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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25화 (225/273)

225화

본선 8라운드가 공지되고 닷새째 되는 날.

성현은 호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계를 확인했다.

카페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오자, 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었다.

“잘 다녀왔어요?”

저 멀리서도 보이는 잘생긴 얼굴.

천소울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확실히 날씨는 브루클린보다 LA가 낫군요.”

“브루클린에 비가 자주 오긴 하죠.”

천소울은 배낭을 내려두며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성현은 천소울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웃었다.

그가 LA를 떠난 이유가 모건 때문인 만큼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빤히 안 봐도 말해줄 거니까 그만 보죠.”

천소울은 언제나처럼 성현을 타박하면서 자신의 커피를 받아들었다.

“적당히 까칠한 거 보니 잘된 것 같은데. 맞나요?”

성현의 농담에 천소울은 말없이 피식 웃으며 서버가 가져다준 블랙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브루클린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모건이 있는 회사로 찾아갔습니다.”

천소울은 곧 궁금해하는 성현에게 자신의 여정을 찬찬히 풀어냈다.

***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택시에서 내린 천소울이 위를 올려다보니 통유리로 된 고급 건물이 보였다.

한참 그 건물을 올려다보던 천소울은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소울은 바로 데스크에 있는 안내 직원을 찾았다.

“모건 프로듀서를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 잡은 건가요?”

직원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에 천소울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직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천소울에게 설명했다.

“미리 약속을 잡으신 게 아니라면 프로듀서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함과 연락처를 적어 주고 가시면 나중에 저희 쪽에서 따로 연락드릴게요.”

거기까지 들은 성현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이야기를 중단했다.

아니, 아무래도 그렇지......

“잠깐. 약속도 안 잡고 무작정 갔다구요?”

“네. 성현씨가 그냥 가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현은 천연덕스럽게 나온 천소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곧이곧대로 사람 말을 듣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도 약속은 하고 갈 줄 알았죠. 모건이 기획사에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직원이 안 된다 해서 그냥 돌아갔어요?”

성현은 적당히 그 부분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브루클린에 있었던 천소울이었다.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 하고 듣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천소울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설명을 이어서 했다.

***

직원에게 거절당한 천소울은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메튜 페리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 무해한 미소와 함께 빛나는 잘생긴 얼굴.

미인계를 쓰기로 한 것이다.

“저 모릅니까? 더 넥스트 슈퍼스타에 참가 중인 천소울입니다.”

천소울의 미소를 본 직원은 그 미소에 얼굴을 붉히더니 주변 동료들을 힐끗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미리 약속을 잡으신 게 아니라면 들여보내 줄 순 없어요.”

직원은 딱딱한 사무적인 어조를 버린 지 오래였다.

안타깝다는 듯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하지만, 천소울은 물러나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브루클린까지 찾아온 의미가 없었다.

“그럼 제가 왔다는 메시지만 모건 PD한테 전해줄 순 없을까요?”

천소울의 부탁에 직원은 다시 한번 데스크에 있는 다른 동료들의 눈치를 봤다.

천소울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치명적인 미소를 지었다.

“부탁합니다. 전화로 말씀만 전해주는 건데 어렵지 않잖아요.”

천소울의 말에 직원은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내선 전화를 돌린 직원은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천소울은 기대에 찬 눈으로 직원을 바라봤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고마워요.”

천소울은 마지막으로 직원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로비에 마련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천소울씨도 여우 다 됐네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성현은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을 짓는 성현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천소울이 툴툴거렸다.

“기지를 발휘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모건은 만났나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천소울.

“바로는 아니고 30분을 조금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그를 1층 로비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천소울은 조금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앉아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모건이 로비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천소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천소울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거는 게 맞는 건가 싶어서 어정쩡하게 가만 서 있었다.

그러자 천소울을 발견한 모건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마이, 모건은 허탈한 미소를 흘리며 소파로 다가왔다.

“진짜였어?”

모건은 기가 차서 웃으며 천소울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번드르르한 얼굴은 쉽게 찾기 힘들었다.

요리보고 저리 봐도 천소울 본인이었다.

“진짜 천소울 맞아?”

그래도 미심쩍은지 모건은 직접 천소울에게 물었다.

“네. 한국에서 PD님께서 팝의 소울이 없다고 했던 그 천소울입니다.”

천소울의 조금 뼈있는 말에 모건은 잠시 벙찌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랬었나?”

“원래 말한 사람은 기억 못 하죠. 들은 사람은 기억해도.”

피해자는 기억하지만, 가해자는 기억 못 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천소울.

괜히 까칠하게 나올지도 모를 말을 꾹 참은 천소울은 이 정도로만 말하고 그쳤다.

모건은 천소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나도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건 기억 나긴 해.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심한 독설도.”

