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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08화 (208/273)

208화

“죄송해요. 다른 분인 줄 알고.”

성현은 제프인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다행이네. 벌써 거절하나 싶어서 심장이 다 내려앉았다고.”

제프의 말에 성현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되물었다.

“저한테 뭐 부탁할 게 있나 봐요?”

성현의 물음에 제프는 멤버들과 눈을 맞추더니 이내 입을 뗐다.

“있어요. 부탁.”

“뭔데요?”

성현의 물음에 제프는 잠시 말이 없더니 톰과 시선을 교환했다.

톰은 진지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전에 질문. 재즈 언제부터 했어요? 취미로 한 실력은 절대 아닌 거 같은데.”

“재즈를 전공으로 배운 건 아니고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하면서 배웠어요.”

동아리? 그럼 취미로?

성현의 대답에 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데 그렇게 잘한다고? 설마 대학교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운 건 아니죠?”

“그건 아니에요. 피아노는 발걸음 떼면서부터 배웠으니까.”

성현의 말에 제프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클래식?”

“네. 아버지께서 피아노 애호가라서요.”

“어쩐지. 기본이 탄탄하더라.”

제프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이거, 잘못하면 설득하기 어려워지겠는데.

반대로, 톰은 상당한 안정감을 느꼈는지 표정이 편안해졌다.

“톰, 너 되게 안심한 표정이다?”

그걸 눈치챈 아만다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동아리에서 배운 피아노로 이렇게 잘하는 거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없을 거 아니야.”

톰은 뾰로통한 어조로 툴툴거렸다.

아만다는 그런 톰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누가 마음대로 밴드를 떠나래?”

“할아버지가 아프신데 어떡해. 나한텐 부모님이랑 다름없는 분이라고.”

아만다와 톰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이어가는데, 성현이 의아해서 제프를 봤다.

듣자하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떠난다는 게 밴드 활동을 잠시 못하게 된다는 뜻인가요?”

“네. 그래서 이성현씨 당신이 필요해요.”

성현이 제프의 말뜻을 이해 못 하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제프는 그런 성현을 마주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랑 같이 음악 하지 않을래요?”

“같이 음악을 한다뇨......?”

성현은 제프의 제안이 혹시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싶어서 되물었다.

이곳 베니스 재즈 클럽의 무대에 섰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니었다.

분명 제프의 밴드가 뛰어난 실력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 그들이 딱 한 번 무대를 함께한 사람에게 활동을 제안한다?

결코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톰 대신 우리 밴드 피아노를 맡아달란 소리예요.”

“제가요?”

연이어 이어지는 제프의 제안에 성현은 놀라서 되물었다.

계속되는 성현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린 것은 제프였다.

“너무 어렵게 말했어요, 내가? 왜 자꾸 되묻지?”

솔직히 자신들의 제안에 성현이 바로 좋다고 할 줄 알았기에 제프는 성현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서요.”

당연히 성현은 지금 제프의 제안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다만, 그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다.

“저랑은 방금 딱 한 번 무대를 같이했고 당신들 정도의 밴드라면 더 좋은 피아니스트를 구할 수 있지 않나요?”

성현의 질문에 제프와 멤버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하나는 명확했다.

눈앞의 이 잘생긴 동양인이 세상을 헛살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럼 저 성격에 알면서 묻겠어? 잘생긴 데다 겸손하기까지. 정말 딱 내 이상형인데.”

성현은 여전히 그들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아 멀뚱히 볼 뿐이었다.

톰이 성현의 어깨에 손을 척 하고 올리더니 말했다.

“당신 정도 실력자는 이 바닥에서도 찾기 힘들어요.”

“그런......”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는 성현의 입을 쉬, 하고 막은 톰이 씨익 웃었다.

“단순히 악기를 잘 다루는 게 아니라 재즈를 하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그건 신이 내려준 재능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프가 당신을 탐내는 거예요. 제프의 재능은 신이 내린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이거든요.”

톰의 말에 제프가 그걸 알면 나를 좀더 칭송하라며 투덜거렸다.

물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요. 제프가 인정했다는 건 정말 재능이 있단 거니까 겸손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우리랑 조금만 더 무대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될 거예요. 죽여주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라구요.”

아만다의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제프가 덧붙였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곧 음반 작업도 병행하게 될 거예요. 톰이 이 엄청난 기회를 뻥 차고 떠나는 건 아쉽지만 당신이 합류하면 오히려 우리한텐 잘된 일이 될 것 같네요.”

