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마음속에 둔 프로듀서라면 설마 나......?’
천소울 말에 성현은 저도 모르게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혹시 천소울이 자신과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건가 하는 기대감.
성현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번 라운드는 개인 라운드다.
팀전이 아니었다.
성현은 실망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은 채 대답했다.
“그럼 그 사람이랑 하면 되잖아요.”
타이르듯 말하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이 기가 죽어 대답했다.
“그 사람은 저한테 제안서를 보내지 않았다는 게 문제겠죠?”
‘진짜 난가? 근데 같은 참가자들끼린 콜라보가 불가능하지 않나?’
성현은 헉, 숨을 집어삼켰다.
이거 진짜 어쩌면, 아니, 설마.
천소울이 다른 유명 프로듀서가 아닌 자신과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성현은 점점 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사이, 천소울은 근처 벤치에 앉았다.
성현은 얼른 천소울을 따라 그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빨리 파트너를 정해서 공연 준비를 해야 한단 건 알지만 혹시나 그 프로듀서한테 제안이 올까 봐 자꾸 머뭇거리게 돼요.”
“.......”
‘천소울씨가 이렇게나 작업하고 싶어 하는 프로듀서가 대체 누굴까. 정말 나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성현은 머릿속으로 룰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정말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다.
그러느라 천소울의 말에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궁금증이 차오른 성현.
그냥 천소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제안을 하나 하기로 했다.
“그 사람한테 제안이 없으면 먼저 솔직하게 마음을 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안 될 말이라는 듯이 펄쩍 뛰었다.
“직접요? 아직까지 제안이 없는 걸 보면 절 안 원하는 게 아닐까요?”
‘난 같은 참가자니까.’
성현은 속으로 이렇게 답하며 다시금 천소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만약 천소울이 정말 원하는 프로듀서가 자신이라면, 무언가 수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건 물어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낼 바에 거절당하더라도 문제를 확실히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조금 생각에 잠기다 성현을 쳐다봤다.
“가수가 먼저 프로듀서에게 제안을 할 수도 있는 건가요?”
성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해줬다.
“커넥트 앱을 통해 정식 제안서를 보내는 건 안 되더라도 직접 찾아가 보는 건 가능할 거예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살짝 웃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해결책을 찾은 것 같습니다.”
천소울은 근심을 해결해서 개운한 듯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성현은 조금 초조하게 그런 천소울을 불러 세웠다.
왜 아무런 말도 없이 천소울이 떠나는 건가 싶었다.
아직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성현은 굳어가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말했다.
“근데 천소울씨.”
“네. 왜요?”
“마음에 둔 프로듀서가 누구예요?”
성현은 아닌 척 기대감에 차 물었다.
그 말에 천소울은 살짝 머뭇거리더니 이내 다시 벤치에 앉았다.
다시 돌아온 천소울의 모습에 성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천소울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올까 긴장해서 쳐다보는 성현.
이내 그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모건이요.”
“.......”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진 공원은 쌀쌀해졌다.
성현은 갑자기 두 어깨가 시리다고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그 모건이요?”
“네. 한국에 심사위원으로 왔던 그 모건이요.”
그러니까, 당신은 알콜중독으로 몰아세웠던 그 모건 말이지.
성현은 차마 이 말까지는 할 수 없어서 말을 아꼈다.
“그,”
달싹 입을 뗐던 성현은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몰랐기에 입을 다물었다.
모건이라면 천소울과 끔찍한 일로 엮인 프로듀서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람이랑 작업을 하고 싶다니?’
천소울은 모건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걸렸을 만큼 심한 고통을 받았었다.
그런 천소울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자신과 주선아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런데 그를 마음 속에 두고 있었다니.
성현의 입장에서는 놀라움을 넘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조금 정신을 차린 성현이 차분하게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증명하고 싶어서요. 제가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가수라는 걸요.”
오래도록 생각해왔는지 천소울에게서 막힘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증명이라.
성현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자신이 예전에 트라우마에 정면으로 맞서라는 말을, 천소울이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모건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모건과 작업하겠단 건가요?”
“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천소울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성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뒷말을 재촉했다.
“그럼요?”
“이성현씨가 그랬잖아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선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고. 저번 제드 PD와의 일은 이성현씨가 도와줬지만 이번만큼은 저 스스로 극복해 보고 싶습니다.”
천소울은 모건과의 일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모양.
이대로 덮고 지나가면 그것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천소울의 각오에 성현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성현이 듣기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앞으로 천소울이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면 반드시 모건을 마주칠 것이다.
지금부터 그와 척을 지어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천소울씨 개인으로 봤을 때도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기도 하고.’
