송사는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음방에서 데뷔하려 합니다. 역시 데뷔는 음방 아닌가요?”
김인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환히 웃으며 말하는 성현을 가만히 보더니, 천소울을 바라봤다.
성현이 김인호를 잘 아는 만큼, 김인호도 성현을 잘 알았다.
저 상태인 성현에게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재빠르게 타깃을 재설정한 김인호는 답답한 마음에 말이 빨라지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이 사람 원래 처음부터 이상했어. 지금이라도 빨리 번복해요. 누구는 챔스 결승 데뷔인데, 누구는 음방 데뷔가 말이 돼?”
“음악 방송이 어때서요. 처음부터 제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천소울까지 이 모양이었다.
앞이 깜깜해진 김인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이 범인은 끝까지 천재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김인호는 속이 타서 앞에 놓인 커피를 원샷 해 버렸다.
“평범한 음악 방송은 아닐 겁니다. 이는 주최 측에서 요구한 거기도 하고요.”
성현의 말에 김인호는 제 돈도 아닌데 화딱지가 나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치며 외쳤다.
“그럼, 당연하지. 나 같아도 그렇게 해. 지금 여기까지 방송 이어오는 데 얼마를 썼는데.”
어후, 열 올라. 여기 얼음물 좀 가져다 달라는 김인호의 반응을 살피며 성현이 슬슬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김인호 AD님이라면 어떤 음악방송을 준비할 것 같습니까?”
김인호가 성현의 사무실 직원에게 얼음물을 받으며 성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건 또 뭔 소리래?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송을 먼저 생각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차피 그쪽에선 웬만해선 우리 요구를 받아줄 테니.”
음악 방송을 택한 건 국민 팬들을 위한 거였다.
방송사를 위한 것이 결단코 아니었다.
검소하고 평범하고 싶어서 음방 택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큰 스케일을 노릴 필요가 없다면, 이 기회에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소원 한번 이뤄보자는 거였지.
성현은 방송사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건 다 뜯어낼 생각이었다.
김인호는 생각에 잠겨 얼음을 와그작 씹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어떤 요구든, 웬만하면 거부하기 힘들지. 아니, 거부할 이유가 없지. 황금으로 된 호박이 넝쿨 채 굴러들어온다는데.”
이미 천소울과 이성현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다수의 팬을 보유한 스타 중의 스타였다.
데뷔 무대라지만, 그 의미가 남달랐다.
“흐음.”
김인호는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탁.
“이거다.”
뭔가 생각난 듯 테이블을 탁 치며 두 사람을 응시하는 김인호 AD.
성현과 천소울은 궁금함에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세웠다.
김인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성현과 천소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특집, 천소울 데뷔쇼.”
***
시간이 흘러 6월 첫째 주, 데뷔 무대의 날이 다가왔다.
공중파 K사의 신관 공개홀 앞은 천소울 데뷔 무대 가 열리는 공연 당일 이른 아침부터 붐볐다.
수많은 팬들이 공연 시작 전부터 몰려든 탓이었다.
팬들 사이에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한국인 팬들도 친구, 연인, 가족 단위 등 여러 팬층이 공연 시작 전부터 기대감에 조잘거리고 있었다.
“포토 카드 세트, 소울봉 주시고요. 성탄 엔터 포토북은 두 권 주세요.”
“왜 두 권이나 사?”
“한 권은 소장용이지.”
“아, 그래.”
소울의 열혈팬들은 성탄 엔터 측에서 차려놓은 천소울 굿즈샵에서 열심히 쇼핑 중이었다.
“사고 싶으신 굿즈 목록 미리 작성해서 스탭분들게 보여주세요!”
굿즈샵에 비치된 스탭은 몰려드는 팬들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애썼다.
아직 공연 시작까지는 세 시간 남짓이 남았다.
신관 공개홀은 1,500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오늘 공연의 관람료는 무료였다.
대신, 관객을 모집하기 위해 지금까지처럼 많은 이들이 방청객에 응모해서 1,500명이 뽑혔다.
“3부 오프닝 레프트! 점검 다시 해야 해요!”
공개홀의 백스테이지는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새벽부터 리허설은 이미 다 마무리된 상황, 마지막 생방송 준비로 스탭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성현과 천소울은 공중파 3사와 거듭된 회의 끝에 K사와 손을 잡고 무대를 기획하기로 했다.
이 결정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K사 공개홀에 전담 교향악단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3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음향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불과 몇 해 전 명절에서 나훈철의 대대적인 라이브 콘서트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는 점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영상 클립에도 이상 없지?”
“네, 마지막 확인 끝냈습니다.”
오늘 공연은 120분 러닝타임으로 기획되었다.
그중 60분은 천소울의 라이브 공연, 그리고 나머지 60분은 메이킹 필름이 방영될 예정이었다.
라이브 무대 이외의 메이킹 필름 부분은 김인호 PD가 기획, 연출을 맡아서 제작했다.
공연은 총 3부로 이뤄졌다.
1부부터 3부로 갈수록 천소울이 ‘더 넥스트 슈퍼스타’에서 보여주었던 무대를 순서대로 짧게나마 재현하기로 했다.
마지막 3부는 이번 데뷔 앨범의 10곡의 쇼케이스 느낌이었다.
그 사이사이 중간광고 대신 성현과 천소울의 앨범 제작에 대한 인터뷰 영상과 무대 준비 영상을 삽입하기로 했다.
“두 사람 놀라지 말라고. 내 메이킹필름이 라이브 무대보다 시청률 높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잘 나왔어요?”
“못 믿겠는데.”
천소울이 장난삼아 중얼거린 말에 김인호가 발끈해서 외쳤다.
두 사람은 지난 몇 달간 메이킹 필름을 촬영하는 동안 수도 없이 투닥거렸다.
“어허, 나만큼 두 사람 잘 아는 방송인이 없다니까?!”
똑똑.
성현과 천소울, 김인호 PD가 대기실에 모여 무대에 대한 긴장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