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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15화 (215/273)

215화

성현을 비롯한 세 사람은 봉준호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진심 어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왜 자기들 때문에 더 넥스트 슈퍼스타에 참가했을까.

“어째서요?”

임하나는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조금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후 자신도 놀랐는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변명했다.

“아니, 그러니까, 감독님 같은 분이 왜 저희 때문에 LA까지 오셔서 심사위원을 하신 건지 잘 모르겠어서.......”

횡설수설하는 임하나의 말을 끊은 것은 봉준오 본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뭔데요?”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임하나가 두 손을 꼭 잡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엄청 유명하시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아카데미 상도 받으신 국뽕 감독님이시고. 한국 영화 역대 관객수 순위 1위부터 3위까지 올킬하신 기록 제조기시고, 또 유머 감각도 많아서 인터뷰마다 화제가 되는 스타성 쩌는 감독님이시고 또......”

임하나는 봉준오의 질문에 두서없이 팬심을 드러내며 찬양했다.

봉준오 임하나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열거하자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이러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닌데.

“그만. 그만해도 돼요. 내가 이렇게나 장점과 타이틀이 많은 사람인 건 처음 알았네.”

봉준오는 진땀을 빼며 임하나를 진정시켰다.

오히려 임하나가 아쉽다는 듯이 쩝, 입맛을 다셨다.

“더 말할 수 있는데......”

임하나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봉준오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긴장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지금은 그저 한 명의 팬이 되어 넘실대는 기쁨에 몸을 맡긴 듯했다.

“미안해서 어쩌나. 난 임하나씨나 이성현씨, 천소울씨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봉준오의 염려 섞인 말에 천소울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임하나씨가 스토커처럼 많이 알고 있는 거니까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임하나는 뭐라 또 따지려 하다가 말을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앞에 봉준오를 앉혀두고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큰소리를 하려다 말을 삼키고 가만히 천소울을 째려보는 임하나의 모습에 천소울은 헛웃음을 지었다.

임하나가 이 정도로 영화에 조예가 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하나씨가 날 좋게 봐줘서 고마운데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난 그냥 영화 찍는 걸 좋아하는 영화쟁이고 유명세로 치자면 당신들도 나 못지 않잖아.”

“감독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죠.”

놀란 성현이 외치자 봉준오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에이, 내가 당신들 공연 너튜브 다 챙겨봐서 알아. 기본으로 조회수는 500만은 넘기더만.”

“저희 무대 공연을 보셨어요?”

천소울이 감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나 당신들 때문에 LA까지 날아와서 심사위원 봤다니까. 나 당신들 팬이라고.”

봉준오의 말에 임하나를 비롯한 천소울, 성현 또한 놀라움에 눈이 커졌다.

세계적인 감독이 자신들의 팬이고 공연까지 찾아봤다니?

“오늘도 이 자리 부른 거 다른 이유 없고 진짜 팬심 때문에 만나자 한 거예요. 이런 걸 성덕이라고 하나? 성공한 덕후? 맞아요?”

예상과는 다르게 봉준오 감독이 정말로 신나 보였다.

“봉준오 감독님이 내 덕후라니......”

그 중에 제일 얼이 빠진 것은 임하나였다.

그녀는 봉준오 말에 믿기지 않다는 듯 넋이 나가 혼잣말을 하며 쭉정이처럼 앉아있었다.

그때, 직원이 애피타이저와 고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동치미를 시작으로 전복죽, 소고기 전병, 김지천, 잡채 등의 반찬이 들어왔다.

거기에 빛깔 좋은 고기까지.

“고기 올려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불판 온도를 잰 뒤, 고기를 올렸다.

치익, 하는 먹음직스러운 소리와 함께 고기가 갈색으로 익어갔다.

그 소리에 넋이 나가 있던 임하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직원은 적당히 구운 고기를 칼로 썰어 각자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먹어봐요. 놀란 감독님이 이 식당이 맛있다고 그렇게 추천을 해주더라고.”

봉준오는 얼른 먹어보라는 듯이 송로버섯 소금을 찍는 것도 잊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신이 나서 고기를 입에 넣으려던 임하나가 멈칫했다.

설마.......

“놀란이면 크리스토퍼 놀란이요?”

“네. 오늘 한국 참가자들이랑 저녁 먹을 거라 하니까 먼저 추천해 줬어요. 자기도 종종 오는 가게라고.”

그 말에 고기를 굽고 있던 직원이 으쓱하는 게 느껴졌다.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직원을 본 세 사람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와...... 진짜 클라스가 다르네요. 음식집 추천을 블로그가 아니라 크리스토퍼 놀란이 해주고.”

임하나는 봉준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감탄을 하며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말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나오는 진실의 미간.

“진짜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오늘 음식은 성덕이 사주는 거니까.”

임하나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봉준오가 세 사람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네 사람은 잠시 대화는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했다.

세 사람은 리허설에, 공연에 오늘 하루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했기에 무척 배가 고픈 상태였다.

직원 구워주는 족족 모든 고기가 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봉준오는 고기는 적당히 사양하면서 술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고기 한 판과 술 두 병을 비웠을 때쯤.

확실히 처음보다 분위기가 많이 풀어져 있었다.

“저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웬만큼 배를 채운 임하나가 드릉드릉 시동을 걸며 봉준오를 쳐다봤다.

봉준오는 소주를 마시며 웃었다.

어느새 빈 병에 직원을 향해 추가로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화 관련된 질문만 아니면 돼요.”

“.......”

