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5만 5천의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가늠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저만큼의 사람이 무대 위 자신만을 바라보는 느낌은 항상 낯설기만 했다.
그 무대 위에서 천소울은 어려울 것 하나 없다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무반주로 시작된 천소울의 첫 소절은 곧 웅장한 반주와 함께 전개됐다.
미친 듯한 환호가 쏟아져 나오는 어두운 객석을 응시하면서.
눈이 멀 듯한 환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는 양 옆으로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서 이곳저곳 무대를 누비는 천소울은 자유로워 보였다.
‘더 익숙해진 몸짓이야.’
성현은 천소울을 보면서 그가 부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저 엄청난 시선 속에서 흔들림 없이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가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천소울은 자신을 향해 소리 지르는 팬들에게 팬서비스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해낸 수많은 크고 작은 무대가 그에게 경험치를 축적해 준 것이다.
앨범 한 장 없는, 정식 데뷔도 안 했다고는 믿겨 지지 않는 무대였다.
심지어 여전히 오디션 진행 중인 24살의 어린 가수의 무대.
그 어려운 걸 천소울이 해냈다.
신나는 바운스를 유지하며 무대 사방에 자리한 팬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천소울이 동서남북 오가며 팬서비스를 마다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무대에 몰입시킨 천소울이 미리 약속된 자리에 섰다.
메인 무대 중앙, 정면 관객을 향해 무대 앞쪽에 자리한 것.
신나는 텐션이 천천히 수그러들며 잔잔한 반주에 가창력을 맘껏 뽐냈다.
“Oh, I'll tell you all about it when I want you again.”
같은 훅이 반복되는 마지막 구절에 다다랐다.
“When you want me again.”
“When you want me again!”
팬들은 천소울이 마이크를 내밀자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천소울이 한 소절을 부르는 동시에 반주가 꺼졌다.
조명도 천소울 비추는 밝은 조명 하나 빼고는 모두 꺼졌다.
천소울은 마지막에 검지를 펴 입술 위에 가져갔다.
“쉿.”
그 작은 동작은 섹시 그 자체였다.
관객들은 모두 숨을 들이쉬고 멈춰버렸다.
“When you want me again.”
그리고 천소울은 무반주 속에서 마지막 소절을 느린 템포로 불렀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장식되는 곡의 마지막 부분에 팬들은 눈물마저 보였다.
그리고 메인 무대의 천소울만을 비추던 조명마저 꺼졌다.
관객들은 갑작스러운 소등에 웅성거렸다.
그리고 무대 중앙을 비추는 또 하나의 크고 밝은 조명이 들어왔다.
당당당-
시작부터 귀를 사로잡는 현란한 피아노 도입부와 함께 무대 중앙 리프트가 올라갔다.
리프트를 타고 등장한 것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성현이었다.
와아아-
“이성현-!”
“이성현! 이성현!”
관객들의 환호에 힘입어 이성현의 간드러지는 재즈 솔로가 이어졌다.
짧은 재즈 피아노 연주가 끝날 즈음, 다시 천소울이 서 있던 곳의 조명이 켜졌다.
아까의 의상에 단정한 재킷을 걸친 천소울의 모습이 드러났다.
꺄아아아!
다시 보자던 그의 노랫말처럼 재등장한 천소울에 관객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피아노는 재즈 솔로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노래의 간주로 넘어갔다.
그리고, 성현의 피아노 소리에 천소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얹어졌다.
“지금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지만 기억해 우리가 함께 놀던 놀이터.”
둘이 함께하는 곡은 지난 오디션 때 했던, 신현식의 목소리가 담겼던 ‘놀이터’였다.
지금까지 둘이 함께한 곡 중 단연 대표곡으로 꼽히며, 아직까지 음원 차트 100위 안에 자리하고 있는 곡이었다.
감동의 파도 속에서 성현은 그때와 다른 또 무언가를 느꼈다.
