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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26화 (226/273)

226화

“모건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술술 풀렸습니다. 막상 만나 보니 그렇게 무서운 사람도 아니더군요.”

천소울은 다리를 꼬며 여유롭게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성현은 어딘가 달라진 천소울의 분위기에 조금 적응이 안 됐다.

낯선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건한테 배워온 건가. 저 다리 꼬는 것부터 해서.’

모건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자기에 취한 멋이 천소울에게 느껴졌다.

저 모습이 뭔가를 털어내고 후련해진 거라면 상관없기는 한데......

성현은 어딘지 찜찜한 기분에 천소울을 살폈다.

천소울은 성현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했다.

“이번 본선 8라운드 미션에 대해 말해주니 이미 그도 룰에 대한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더군요.”

그럴 수밖에.

‘더 넥스트 슈퍼스타’ 본선 8라운드 미션 공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 엘런쇼에서 발표되었다.

그다음 날, 모든 신문사가 이 소식을 전해 전미로 퍼뜨렸다.

모건이 영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이야기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그러시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더 넥스트 슈퍼스타’라......”

천소울은 룰을 알고 있다는 모건의 말에 눈을 빛냈다.

본선 8라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일이 더 쉽게 풀릴 듯했다.

모건은 다리를 꼬면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룰은 이미 알고 있어. 비록 내가 스폰했던 아티스트가 떨어지긴 했어도 몇몇 관심 가는 참가자들이 있는 만큼 챙겨 보고 있거든.”

모건은 자신도 한때 그 오디션의 후원자였다고 으스댔다.

“잠깐, 설마 자랑하려고 온 건가? 최종 18인까지 살아남았다고?”

“저 그렇게 유치한 놈 아닙니다.”

“아니면 말고. 어쨌든 살아남은 건 축하하네.”

모건은 비록 자신이 독설을 하긴 했어도 천소울의 영상 역시 찾아보고 있었다.

근래에 방송이나 너뷰트를 통해 본 천소울은 확실히 그 당시보다 성장해 있었다.

누가 봐도 18인 안에 들 자격이 충분했다.

“지금의 저였다면 당신한테 그때와 다른 평가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긴장되는 순간.

천소울의 물음에도 모건은 말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시가를 깊게 빨며 생각에 잠기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때가 겨울이었지? 내가 한국 갔을 때 말이야. 무척 추웠던 걸로 기억나는데.”

벌써 반년이 가까운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모건은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 긴장으로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천소울을 넘겨 보았다.

“초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갑자기 날씨는 왜요?”

“지금의 천소울을 그때 만났다면, 아마 날씨만 더 좋았어도 당장 미국으로 데려갔을 테니까. 난 추운 건 딱 질색이거든.”

모건의 말에 천소울은 환히 웃었다.

드디어 그에게서 받아 보는 첫 칭찬이었다.

“그래서, 좋았어요?”

성현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천소울이 당시를 추억하며 본적 없는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조금 질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던 순간입니다.”

“모건의 칭찬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긴 하네요. 그래서 그 잘난 모건 프로듀서한테 작업하자는 제안은 대체 언제 하는 거예요?”

성현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기다려보세요. 곧 하니까.”

모건에게서 칭찬받은 것은 좋았다.

좋았지만, 고작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LA에서 브루클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지미 타일러, 데니 윌슨, 게리 밴젠드, 브라이언 자딘, 타일러 그리운드, 토미 앤더슨.”

천소울은 갑자기 여러 개의 이름을 나열했다.

모건은 별다른 설명 없이 천소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같은 업계 사람으로서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들 모두 미국에서 유명한 프로듀서들이었다.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될 만큼.

뭐, 그래봤자 자신에 비하자면 털끝만치도 따라올 수 없는 인간들이었지만.

“자딘 그놈은 그래미에서 상 타고는 연락이 없어. 잘 지낸대?”

모건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천소울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자랑하려고 말한 거 아니야? 제안서 들어왔다고?”

어느 정도 찔리는 말이기에 천소울은 멈칫하다가 애써 말을 이었다.

“......자랑은 아니고 그냥 이런 사람들한테 제안서가 왔다 정도를 말하려던 겁니다.”

그게 그거지 뭐.

투덜거리던 모건이 날카로운 눈으로 천소울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아까 말했지. 난 빙 둘러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천소울 당신은 이미 충분히 돌려 말했고, 나도 충분히 참아준 것 같으니 이제부턴 정말 서로 솔직해지자고.”

시가 한 모금.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모건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한테 까이고 나서 이만큼 성공했다 자랑할 것도 아니면서, 난 왜 찾아온 거지? 아까 말한 제안이란 거랑 관련된 건가?”

모건이 천소울과의 대화가 즐겁긴 했어도 여기까지였다.

그는 시간이 그렇게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쳇바퀴 돌 듯이 끝날 것 같지 않은 대화를 언제까지고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저한테 제안서 넣어주세요. 같이 작업하고 싶습니다.”

천소울의 말에 모건은 잠시 벙찌더니 재밌다는 듯 웃었다.

“제안서를 넣어달라고? 이거 재밌는 놈이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모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온몸을 들썩이며 웃은 탓에 시가의 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싫습니까?”

