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이성현이 BTG의 곡을 완성했을 무렵.
비슷한 시각 미국 브루클린의 한 스튜디오.
“후우......”
녹음실에 있는 천소울은 목이 타는지 생수를 벌컥 들이켰다.
이미 바닥에는 빈 생수병이 몇 개나 보였다.
“그렇게 긴장돼?”
“아닙니다.”
모건의 말에 천소울은 애써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천소울의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해보는 장르라 낯설 순 있겠지만 분명 이거 네 노래야. 관객들에게 보컬리스트 천소울이 아니라 남자 천소울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고.”
모건은 그런 천소울을 보면서 킬킬거렸다.
그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 녹음실 부스에 연결된 마이크를 켜고 말하는 모건.
천소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물을 들이켠 천소울은 유리 벽 너머 모건과 눈을 맞췄다.
“준비됐습니다. 가시죠.”
“그래. 여기가 클럽이라 생각하고 제대로 즐겨 보자고.”
모건이 씩 웃으며 노래를 틀었다.
전주가 시작되고 헤드셋을 착용한 천소울은 눈을 감았다.
천소울은 곧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 클럽에서 나올 것 같은 빠른 비트의 끈적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이는 평소 천소울이 부르던 스타일과 거리가 먼 노래였다.
감미로운 미성과 거친 탁성이 오묘하게 섞인 목소리로 담백하고 담담한 진심을 전달하는 노래가 주무기였던 천소울.
화려하지 않은 발라드를 화려한 음색으로 소화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모건과 만나고서 뜻밖의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모건은 천소울과 음악을 들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평소 보여주던 것과 다른 천소울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잘해보자.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없었다.
잘 해내야만 했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새로운 것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는 천소울의 감상들, 특히 천소울이 해외 아티스트 공연을 관람했을 때 느낀 것들이 테마가 되었다.
가수의 공연 자체도 대단했다.
그러나 천소울이 주목한 것은 객석에 있었다.
공연을 즐기는 관객들의 열정에 감탄했다는 말에 모건은 곧장 그림이 그렸다.
클럽 속. 섹시한 미소를 흘리며 여자들 사이에서 춤을 추는 남자 천소울의 모습.
열정 넘치는 관객들이라 함은 자신들의 흥을 주체 못 하는 클러버들이 딱이었으니까.
‘저 녀석 어딘가 금욕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 모습이 또 묘하게 궁금하단 말이지.’
여기에는 모건의 흥미도 있었지만, 치밀한 계산속도 함께였다.
모건은 프로듀서로서, 천소울의 차갑지만 지킬 건 지키는 바른 남자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대중들은 신선함을 느낄 터였다.
오디션이라고는 하지만 이 대장정에서 천소울이 가지고 있는 팬덤은 어마어마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모건은 그때부터 관중들의 환호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모건은 그의 무대를 클럽으로 만들어버릴 생각의 지금의 곡을 만들었다.
‘일단 밀어붙이긴 했는데 두고 봐야지. 얼마나 잘 소화하나.’
모건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천소울을 지켜봤다.
가이드 녹음을 들려주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모건의 앞에서 천소울이 이 노래를 소화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집중하던 모건의 미소에 금이 갔다.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긴장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눈빛부터가 바뀌어있었기 때문.
‘이것 봐라?’
모건 스스로도 이번 곡을 만들며 천소울이 이를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모건은 노파심에 대비책도 생각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쉽게 내주지는 않을 생각이었지만.
만약 그저 그렇게 노래를 부른다면 그것이 천소울의 한계겠거니 생각하기로 했었다.
한계는 무슨.
어색한 옷이라며 긴장했던 것이 불과 바로 전 상황이 무색할 정도였다.
저런 식으로 순식간에 눈빛을 바꾸며 감정을 잡다니.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끼는 타고났다니까. 어쭈? 웃기까지?’
모건은 천소울이 끼를 부리기 시작하자 놀라서 손을 내렸다.
거기에 섹시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하자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저거 괜히 엄살 피운 거 아니야?’
천소울을 조금 곤란하게 만들 겸 시작한 프로젝트에서 당한 것은 아무래도 모건인 듯했다.
***
모건이 천소울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던 바로 그 시각, 뉴욕.
임하나는 이미 최종 녹음을 끝낸 후였다.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완성된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임하나의 상태가 이상했다.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
이를 본 제이지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은근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제이지는 부끄러워하는 임하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 작업할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임하나는 이렇게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작업이 끝난 곡을 들어보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숭인 것 같았지만.
임하나가 처음 뉴욕에 와서 제이지와 작업을 하던 날.
임하나는 마침내 비욘세를 만났다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비욘세를 보고 방방 뛰면서 그녀의 사인을 얻고,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을 데굴데굴 돌려가며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했다.
“간지러워. 그만해.”
“연습 그만하고 집으로 갈까?”
바로 임하나 앞에 있는 제이지와 비욘세의 스킨쉽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태도였다.
비욘세는 제이지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입을 맞췄다.
그것도 버젓이 임하나 앞에 앉아서.