‘오디션이 아닌 무대에서, 이렇게 많은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건 처음인가.’
오늘 CAMA는 지난 함께한 무대와는 달랐다.
오디션과는 0.1의 관련도 없는 무대였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제와도 같은 무대에서 이 노래를 함께 선다는 게 감격이었다.
최고의 스타만 모인다는 CAMA.
그것도 무려 3부 오프닝 무대에 오른 것이 새삼 황홀하게 느껴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벌써 그때가 그리워 우리 함께 했던 그날들.”
“나도 똑같아 빛나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
천소울이 마이크를 객석으로 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팬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특정 기억에 남는 소절을 따라부르는 게 아니었다.
“희미해져 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아득해져 가 다시 오지 않을 그 날.”
“돌아올 거야 우리 결국에 가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들이 부르고 있는 것은 원곡에서 신현식이 불렀던 파트였다.
천소울이 노래로 대변하는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의 외로운 고민에, 팬들이 답해주는 위로의 답가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성현은 피아노를 치던 손이 멎을 뻔했다.
건반을 두드리는 팔에서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 노래가 이렇게 모든 이들의 입을 통해 불리다니.’
신현식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단 하나의 생각이 성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이 노래를 만들고, 그 노래를 천소울이 불러서 다행이다.
하늘에서 이 무대를 지켜보는 신현식도 이 장면을 보면 분명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팬들의 입을 통해 불리는 것 이상의, 가수로서의 영광은 없었다.
‘천소울도 같은 생각일까.’
성현은 열창하고 있는 천소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워낙 커다란 무대라 성현과 천소울 사이에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천소울의 옆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위에 오른 것만 같은 부유감.
천소울과 한 무대 위에 올라선 성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 기분. 미국에서도 느낄 수 있기를.’
성현은 막연히 오디션의 끝을 생각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둔중해지는 것만 같았다.
성현은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음악에 집중했다.
***
CAMA가 끝난 다음 날 아침, 한국으로 돌아온 성현과 천소울은 쉴 시간이 없었다.
공항에서 천소울과 헤어진 뒤, 성현은 곧바로 강남에 위치한 성탄 엔터로 갔다.
“성현 씨! 설마 바로 오늘 출근이에요?”
건물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지현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어왔다.
성현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집도 안 들르고 성탄 엔터 사무실로 온 것이다.
“네. 회의가 있어서요. 며칠 쉬었는데, 더 늘어질 수는 없죠.”
“쉬다니 무슨…….”
성현의 말에 서지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생방송으로 천소울과 공연을 펼친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성현은 쉰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쉰 적이 없었다.
이틀 전, CAMA가 열리는 홍콩으로 가기 전까지 성현은 쉴 시간이 없었다.
CAMA에서 보여줄 천소울 무대를 위해 며칠이나 쪽잠으로 때운 성현이었다.
성현은 무실 내의 스튜디오에서 먹고 자며 준비했다.
스튜디오에 오갔던 멤버들 모두가 그가 제대로 못 쉬었다는 것을 알았다.
홍콩에 있는 성현의 모습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불 보듯 뻔했다.
거기서도 쉬었을 리가 없었다.
“어제 무대 끝나고 푹 쉬었습니다. 그 정도면 됐죠. 들어갑시다.”
아무래도 쉰다는 개념 자체가 성현과 일반인이 다른 모양이었다.
“어휴, 저는 모르겠네요.”
한국에서 같이 오디션을 준비했을 때보다 더욱 심각해진 것 같았다.
서지현과 성현은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무대는 진짜 잘 봤어요. 그 많은 관중을 아주 압도하던데요?”
서지현은 어차피 성현을 못 말릴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힘이 나게끔 응원과 칭찬이라도 보내주기로 했다.
어제 저녁 생방송으로 다 같이 본 무대의 칭찬을 건넸다.
한때 같이 무대를 섰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대 매너.
천소울의 모습을 확인한 멤버들은 한동안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 노래 진짜 몇 번을 들어도 탐나요. 내가 거기까지 올라갔어야 하는데.”
