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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31화 (231/273)

231화

“정말 여기서 내려줘도 돼요? 집 앞까지 가도 상관없는데.”

“괜찮아요. 집 가기 전에 들를 곳도 있고.”

성현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반복했던 괜찮다는 말을 또 꺼냈다.

그러자 RN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차창을 올렸다.

“알았어요. 더 물어보면 강요하는 거 같으니까 그만 물을게. 그럼 저녁에 봐요.”

성현이 RN의 차에서 내리자 오랜만에 만나는 한남동의 풍경이 보였다.

‘한 달만인가.’

성현은 한국에 돌아온 사실이 좋으면서도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BTG에게 받은 제안서, 호텔으로 찾아온 RN, 전용기 체험까지.

계획과는 달리 너무 순식간에 한국에 도착한 탓에 그럴지도 몰랐다.

성현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보는 동네를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스케줄을 체크했다.

‘아버지랑 점심 먼저 먹고 BTG 만나기 전에 회사에 잠깐 들러서 프로젝트 체크하고......’

한국에 온 이유 1순위는 BTG와의 파트너 문제였다.

그렇기에 BTG와의 스케줄이 가장 최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했다.

한국에 온 만큼 회사 프로젝트 역시 한 번 직접 들여다 볼 생각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주고 싶은 게 성현의 마음이었다.

그 바람에 성현은 당장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앞으로 중간 점검까지 남은 기간이 약 한 달.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네.’

성현은 한국에서의 하드한 스케줄을 정리해가며 동네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게트 두 개 주세요.”

하지만 제일 우선은 이거부터였다.

***

성현이 집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정원 이주성과 일하는 아주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성현은 설마 정원에 나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라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성현아!”

아주머니는 이주성보다 더 주책을 떨며 성현에게 달려갔다.

성현은 오랜만에 만나는 아주머니와 포옹을 하며 이주성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잘 다녀왔냐.”

“네. 왜 나와 계세요. 안에 계시지.”

“바람도 쐴 겸 나와 있었는데 마침 네가 왔지 뭐냐.”

성현의 물음에 이주성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그렇게 말했다.

크흠, 헛기침과 함께 이주성이 뒷짐을 진 채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성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아주머니의 눈에 비죽이 튀어나온 바게트가 들어왔다.

“어르신 주려고 빵 사 온 거야? 피곤한데 그냥 오지.”

“제가 먹고 싶어서 사 온 거예요. 아주머니도 여기 빵 좋아하시고.”

“하여간 부자가 서로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아주머니는 성현에게서 빵 봉투를 가져갔다.

둘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밥 먹게 손 씻고 와라.”

먼저 집에 들어와 있던 이주성이 먼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성현은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에 도착하니 갑자기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자켓을 벗으려던 생각과는 다르게 성현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피곤하긴 하네.’

장시간의 비행 동안 눈도 부치지 못한 데다가, 오늘만 해도 스케줄이 빡빡해 쉴 틈이 없었다.

성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정말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방금 전 언뜻 눈에 들어온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식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안 먹고 잔다고 하면 엄청 실망하시겠지.’

성현은 침대에서 나가 곧장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1층 거실로 내려갔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분명 이주성이 먹고 싶은 반찬 몇 가지만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마주한 식탁은 성인 두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많은 가짓수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온 김에 다 먹고 가야지. 다시 또 미국 가봐야 한다며.”

“밥 부족하면 말하고. 반찬도.”

이주성에 이어 아주머니는 성현에게 고봉밥을 주며 말했다.

아무리 성인 남자라도 먹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성현은 군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두 눈 가득 기대를 담고 있는 아주머니의 성의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성현은 한참 동안 열심히 밥을 먹는데, 밥이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이주성이 좀처럼 밥을 먹지 않고 성현을 살폈다.

“많이 먹어.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야.”

이주성이 성현의 숟가락 위로 반찬들을 올려주며 성현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얼굴이 그새 야윈 것 같기도 하고. 오디션이 많이 힘들어?”

힘들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할 엄한 얼굴이었다.

성현은 슥 이주성의 손길을 피하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힘든 거 없어요. 그냥 시차 때문에 잠을 좀 설쳤더니 그런가 봐요.”

미국에서 계속 기름진 음식만 먹어서 체중이 늘면 늘었지 절대 줄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 소리를 했다가는 얼큰한 걸 더 먹으라는 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오늘은 집에 계속 있을 거지? 밥 먹고 한숨 자면서 푹 쉬어.”

이주성의 말에 성현이 절레 고개를 저었다.

“스케줄 때문에 밥만 먹고 바로 나가 봐야 해요.”

“오자마자 무슨 일이야. 일도 좋지만, 건강은 챙겨가면서 해야지.”

