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그러고 보니 성현씨는 어제 뭐 했어요?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임하나와 천소울은 자리에 앉으며 성현에게 물었다.
연습실은 악기가 종류별로 갖춰져 있기에 요리조리 잘 피해서 앉아야 했다.
“전 전부터 가보고 싶던 재즈바가 있어서 거길 다녀왔어요.”
“맞다. 성현씨 재즈 했었다고 했지.”
“어때요? 재즈바는 한 번도 안 가봐서.”
재즈바라는 말에 두 음악인이 눈을 빛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같이 갈 걸 그랬나.
성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혼자만 갔어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팬사인회를 했어야 했던 성현이었다.
만약 그곳에 세 사람이 다 갔다?
아마 호텔로 돌아올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클럽마다 분위기가 다르긴 한데 보통은 음악 듣고 춤추고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그럼 거기서 외국인들도 서로 번호 따 가고 그래요?”
임하나는 한국의 클럽과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외국은 뭔가 좀 다르냐고 캐물었다.
“번호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어젯밤 자신을 거절한 성현을 잡아먹을 듯이 두 눈을 치켜떴던 아만다를 떠올렸다.
성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사담은 그만하고 이제 회의 진행할까요? 숙제는 다들 해오셨나요?”
“네!”
임하나와 천소울은 본격적인 회의 시작에 앞서서 각자 준비해 온 노트를 꺼냈다.
성현이 회의에 오기 전, 이번 본선 7라운드 곡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적어오라는 과제를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곡은 두 사람의 생각과 감정,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곡에 잘 드러나야 하잖아요. 저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사전 회의를 좀 길게 가져가고 싶어서 부득이하게 두 분에게 숙제를 내줬는데 어땠나요? 생각 정리에 도움이 좀 됐나요?”
두 사람은 성현의 말이 끝내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그전에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곡을 쓴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니까 메시지가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천소울씨는요?”
“저도 임하나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확실히 노래를 듣는 대상을 떠올리니까 메시지가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이 과제를 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이번 무대를 통해서 무얼 말하고 싶은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전 세계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은지.
“두 분 다 메시지는 명확하게 정하신 것 같네요. 그럼 천소울씨 먼저 얘길 나눠볼게요. 천소울씨가 이번 곡에서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는 뭐예요?”
천소울은 성현의 말에 잠시 연습실 한구석을 바라봤다.
그 곳에는 아버지가 성현과 임하나에게 가져다주라고 건네준 레몬생강청이 놓여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전 기러기 생활을 하는 대한민국 아버지들에게 보내는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단순히 그들의 희생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가장을 책임지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는 그들에 대한 존경심도 함께 보여주고 싶어요.”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의 마음을 담고 싶다.
성현은 천소울의 생각을 짧게 정리해가며 물었다.
“노래 컨셉에 대한 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나요? 자칫하면 메시지 자체가 조금 과할 수가 있어서 노래까지 웅장하게 가버리면 투머치일 것 같아서요.”
제일 먼저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될 천소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성현은 짧게 스케치해놓은 자신의 작업물을 떠올리며 천소울을 응시했다.
성현의 말에 천소울 역시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과하지 않게 담담한 스타일로 가고 싶습니다. 곡이나 무대 연출의 화려함 보다 메시지 전달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기도 하고.”
천소울은 이미 자신이 생각해 둔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담담한 스타일.
천소울은 이미 목소리가 화려했기에, 메시지 전달을 생각하자면 훌륭한 의견이었다.
성현, 그의 말을 노트북에 빠르게 받아 적는다.
“하나씨는요?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다음은 임하나의 차례.
천소울의 컨셉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임하나가 자신의 노트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전 저희 친할아버지랑 이번 공연에서 만난 프리먼 할아버지의 이야길 할까 해요.”
6.25 참전 용사들이 전해준 조국의 한.
잊고 있었던 아리랑의 멜로디와 함께 아직까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의 따스한 정까지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힘든 전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국을 위해 싸워준 두 영웅에 대한 서사에 한국인의 혼이 담긴 아리랑을 더해서 곡을 만들고 싶어요.”
두 참전 용사를 부르는 데 있어 영웅이라는 표현을 쓰는 임하나.
성현은 영웅 서사를 담고 싶다는 임하나의 표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지금이 회의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이어 말했다.
“아리랑을 더하는 건 좋은 것 같아요. 그 자체로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기도 하니까요.”
“네. 그리고 사실 한국인 하면 위기에 강한 민족이잖아요. 6.25도 그렇고 IMF도 뚝딱 이겨내니까요. 다른 나라에서 보면 그냥 강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르거든요.”
성현과 천소울은 임하나의 뒷말이 궁금해 쳐다봤다.
임하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힘을 실어 말했다.
“단순히 강한 게 아니라 그만큼 아픔이 많고 한이 많은 민족인 거예요. 천소울씨 아버지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듯 조국을 사랑해서 악으로 깡으로 버텼던 거죠.”
힘주어서 말하는 깡이라는 단어.
성현은 임하나 말을 빠르게 노트북에 적을 뿐 이에 대한 피드백을 따로 주지 않았다.
이번 곡 작업만큼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주가 아닌 두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
‘물론 내가 손댈 필요 없이 두 사람이 잘해주고 있기도 하고.’
천소울과 임하나 모두 특별 무대를 통해 본선 7라운드와 관련된 성현의 힌트를 훌륭하게 눈치채 주었다.