서지현은 놀이터를 떠올리고 있었다.
놀이터를 발표한 라운드 미션 무대 당시에도 임하나와 천소울 버전 모두 인상 깊었다.
서지현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쉬운 척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게요. 지현 씨가 불러도 충분히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성현이 서지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성현은 깊은 생각에 잠기기까지 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3층에 멈춰섰다.
문이 열리자 서지현이 먼저 발을 떼는데, 뒤에서 성현이 진지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지현 씨 그런 분위기 곡 좋아합니까?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는데, 이번 앨범 컨셉은 이미 나왔으니 어쩔 수 없고……. 멤버분들 싱글 하나씩 바로 작업 들어가는 거 어떻습니까. 지현 씨가 다른 곡 다시는 탐내지 않을 좋은 곡 만들어드릴 테니.”
괜한 농담 한번 던졌다가 성현이 일을 벌이려고 했다.
서지현은 실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 워커홀릭한테는 정말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그만! 한 번에 하나씩만 생각하기로 하자고요. 이미 지금도 충분히 좋은 곡 주시고 있고, 충분히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 서지현은 연습실에 도착했다.
“그럼 오늘도 파이팅!”
서지현이 먼저 연습실로 들어갔다.
성현도 그제야 그녀의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
성현은 대형 회의실로 직행했다.
나란히 앉은 성현과 심훈영 앞으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십 수명의 직원들이 앉아있었다.
“이 PD님, CAMA 무대 아주 죽이던데요?”
이번에도 역시 CAMA 무대 이야기로 말문이 트였다.
화제의 뜨거운 감자였으니 당연했다.
어제 시간이 되는 직원들과 멤버들이 이곳에서 다 같이 무대를 지켜봤다고 들었다.
“이 PD님 피아노 솔로 앨범도 한번 기획하는 거 어때요?”
“그러니까. 잘 치시는 거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좋던데.”
직원들은 진지했다.
앨범 기획팀은 눈을 빛내며 성현을 탐난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으니 말 다 했을 정도.
이건 아부가 아니었다.
성탄 뮤직은 아부를 건네기보다 한 마디라도 솔직한 평가를 건네는 분위기였다.
“됐습니다. 저보다 피아노 잘 치시는 분은 차고 넘쳐요.”
언제나 자기 자신한테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성현다운 대답이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모든 직원이 성현이 내리는 평과 판단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몇몇 직원들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다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어제 CAMA에 위즈 할리스도 왔던데, 직접 들으니까 어때요?”
“올해에는 우리 애들도 CAMA에서 상 받는 곡 하나 터지면 좋겠는데.”
대표인 심훈영과 그 다음으로 회사 지분 가장 많이 들고 있는 성현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직원들이 자유로운 의견을 낼 수 있는 것만 봐도 회사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자. 사담은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고, 그럼 이제 본론 들어갈까?”
그렇게 CAMA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심훈영의 신호로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심훈영은 성현을 바라보며 이제 회의를 리드하라고 눈짓했다.
성현이 앨범 제작을 총괄하는 만큼, 심훈영은 이번 회의에서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성현은 오늘 회의의 메인 안건을 바로 꺼냈다.
“그럼 이제 우리 소울이를 위한 소울이 담긴 앨범을 만들어볼까요.”
성현의 차가운 농담에 아무도 웃지 못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심훈영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겠다.
“세팅 마무리 좀 해줘.”
심훈영의 말에 그의 직속 부하 직원이 테이블 위에 장비를 올렸다.
고가의 오디오와, 그 오디오에 연결된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CAMA도 끝난 시점에 앨범 작업 착수를 위한 사전 준비도 다 끝난 상태였다.
오늘은 후보곡들을 다 같이 들어보는 자리였다.
“사막에서 가장 날카로운 바늘 한번 제대로 찾아봅시다.”
성현은 씨익 웃으며 오디오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