스케줄이 있다는 성현의 말에 이주성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회사 차렸으면 책임은 져야죠.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기획사 운영하는 게 쉬운 거 아닌 거. 저 때문에 대표님만 혼자 고생하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쉬어요.”

성현의 말에 이주성은 뭐라 반박하려다 이만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이주성은 결국 성현에게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주성 또한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았다.

성현이 느끼고 있을 책임감과 심훈영에 대한 미안함.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에 성현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답답하기에 나온 한숨이었다.

“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면서요. 밥 많이 먹어서 힘 나요, 지금.”

성현은 빈 밥그릇을 보여주며 웃었다.

아버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이주성의 굳은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이주성은 성현의 미소를 보고도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무리다 싶으면 그만해도 돼. 말했지. 언제든 집에 오면 된다고.”

“힘든데 즐거워요. 벌써 멈추고 싶지 않아요.”

즐겁다니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묵묵히 응원해주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다는 걸 요즘 느끼고 있었다.

이주성은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쌓인 걱정을 한꺼번에 한다는 심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선택이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항상 건강 잘 챙기고.”

“네. 아주머니! 저 밥 한 공기만 더 주세요.”

성현의 외침에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또 고봉으로 밥을 쌓았다.

***

저녁 식사를 마친 성현이 곧장 향한 곳은 BTG의 사무실이 아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소속사 성탄 뮤직이었다.

“안 데려다줘도 된다니까.”

두 부자는 차에서 내려 나란히 기획사 건물로 향하는 와중에도 투닥거렸다.

성현이 소속사에 간다고 하자마자 이주성이 자신 역시 기획사에 볼일이 있다고 따라나선 것이다.

“나도 내 회사에 볼일 보러 온 거야. 너 데려다주러 온 거 아니라니까?”

이주성이 고급 세단의 문을 잠그며 말했다.

둘은 함께 B&V 건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 이주성과 성현을 알아보고는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이제는 이 건물 기획사 대표인 이주성보다 아들인 성현을 보고 더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BTG의 RN과 함께 입국했다고 전국을 들썩이게 한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주성과 성현은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이주성은 2층을, 성현은 3층을 눌렀다.

“집 갈 때 전화해. 시간 맞으면 같이 가게.”

“저녁에 또 약속 있어요.”

성현의 말에 설핏 인상을 구긴 이주성이 말했다.

“그럼 약속 끝나고 전화해. 집에 같이 들어가게.”

이주성은 그 말을 끝으로 성현의 대답은 듣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버렸다.

성현은 그런 이주성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말은 무뚝뚝하게 해도 자신 때문에 회사에 나온 걸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솔직하지 못하다고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성현은 만족했다.

평생 아버지와는 대화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성현이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매일매일이 꿈만 같은 나날이었다.

성현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금세 3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현이 바로 사무실로 가려고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연습실 한 곳에 불이 켜진 것이 보였다.

“하나, 둘, 박자 맞춰서! 릴리, 감정 살리고!”

성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연습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서지현, 주선아, 릴리, 문희진이 전문 댄스 트레이너와 춤 트레이닝이 한창이었다.

후렴 부분인지 네 사람이 정확한 각도를 맞춰 군무를 추고 있는 중이었다.

성현은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말없이 네 사람의 연습을 지켜봤다.

‘빡세게 연습한다더니 진짜였구나.’

심훈영이 항상 네 사람이 잠도 안 자면서 데뷔 준비를 한다고 전화할때마다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막연히 그냥 말이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심훈영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주선아 말고는 춤에 큰 장기가 없던 나머지 세 명의 멤버.

서지현, 릴리, 문희진이 어느새 주선아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춤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어떤 포인트를 살려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추고 있어.’

성현은 한동안 네 사람의 춤을 정신없이 감상했다.

네 명이서 한 팀을 이룬 만큼 이제는 조화가 중요했다.

하지만 그저 군무를 잘 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들은 그룹인 동시에 한 명 한 명의 매력을 살려야 하는 아티스트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니까.

이를 살리기 위해서 각 멤버 별 정해진 파트에 따라 포인트를 주어야 하는 안무가 다 달랐다.

성현이 보기에 포인트를 주는 것부터 해서 넷의 호흡까지 완벽에 가까웠다.

아직 데뷔 날짜가 정확히 잡히지도 않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호흡이었다.

“10분만 쉬었다 할게. 물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요.”

노래 한 곡을 끝낸 후 트레이너가 잠시 쉬는 시간을 주었다.

서지현이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다가 연습실 밖에 서 있던 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푸훕.”

서지현은 성현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물을 뿜었다.

이를 본 다른 멤버들 무슨 일인가 싶어 서지현이 보는 쪽을 쳐다봤다.

그들 역시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성현은 이런 식으로 멤버들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네 명 모두 벙찐 표정으로 자신만 보고 있자 조금 민망해졌다.

성현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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