임하나의 얼굴이 쩌적하고 굳었다.

봉준오는 그런 임하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해요. 뭐가 궁금한데요?”

“저 감독님 영화 다 봤는데 그중에서 살인자의 추억 제일 좋아하거든요. 근데 거기서 마지막에 왜 송강오 배우분이 카메라를 쳐다보는 거예요?”

임하나는 봉준오의 허락에 다시 신이 나서 줄줄 말했다.

“아, 그거. 그때 당시만 해도 아직 진범이 잡히지 않았을 땐데 우리끼리 그런 얘기를 했어요. 배우들이랑 술 마시면서 나온 얘기인데. 범인은 과시를 좋아하는 성격이고 분명 이 영화를 보러 올 것이다.”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쉽게 대답해주는 봉준오의 말에 성현과 천소울도 귀를 기울였다.

살인의 추억을 안 본 사람은 이곳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원래 없던 장면을 추가했던 거예요. 진짜 범인과 수사에 실패한 형사를 마주하게 하고 싶어서.”

“그럼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내용이었던 거네요?”

“그런 셈이죠. 그게 예술이잖아요.”

봉준오의 단언에 세 사람은 생각에 잠겼다.

“가수들도 곡을 만들거나 무대를 준비할 때 갑자기 영감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원래 계획했던 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내 직감을 믿고 도전을 할 건가.”

봉준오는 알지 않느냐는 듯이 성현을 쳐다봤다.

가수들도 무대 위에서 그런 경험을 왕왕 하지만, 여기서 감독과 제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도 아니고 성현이었으니까.

“맞아요. 그럴 때 내 직감을 믿고 선택을 내리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고 저희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보니 팀 단위로 등락이 결정될 때가 많거든요. 제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면 팀원들한테까지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보니 프로듀서로서 종종 압박감이 들 때가 있긴 해요.”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성현의 속내에 천소울과 임하나가 놀라서 성현을 돌아봤다.

성현은 항상 자신감 있게 척척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가 이런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봉준오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라고 다르진 않아요. 감독의 역할은 음악에서 프로듀서의 역할이랑 비슷하니까. 내가 영화 하나를 말아먹으면 제작사나 스탭들 배우들한테까지 그 피해가 가니까. 게다가 우린 곡 하나 말아먹는 것과는 스케일이 다르거든.”

쓰디쓴 기억이 떠올랐는지, 봉준오 감독이 소주잔을 들었다.

하지만 잔이 비어 있었다.

술병을 찾는 봉준오 감독에게 성현이 얼른 그 잔을 채워주었다.

크으.

마저 술을 마신 봉준오 감독이 말을 이었다.

“설혹열차만 해도 제작비가 400억이 넘게 들어간 영화인데 의상부터 영화 음악, 조명 모든 게 다 내 선택에 달린 거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거지.”

400억.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는 예산에 임하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감독이란 직업도 압박감이 상당하군요.”

비록 음악과 영화, 서로 하고 있는 분야는 달랐지만 모두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 가운데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됐다.

“감독님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성현의 물음에 봉준오는 반색했다.

“왜 안 하나 했어. 임하나씨 혼자서만 질문하고 두 사람은 나한테 관심 없는 건가 싶어서 조마조마했다고.”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얼큰한 얼굴로 봉준오가 술잔으로 성현과 천소울을 가리켰다.

성현은 겸연쩍게 웃으며 마저 물었다.

“영화감독으로서 최고의 영예라고 불리는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하셨는데 수상 이후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가 궁금해요.”

성현의 질문에 봉준오가 생각에 잠겼다.

“수상 당시 기분인지가 아니라 수상 후에 감정이 궁금하단 건가?”

“네. 어떻게 보면 감독으로서 꿈꿔왔던 목표를 이룬 거잖아요. 전 그 꿈같은 순간이 지나간 이후가 궁금해요.”

알만하다는 듯이 씨익 웃은 봉준오가 성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영화가 끝난 후 주인공의 삶이 궁금하단 거군. 맞나?”

“네.”

영화가 끝난 후의 삶.

모든 주인공은 엔딩을 맞고 막이 내린다.

성현과 두 사람 역시 ‘더 넥스트 슈퍼스타’ 오디션이라는 거대한 블록버스터에서 이제 곧 엔딩을 맞을 터였다.

봉준오는 잔에 술을 채우더니 마시고,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엄청난 흥분감을 느끼면 그 뒤에 반드시 허무함이 밀려오잖아.”

그치? 하면 묻는 말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인 거장도 피해갈 수 없는 허무함.

“난 그래서 상을 받을 당시에 기쁨 후에 올 허무함이 두려웠었어. 내가 영화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고. 물론 그런 것들이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지금 모든 걸 다 이룬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의 양은 분명 다를 테니까.”

다시 술잔에 잔을 채우려는 봉준오를 만류한 성현이 먼저 술병을 잡아서 술을 따랐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한 거야. 항상 새로운 자극을 받고 영감을 받아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고갈되지 않게 말이야.”

봉준오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세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결국 영화감독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없다는 건 사망신고와도 같은 거거든. 내가 당신들 무대를 찾아보고 당신을 만나러 LA로 날아온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 볼 수도 있는 거겠지.”

봉준오의 말에 성현과 천소울, 임하나는 조용히 경청했다.

쉽게 말해서, 봉준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덧붙였다.

“오래된 부부 생활과 같다고 봐. 열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거지.”

‘열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라......’

봉준오의 말을 들은 성현과 임하나, 천소울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들에게도 오디션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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