천소울이 누군가?
자신이 잘생긴 걸 알고, 노래를 잘하는 걸 알고, 천재인 걸 아는 남자다.
그만큼 높은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모건에게 받았던 비판은 치명적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터.
‘물론 천소울씨의 멘탈이 약해져 있긴 했었지만.’
성현이 보기에 이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모건의 인정을 받는다면, 천소울이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너무 급하게 상처를 극복하려는 건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제드와 결판을 지어, 그에게 남은 트라우마를 얼마간 마주하긴 했지만.
성현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정말 괜찮겠어요?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억지로 만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일엔 때가 있는 거니까요.”
성현의 조심스러운 만류에 천소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성현에게 말을 꺼내면서 자신의 의지가 더 확고해진 모양이었다.
이제는 말을 꺼내는 것에 있어서 망설임도 없었다.
“저는 지금이 적기라고 봅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두 번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꺼리겠지만 얼마 전에 당시 방송분을 다시 보니 모건 PD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더군요. 아니, 오히려 그는 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소한 지점들까지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방송분을 다시 돌려 봤다니.
성현은 그의 의지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말에 성현은 조금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건이 조금 심한 독설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근거 없는 비난은 아니었으니까.
“당시엔, 저 스스로도 부정하고 있지만, 전 그때 오디션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급급해서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닌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모건의 비판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치부를 들켜버린 것 같아서.”
천소울의 솔직한 고백에 성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많이 단단해졌구나.’
게임 속 천소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쿠크다스 같은 멘탈이었다.
천재였기에 다른 사람의 비판에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함을 추구하기에 조금의 결함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성격은 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천소울은 달라졌다.
성현이 게임에서 수도 없이 마주친 천소울과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천소울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건 생각 없이 과거의 상처에 덤벼드는 객기가 아니었다.
‘독초도 사용하기에 따라 약이 될 수 있으니까.’
천소울은 모건과의 일을 통해 더욱 강인해질 수 있었다.
그런 그와의 일을 극복함으로써 앞으로 겪을 수많은 상처에도 끄떡없는 단단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천소울씨는 또 한 번 성장했군요.”
“네? 다 큰 어른이 무슨 성장입니까.”
천소울은 무슨 소리냐며 낯간지러워했다.
그 반응에 성현은 실실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 컸네, 다 컸어.
“후회 없겠어요? 지금 제안 온 프로듀서들도 모건 못지않게 어마무시 하잖아요.”
성현의 물음에 천소울은 망설임 없이 벤치에서 따라 일어나더니 확신해 찬 표정을 지었다.
“후회 없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모건한테 인정받아서 지금 제안 온 프로듀서들이랑은 나중에 또 작업하면 되니까.”
천소울에게 이번 오디션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천소울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오디션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는 성현도 마찬가지.
천소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성현이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린 지금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니까.”
성현과 천소울은 발걸음도 가볍게 호텔로 돌아갔다.
***
본선 8라운드를 위한 제안서의 발송이 시작된 지 이틀이 흘렀다.
성현은 점심을 간단하게 햄버거로 해결할 생각에 임하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호텔 로비로 미국 측 참가자들이 몰려나왔다.
“성현!”
역시나 메튜.
성현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는 그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메튜는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콜라보 파트너 결정됐어요?”
“아니요. 아직 고민 중이에요.”
메튜는 아쉽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밝게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항상 응원할게요. 꼭 좋은 파트너 만나서 다음 라운드도 함께 올라가요.”
메튜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현은 항상 지나치게 들이대는 메튜가 조금 부담스러워 몸을 조금 뒤로 뺐다.
확실히, 외국인들은 퍼스널 스페이스의 기준이 한국인들과는 달랐다.
“그래요.”
성현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서 있는데, 메튜는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멀뚱히 성현을 쳐다볼 뿐.
부담스러움은 성현의 몫이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왜 저한텐 안 물어봐요?”
“......뭘요?”
“파트너요.”
메튜의 말에 성현은 아, 하며 낮게 탄식하더니 당연하듯 대답했다.
“당신 파트너는 워낙 유명하니까요.”
성현의 대답이 생각지도 못했는지 메튜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그리곤 곧 미소를 매달고 환하게 물어왔다.
“성현도 알고 있어요?”
“그럼요. 피니어스 오코넬, 맞죠?”
피니어스 오코넬.
메튜 페리의 파트너는 이미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재작년 ‘그래미 어워즈’를 휩쓸며 역사를 새로 쓴 현시대 최고의 여가수 중 한 명인 빌리 아일리시.
그녀의 친오빠이자 뛰어난 음악적 감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프로듀서, 피니어스 오코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