그것을 자신만의 경험과 엮어서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완성해오기까지 했다.
‘이대로라면 미션까지 곡 작업은 순조롭게 끝나겠는데.’
정리된 회의록을 보는 성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드디어 본선 7라운드 미션 공개 당일의 날이 밝았다.
주최 측에서 마련한 꽤 규모 있는 공연장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찼다.
총 10개국의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 경계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었다.
“동해 번쩍 서해 번쩍이네. 아깐 프랑스 사람들이랑 얘기하더니 이젠 일본 사람들이랑 얘기하고. 메길동이 따로 없네요.”
공연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참가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메튜 페리.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임하나가 혀를 내두르며 말하는 데 말투가 살짝 퉁명스러웠다.
“삐져서 그러는 겁니까? 메튜 페리가 임하나씨만 쏙 빼고 말 걸어서?”
그 모습을 보고 천소울은 피식 웃으며 임하나를 타박했다.
그러자 임하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니거든요?!”
“아니긴. 삐진 거 같구만.”
“아니라니까!”
결국 참을 만큼 참은 임하나가 빽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뭐가 아니에요?”
“엄마야!”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괘, 괜찮아요.”
임하나는 갑작스러운 메튜의 등장에 얼굴을 붉히며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천소울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메튜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보며 웃었다.
그러다 메튜의 관심사는 두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시선을 성현에게 돌렸다.
“성현. 잘 지냈어요? 얼마 전에 베니스 재즈 클럽 갔다 왔죠?”
성현은 말없이 오늘 발표될 공지가 게임 내에서 뭐였는지 반추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니스 재즈 클럽을 언급하는 메튜의 말에 성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제 누나가 그날 거길 갔었거든요. 성현씨한테 번호 줬다가 까였다던데요?”
메튜는 진심으로 흥미롭다는 듯이 성현을 보면서 웃었다.
요근래 누나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그런데 클럽에서 어느 피아노를 잘 치는 동양인에게 까였다는 소식을 들은 메튜가 놀라서 물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누구라고? 확실해?’
‘그래. 마지막에는 팬사인회가 열리기까지 했다고.’
그 동양인의 정체를 캐묻자, 밝혀진 사실은 놀라웠다.
바로, 자신이 눈여겨보고 있던 한국인 참가자 이성현이었던 것.
메튜의 말에 임하나와 천소울은 모두 놀라서 성현을 쳐다봤다.
“번호 같은 거 따인 적 없다면서요?”
“번호요?”
성현은 두 사람의 물음에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하나와 천소울의 눈에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말 안 해준거냐는 서운함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발견한 포식자의 눈이었다.
메튜는 분위기를 살피더니 뭐가 문제인 건가 싶어 셋을 번갈아 봤다.
“내가 당신을 난처하게 만든 건가요?”
“아닙니다. 그, 누나 일은 미안해요. 그냥 당장 제가 누굴 만날 시간이 없어서요.”
성현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일단 메튜가 더 이상 그 클럽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둬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런데 이어진 메튜의 말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괜찮아요. 누나 말론 성현씨가 아만다 까는 거 보고 이미 까일 거라고 예상했데요.”
메튜의 말에 천소울과 임하나는 또 놀라서 성현을 돌아봤다.
“번호 물어본 게 한 명이 아니었어요?!”
“노래 들으러 갔다더니 여자 만나러 간 거였습니까?”
“성현씨, 인기 많네요!”
외국 클럽 분위기는 어떠냐고 물어오는 임하나와, 음악으로 여자를 꼬시려고 했냐는 듯 불신이 가득 담긴 천소울의 눈초리.
“그게 그러니까 음악을 들으러 간 건 맞긴 한데.....”
성현은 그 사이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흐렸다.
메튜는 자신이 무슨 상황을 만든 건지 모른 채 그저 천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궁금한데 제프 제안은 왜 거절한 거예요? 오디션 끝나고 합류해도 된다고 했다면서요. 제프 밴드면 엄청 유명한 재즈 밴드잖아요. 거절한 이유가 있나요?”
메튜의 말에 천소울과 임하나는 이번에는 입까지 벌어졌다.
“재즈 밴드 합류 제안을 받았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성현씨.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설명을 해주시죠?”
“아, 하, 하하......”
성현은 이제 도망갈 구석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임하나와 천소울이 점차 목소리를 높여 따져 물었다.
그 소란에 주변에 있던 다른 나라 참가자들도 상황이 궁금한지 시선이 쏠렸다.
곧 모두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그중에는 몇몇 재즈를 듣는 참가자들이 밴드 이름을 알아듣고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거기 엄청 유명한 밴드 아니야? 해외 투어도 갈 거라고 들었는데.”
“제프가 직접 제안했대.”
성현은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까지 모이자 당황해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이 상황은 공연장 문이 열리면서 등장한 리키 헨더슨 덕에 정리되었다.
성현은 그의 등장을 보고 반가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튜는 난감한 성현을 구경하다가 아쉽다는 듯 미국 일행이 모인 곳으로 돌아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미션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좋은 결과 있길 바라겠습니다.”
리키 헨더슨은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 밝은 모습에 참가자들도 하나둘 마주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리키 핸더슨의 무시무시한 뒷말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번 본선 7라운드 미션은 오직 무대로만 평가되며 10개 나라 중 5개의 나라의 참가자들은 전원 탈락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