모건의 말에 천소울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 반응에 모건은 다시 천소울을 신기하다는 듯 살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천소울을 다시 조우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근데 난 왜 찾아온 거야? 소문으론 당신이 나 때문에 시크릿 스테이지에서 하차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모건은 당시 일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천소울에게 독설을 했다는 사실 하나.

그리고 그 일로 천소울이 하차를 한 것이 아니냐는 스탭들 사이에서 나돌았던 소문.

이 두 가지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천소울이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조용한 데서 얘길 나누고 싶은데 혹시 시간 되나요?”

천소울의 부탁에 모건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긴장한 표정의 천소울은 그런 모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 난데. 오늘 약속 말이야. 내일로 미룰 수 있나? 아니, 급하게 손님이 찾아와서.”

모건은 약속을 취소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뒤로 이렇다는 말 한마디 없이 건물을 나갔다.

천소울은 무작정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모건이 바로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천소울은 차에 올라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멀뚱히 서 있는데,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뭐해. 타.”

태연한 모건의 말에 천소울은 곧장 차에 올라탔다.

차는 근처에 있는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모건은 익숙하게 차에서 내리고, 천소울도 따라 내렸다.

건물은 소담했지만 중후한 멋이 있었다.

“여긴 내 개인 스튜디오. 작업은 주로 여기서 해.”

모건은 건물로 들어가며 짧게 설명했다.

천소울은 건물을 구경하며 그의 뒤를 바쁘게 쫓아갔다.

“모건도 천소울씨가 자길 찾아온 이유가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네요.”

성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 모건이 순순히 천소울을 데리고 간 것이 신기했다.

어쩐지 그 두 남자에게 퍽이나 어울리는 재회라고 생각하면서.

“둘 중 하나라 생각했대요. 복수하러 왔거나 아니면,”

“아니면?”

성현은 천소울의 뒷말이 궁금해서 천소울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뜸을 들이던 천소울이 입을 뗐다.

“돈 빌리러 왔거나.”

푸핫.

천소울 말에 성현은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네요. 아무튼, 그래서요? 스튜디오 가서는 무슨 얘길 나눴어요?”

모건의 스튜디오는 어떨지 궁금한 마음도 들었지만, 우선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싶었다.

***

건물 내 위치한 모건의 스튜디오.

개인 스튜디오라 보기 힘들 정도로 겉보기보다 내부가 넓었다.

오히려 그의 소속사보다 스튜디오의 내부가 더욱 화려했다.

각종 최고급 장비는 물론이고, 모건이 받았던 트로피와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정말 미국 대부분의 스타가 모건의 손을 거쳤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하나같이 엄청난 톱스타들의 사진들.

천소울은 박물관에 온 것처럼 스타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천소울이 한참 동안 사진에 넋이 나가 있는데, 모건이 시가에 불을 붙이더니 천소울에게도 하나 건넸다.

천소울은 질색을 하며 한발 물러섰다.

“흡연 안 합니다.”

그 모습에 모건은 씨익 웃었다.

“다행이네. 받으면 쫓아내려 했거든. 목 관리 잘해. 가수한텐 좋은 목소리도 재능이니까.”

모건은 시가를 도로 함에 넣으며 소파에 앉았다.

천소울 역시 그 앞 소파에 자리 잡았다.

“천소울 당신 운이 좋았어.”

“.......?”

천소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모건을 빤히 쳐다봤다.

무언의 질문을 던지는 천소울의 눈빛.

다른 이가 보면 건방지고 무례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모건은 허허롭게 웃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건방진 얼굴 속에 두려운 눈빛을 지닌 청년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배짱이 커진 건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모건은 피식 웃으며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오늘은 미팅이 있어서 사무실로 간 거였지만 난 보통 곡 작업은 여기 개인 스튜디오에서 하거든. 뭐 이것도 당신 운인 거겠지. 아니면 우리가 다시 만날 운명이거나.”

모건은 시종일관 이 상항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시가를 깊게 빨며 연기를 내뿜다가 천소울을 쳐다봤다.

옅게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말갛게 빛나는 청년의 곧은 눈빛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참고로 난 빙 둘러 말하는 거 딱 싫어해. 뭐, 이건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긴 합니다.”

천소울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건에게 직선적인 걸 넘어서서 더 심한 말을 들었던 경험도 있었다.

애초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빙 둘러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천소울 자신도 빙 둘러서 얘기하는 성격이 못됐기에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천소울은 모건의 말대로 곧장 돌직구로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래서요?”

거기까지 말한 천소울은 목이 탔는지 커피를 마셨다.

하필 끊어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무는 천소울을 성현이 조금 원망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모건이 뭐라고 답했냐면,”

그러거나 말거나 이 상황이 재밌는지 천소울은 씨익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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