“싫긴. 아까 내가 말했지. 관심 가는 참가자들이 있어 무대 종종 챙겨 본다고. 당신도 그중 하나야. 난 당신 무대 다 챙겨봤어. 그것도 일부러 시간 내서.”

그중 하나.

천소울은 그 말에 다 쓴 줄 알았던 용기를 짜내서 물었다.

“근데 왜 제안서는 보내지 않은 겁니까?”

모건이 정말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왜 제안서를 보내지 않았는지.

“그거야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당신 같으면 여자한테 까일 게 뻔한데도 번호를 물으러 가겠나?”

모건의 물음에 천소울은 조금 고민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

“네. 정말 마음에 든다면요.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온 거고.”

천소울의 말에 모건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젊어서 그런가. 패기가 넘치네.’

모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반한 얼굴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저건 허세가 아니었다.

‘하긴 저 모습에 여자한테 까일 턱이 있나.’

괜한 걸 물은 자신의 잘못이 컸다.

모건은 천소울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원하는 걸 얻겠다는 욕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재능이라면 더 검증할 필요도 없고.’

모건은 천소울을 보면서 한계라 생각했던 것을 뛰어넘는 것조차 재능이란 걸 알게 됐다.

그만큼 천소울은 오디션을 통해 엄청난 성장을 겪었다.

온갖 데서 한국인 참가자들에 대해 떠들었다.

모건은 듣다가 지쳐 지겨운 마음에 너튜브 영상을 틀어봤다.

처음에는 제대로 들을 생각도 없었다.

이미 한국에서 그들의 실력을 검증하고 왔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흘러나오는 영상 속, 자신이 한국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는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날?’

모건에게 남는 궁금증은 왜 하필 자신을 선택했느냐였다.

물론 모건 또한 업계에서 최정상급 프로듀서였다.

천소울이 아까 전 말한 프로듀서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요즘 음악 시장에서 난다 긴다 하는 유명 프로듀서들이었다.

굳이 독설을 퍼부었던 자신을 찾아와 제안서를 넣어달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과 실력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

“우리 사이에 말이야, 이런 걸 묻기는 좀 낯간지럽지만.”

모건은 새삼스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정말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천소울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하다가 겨우 표정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이 아까 그랬잖아. 마음에 들면 까일 거 알면서도 번호 묻겠다고. 그럼 보통 상대방한테 엄청 마음에 드는 게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어딘가에 꽂혔다거나.”

“꽂힌 건 없고 남자의 승부욕입니다. 한 번 까였잖아요, 저.”

방금 전에 모건이 말한 말을 이용한 천소울의 말에 모건은 재밌는지 씨익 웃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오는 여자는 없다, 이런 생각으로 찾아온 건가?”

“받아줄 때까지 열 번이 아니라 백 번도 찍어볼 생각입니다.”

“이놈 진짜 재밌네. 그래서 100번 찍으면 넘어갈 거라고 보나?”

100번?

천소울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웃었다.

“당장 오늘도 넘어올 거라고 봅니다.”

“이유는?”

“그때도 잘났지만, 지금은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잘나졌으니까요.”

천소울의 자신감 있는 대답에 모건은 웃겨 죽겠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소파까지 두드려 가며 웃음을 터트리던 모건은 항복이라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천소울씨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네요.”

여기까지 들은 성현은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뻣뻣하다 싶은 정도로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모건 앞에서도 저랬다니.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반대로, 어쩐지 잘 키운 아들이 밖에 나가 싸워놓고, 이겼다는 소리를 전해 듣는 부모처럼 뿌듯한 마음이 밀려오다니.

“전 겸손이 미덕이라 보지 않습니다. 제가 잘난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모건이 뭐래요? 받아줬어요?”

성현은 이제 반쯤 포기하기로 했다.

쿠크다스 같던 멘탈이 단단하게 여물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결과야 뻔한 거 아닙니까?”

천소울은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큰 소리로 웃던 모건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으로 향했다.

천소울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물끄러미 그를 관찰했다.

모건은 주저없이 책상에 있는 수화기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더 넥스트 슈퍼스타 측에 제안서 하나 넣으려고. 준비해줘. 이름?”

모건은 전화를 하며 천소울을 힐끗 쳐다보더니 웃었다.

“한국의 천소울.”

***

“결국 원하는 걸 얻어냈네요. 트라우마도 극복하고.”

“이성현씨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던 겁니다.”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주시고. 감동이에요.”

성현은 아주 고맙다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승전보는 승전보이니, 오늘만큼은 맘껏 자기 기분에 취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뭐가 감동이에요? 나도 알려줘.”

캐리어를 끌고 등장한 임하나가 자연스럽게 천소울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임하나는 이제 막 호텔로 돌아온 참이었다.

제이지와 최종 파트너 결정을 맺고 미팅을 위해 뉴욕에 갔었던 것.

“갑자기 뭡니까?”

천소울은 갑자기 나타난 임하나의 등장에 놀라서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임하나의 상태가 이상했다.

“왜요? ......천소울씨도 나 보기 싫어요?”

임하나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침울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제이지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그렇게 들떠서 가더니.

막상 돌아온 임하나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하나씨, 뉴욕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성현이 걱정이 되어서 묻자, 임하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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