임하나는 이게 신종 고문인 건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둘이 미국인인 데다가 힙합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스킨쉽의 순위가 임하나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나름 스스로를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던 임하나를 순식간에 유교걸로 만들었다.
임하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했다.
이를 본 제이지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설마 부끄러워서 그래?”
“네? 아, 아니요.”
임하나는 입으로 아니라고 열심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아주 솔직했다.
여전히 제이지의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애꿎은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키스 한 번도 안 해본 여중생 같잖아.”
제이지가 하나를 놀리듯 말했다.
“.......”
임하나는 그 말에 대답이 없었다.
비욘세는 임하나의 반응에 깜짝 놀라 제이지의 무릎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그녀는 임하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심각하게 물었다.
“설마 자기 키스 안 해봤어?”
“......”
임하나는 민망함에 손으로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진짜 안 해봤나 본데?”
제이지는 임하나의 반응이 흥미로운지 그 또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임하나 옆에 앉았다.
어느새 제이지와 비욘세 사이에 끼인 임하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밀착 취재를 하듯이 임하나를 압박했다.
“사랑은? 사랑은 해봤어?”
“......”
그래도 묵묵부답인 임하나를 두고 부부는 놀랍다는 듯이 시선을 교환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니.
“그럼 연애는?”
“키스도 안 해봤는데 연애라고 해봤겠어?”
비욘세의 말에 임하나는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도 당황스럽지만, 저 말은 더욱더 임하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키스는 연애하고 하는 거 아닌가? 외국은 순서가 반대인 건가?’
임하나는 순간 엉뚱한 생각에 골몰했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와 키스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런 임하나 앞에 떠오른 한 남자의 모습은…….
짝-
“미쳤어.”
임하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한국어로 말하며 넋이 나간 임하나의 모습.
제이지와 비욘세는 갑자기 임하나가 자신의 뺨을 때리자 수상하게 쳐다봤다.
그러던 비욘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키스하는 상상했지?”
“네에?! 아니거든요!”
임하나는 비욘세고 뭐고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큰 소리로 소리치며 아니라고 방방 뛰는 그녀의 모습.
평소 성격이라면 임하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뒤지지 않는 비욘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얘가 지금 누굴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할까.”
그녀는 임하나의 모습을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
비욘세는 임하나의 흔들리는 눈빛과 지나치게 흥분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비욘세는 조금 더 가까이 임하나 곁에 찰싹 붙어서 앉더니 은근하게 물었다.
“누구야, 그 남자?”
“누, 누구냐뇨. 남자 없어요, 저.”
임하나는 크게 당황해서 있는 힘껏 부정했다.
그런데 나오는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손사래 치는 손끝도 달달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비욘세는 더 깊게 미소지었다.
“에이, 있으면서. 좋아하는 사람.”
“진짜 없어요!”
임하나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러면서 얼굴빛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반응이 저런 거지?
비욘세는 그런 임하나가 귀엽다는 듯 웃음 지었다.
“없다잖아. 그만 놀려.”
제이지가 자신의 파트너라고 임하나를 구제해주려 했다.
그러자 비욘세가 척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제이지를 만류했다.
“여자 마음은 여자가 잘 알아. 가만있어 봐.”
비욘세는 자신감 있게 말하며 임하나를 일으켰다.
“자기, 우리 찐한 대화를 좀 나눠볼까?”
“대화요? 가, 갑자기 무슨 대화요? 진짜 없다니까요?”
임하나는 영문도 모른 채 비욘세에게 끌려갔다.
도와달라는 듯이 뒤돌아 제이지를 쳐다보지만, 제이지는 아내에게는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쩌면, 임하나가 그토록 만나기를 바랐던 비욘세와의 만남은 실수였을 지도 몰랐다.
그 뒤로 임하나와 비욘세는 비밀의 방에서 몇 시간이나 얘기하고 나왔다.
너덜너덜한 임하나와 함께 나온 비욘세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서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후 탄생한 곡이 바로 지금의 곡이었다.
두 사람에게 추궁을 받아 가며 컨셉과 테마를 잡고, 휘몰아치듯이 완성한 곡.
“마음에 들어?”
제이지는 그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임하나에게 물었다.
저러면서 녹음은 얼마나 똑 부러지게 잘하던지.
역시 아티스트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임하나는 주저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스러운 건 수치스러운 거고.
곡이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임하나씨가 마음에 둔 복 받은 남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번 곡만큼은 임하나씨가 그 남자를 위해 부르는 세레나데라고 생각해.”
“세레나데......”
임하나는 세레나데라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
본선 8라운드가 시작되고 빠르게 한 달이 지났다.
미국의 주최 측 본사 건물 안에 마련된 대회의실.
오늘 이곳에는 리키 헨더슨을 포함한 여러 ‘더 넥스트 슈퍼스타’ 주요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어두운 회의실 안 커다란 스크린 앞에 소수의 인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있었다.
“오늘 참석해주신 각국의 프로듀서 여러분들 모두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을 텐데 감사합니다.”
리키는 회의실에 있는 10개국 대표 프로듀서들 한 명 한 명과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본선 8라운드 중간 평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