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성현과 천소울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까지 한숨을 쉬는 건가 싶어서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뉴욕에서 사고라도 났습니까?”
천소울조차 임하나가 푹푹 한숨만 쉬어대자 답답했던 모양.
걱정이 되어 묻는 말에도 침울해하던 임하나가 마침내 입을 뗐다.
“비욘세 님을… 못 만났어요…….”
임하나의 말에 성현과 천소울 동시에 허무한 표정이 되었다.
“.......”
“지금 장난합니까?”
“이게 장난으로 보여요? 천소울씨는 지금 제가 얼마나 슬픈지 알기나 해요?”
임하나가 제이지를 만나러 가면서 제이지보다 더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비욘세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바.
임하나의 롤모델!
그녀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잔뜩 기대를 안고 갔다.
그랬는데, 결국 비욘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비욘세 딸도 만났는데 정작 비욘세는 못 만났다구요!”
비명처럼 외치는 임하나의 말에 성현은 알겠다는 듯이 임하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두 달 가까이 작업할 시간 있으니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성현은 상심에 빠진 임하나를 애써 위로하려 했다.
옆에서 천소울은 임하나를 보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성현은 재빠르게 임하나의 주의를 돌렸다.
“제이지랑 미팅은 어땠어요?”
다행히 이 작전은 임하나에게 잘 통했다.
“비욘세 못 만난 거 빼곤 정말 다 완벽했어요. 제이지 아저씨도 완전 친절하고 뉴욕 지내는 동안 쓰라고 자기네 아파트도 빌려주시고.”
임하나는 그 뒤로도 제이지가 얼마나 친절하고, 스튜디오는 얼마나 좋은지.
또 그가 사준 저녁은 얼마나 훌륭했고, 제이지와 비욘세의 딸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 말만 들어도 제이지가 얼마나 임하나를 아끼고 있는지 눈에 보여서 성현은 안심했다.
“다행이네요. 두 분 다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서.”
“어? 천소울씨도 프로듀서 정했어요?”
“네. 오늘 정식으로 계약하고 왔습니다.”
그 말에 임하나의 얼굴이 밝게 피었다가 급격하게 구겨졌다.
“설마 모건? 진짜 모건이랑 했어요?”
“네. 왜요?”
임하나의 경악에 찬 말에도 천소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들은 임하나가 벼락처럼 외쳤다.
“그 나쁜 자식이랑 작업은 왜 해요!”
“나쁜 자식이라뇨. 그분이 얼마나 대단한 프로듀선데.”
어이가 없었다.
눈물과 함께 털어놓았던 과거 이야기는 다 어디에 갔는지.
임하나는 분하다는 듯이 허공에다 한 번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하. 이젠 편까지 들고. 천소울씨 그 사람 때문에 고생하던 건 다 잊었어요?”
“전 그렇게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 아닙니다. 앞으로가 중요한 거지.”
임하나는 천소울이 모건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달라지자 황당하게 쳐다봤다.
천소울은 그러거나 말거나 임하나의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리를 꼰 채 커피를 여유롭게 들이켜는 천소울.
그 모습을 보고 임하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뭐람.
임하나는 그 모습을 가리키며 성현에게 눈으로 물었다.
‘저 사람 왜 저래요?’
성현은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자신 역시 천소울의 저런 태도가 낯설어서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으니 말이다.
“천소울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모건을 선택한 거겠죠. 저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봐요. 모건에게 인정받는 것만으로 천소울씨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천소울에 이어 성현까지 모건에 대해 좋게 평가하자 임하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럼에도 분함이 가시지 않는지 둘의 눈치를 보며 궁시렁거렸다.
“그래도...... 천소울씨. 혹시라도 모건이 또 괴롭히면 저한테 말해요.”
“말하면 어쩌게요?”
“가서 깽판이라도 치게요. 왜요.”
천소울은 자신을 찌릿 째려보는 임하나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성현은 둘의 티격대는 모습을 재밌게 지켜 보고 있는데, 성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BTG: 한국엔 언제쯤 오실 예정이죠? 최대한 빨리 미팅을 하고 싶어서요.
문자를 확인한 성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러고서는 임하나와 천소울, 두 사람을 봤다.
“다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요? LA에서 작업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네. 아무래도 제이지 회사에서 작업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내일 뉴욕으로 이동하기로 했어요.”
“저도 내일 브루클린으로 갈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흩어지게 될 듯했다.
자신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말이다.
성현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엄청 바빠지겠네요.”
“성현씨도 빨리 파트너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좋은 가수들한테 받은 제안서도 많은데 더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어요.”
임하나는 아직까지 파트너를 선택하지 않은 성현이 걱정됐다.
성현이 왜 파트너를 쉽사리 선택하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유라는 말에 현혹돼서 흘러가는 준비시간을 그대로 버리게 돼서는 안 되니까.
“어쨌든 빨리 선택할수록 그만큼 준비 기간도 늘어나는 거잖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파트너를 선택한 만큼 곡의 완성도도 중간 평가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테니까요.”
임하나의 말에 천소울도 맞는 말이라며 말을 보탰다.
어쨌든 곡 작업이란 것이 순탄하게 흘러간다고 보장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었다.
준비를 하면서 사고가 생기거나 차질이 생길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준비 기간은 어느 정도 여유롭게 잡는 것이 좋았다.
“LA에 성현씨 혼자 남는 것도 마음에 걸려요.”
그리고 두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성현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이 정도로 자신을 생각해줄 줄이야.
“제 걱정 안 해도 돼요. 저도 LA에 혼자 남아있을 생각은 없거든요.”
“그렇네요. 굳이 LA에 머물러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럼 이렇게 된 거 저랑 같이 브루클린으로 갑시다. 모건 PD랑 얘기해서 성현 씨는 어떤 가수랑 계약할지 다 같이 고민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천소울은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말했다.
모건이 성현의 이야기도 언급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의 시크릿 스테이지 때, 유일하게 모건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성현이었으니까.
천소울이 성장한 만큼, 성현은 어느 정도로 성장했을지 모건의 관심이 지대했다.
“아쉽지만 브루클린은 다음 기회에 갈게요. 이미 비행기 표를 예매해둬서.”
그 말에 천소울과 임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파트너 선택도 하지 않은 성현이 LA 근처도 아니고 비행기까지 타고 갈 곳이 있다고?
“비행기까지 타고 어딜 가게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천소울이 물었다.
“한국이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와 천소울은 크게 놀라서 눈이 커졌다.
오디션 도중에 미국 내도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성현이 오디션을 포기할 위인은 아니었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한국에 무슨 급한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회사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두 사람은 걱정스럽게 외치듯 물었다.
성현의 갑작스러운 한국행.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현이 직접 한국에 간다는 건, 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두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성현이 보여준 제안서에는 죄다 미국에서 만날 수 있는 슈퍼스타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걱정하자 성현이 얼른 그들을 진정시켰다.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만나보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어서 가는 겁니다.”
다급한 성현의 말에 임하나와 천소울이 경악했다.
“물론 가는 김에 아버지도 만나고 회사 프로젝트 진행 상황도 직접 체크 할 거긴 하지만.”
그가 작게 덧붙이는 말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
“…….”
성현의 말에 임하나와 천소울이 궁금한 건 단 하나였다.
성현이 한국까지 가서 만날 아티스트가 과연 누구인가.
둘은 말이 없다가 거의 동시에 성현에게 물었다.
“만나보고 싶은 아티스트가 누군데요?”
“그 아티스트가 누굽니까?”
“BTG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와 천소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갑자기 BTG라니.
자신들이 삼겹살 집에서 함께 인터뷰를 보던 그 BTG와 동일한 그룹인가 싶어서였다.
혼란에 가득 차 있던 임하나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미에서 상 받은 BTG를 만나러 간다는 거예요?”
“네. 그쪽에서 제안서를 보내왔어요. 아직 수락한 건 아니고 만나서 얘기를 더 나눠보기로 했어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BTG라면 현재 가장 핫한 아티스트들 중 하나.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제안서를 받자마자 수락할 아티스트였다.
그런데 성현은 그들과 더 얘기를 나눠보겠다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이 순간을 누리겠다는 성현의 말도 오버랩되었다.
천소울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자신감은 제가 아니라 이성현씨가 더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은데요?”
“저도 딱히 겸손이 미덕이라 보진 않아서요.”
성현은 천소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거기다 다리를 꼬며 여유롭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
“지각을 생활화시킨 사람은 처음 봅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은 시간.
천소울이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며 조금 퉁명스럽게 성현에게 말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곧 나온다 했으니 나오겠죠.”
“비행기 시간을 당사자가 아니라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게 말이 됩니까.”
천소울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그 순간, 저 멀리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임하나가 달려왔다.
“성현씨! 소울씨!”
오늘은 임하나가 뉴욕으로 떠나는 날.
천소울과 성현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로비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알람 맞춘다는 걸 깜빡해서.”
“알겠으니까 빨리 갑시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습니다.”
천소울은 임하나의 무거운 캐리어를 대신 끌고 앞장서서 걸었다.
임하나는 비행기가 늦은 시간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런 천소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하나씨 뭐해요? 안 가고?”
의아한 성현이 물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임하나를 돌아보며 말하자, 임하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발걸음을 뗐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하도 단호하게 말하는 통에 성현은 별다른 말 없이 임하나와 함께 입구로 향했다.
호텔 앞은 북적이고 있었다.
한국 측 스탭들까지 함께 이동해야 했기에 주최측에선 커다란 벤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천소울은 주최측에서 준비해 준 차량 트렁크에 임하나의 캐리어를 넣고, 트렁크 문을 닫았다.
임하나와 천소울, 성현이 정말 헤어져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다녀올게요!”
임하나는 말없이 서 있는 두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세 사람은 동료면서 동시에 경쟁자인 것이다.
다녀온다는 임하나의 말에, 성현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