옆에서 듣던 톰이 충격을 먹은 얼굴로 말했다.

“제프, 나 아직 안 떠났어. 다 듣고 있다고.”

제프와 멤버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농담이 오고 갔다.

그들 모두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하며 그 자체로 즐거워 보였다.

‘이런 삶도 좋은 것 같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성현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날 만큼.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소규모 공연을 하는 삶.

무대가 끝난 뒤에 관객들과 소통하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 있는 삶.

이것도 어쩐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당신의 결정만 남았어요.”

제프가 자신의 명함을 성현에게 넘기며 말했다.

“당장 대답하긴 곤란할 테니 생각을 해보고 이번 주 안으로 연락줘요.”

“이건 내 명함. 마음 바뀌면 연락줘요. 난 꼭 당신이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제프와 아만다는 각자 자신의 명함을 건네고 돌아섰다.

그들이 채 클럽을 나서기 전, 성현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대답, 지금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성현의 빠른 결정에 제프와 아만다는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왔다.

당연히 성현이 오케이를 할 거라 생각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의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의 당당한 표정은 곧 돌아온 성현의 대답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두 분 다 거절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현은 허리를 숙여 사과하며 말했다.

단칼에 나온 거절에 제프와 아만다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며 성현 가까이 저돌적으로 걸어갔다.

“왜요? 이유는 알려줄 수 있잖아.”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흥분한 제프를 제치고 아만다가 나섰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다시 한번 잘 보라며 성현의 앞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나도. 왜 날 까는 거지? 나 매력 없어요?”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소규모 공연을 한 번 할 때마다 아만다가 받아드는 쪽지와 명함은 수십 개.

게다가 추종자 무리까지 있을 정도로 아만다의 인기는 알아주었다.

몇 년 만에 먼저 대시를 했건만, 이렇게 맥없이 거절 당할 줄은 몰랐다.

각자 다른 이유로 납득할 수 없어 성현에게 따지는 두 사람을 본 성현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진정하라는 성현의 제스처에도 그들은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성현은 그들의 기세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일도 연애도 당장 여유가 없어요. 하는 일이 너무 바쁘거든요.”

아까부터 나온 말.

자신이 너무 바빠서 그렇다.

제프와 아만다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그러니까 그 일이 무슨 일인데?”

“아주 엄청난 일이여야 할 거예요.”

아만다는 자신을 두 번이나 찬 성현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조금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성현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 프로듀서로 참가 중이거든요.”

성현의 말에 밴드 멤버들은 모두 멈칫했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 내가 하는 그 더 넥스트 슈퍼스타?!”

“네.”

“미친.”

아만다는 f로 시작하는 비속어를 숨기지 못하고 내뱉었다.

충격을 받은 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지금 전 세계에서 40명도 못 살아남지 않았나? 근데 그중 한 명이라고?”

제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물었다.

거기에도 성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네.”

사실은 38명 중에서도 절반 정도가 떨어졌지만, 지금 그것까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델 영상! 거기 나왔던 사람이네!”

성현의 말에 조용히 휴대폰으로 성현을 검색하던 톰이 흥분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바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성현을 쳐다봤다.

이내 다들 성현을 알아본 듯 여기저기서 성현의 이름을 불렀다.

클럽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영상 보고 병원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대요. 고맙습니다, 정말.”

톰은 성현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듯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보내줄 사진을 함께 찍자고 제안했다.

성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재즈바의 손님들이 하 둘씩 몰려들었다.

성현에게 사진과 사인 요청이 쇄도했다.

결국 여유를 즐기러 왔던 것과 달리, 성현은 작은 팬사인회를 열고 나서야 호텔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스튜디오에서 성현은 곡 작업에 몰두 중이었다.

스튜디오 문이 열리더니 천소울과 임하나가 들어왔다.

성현은 인기척에 작업을 중단하고, 어쩐지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두 사람을 향해 밝게 웃으며 동료들을 맞이했다.

“다들 잘 쉬다 왔어요?”

“네! 호텔에서 스파 가고 마사지 받고 혼자 플렉스하고 놀았어요.”

임하나는 확실히 어제보다 더 밝은 표정이었다.

천소울 역시 한숨 돌린 듯 후련해 보였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천소울은 쇼핑백 두 개를 임하나와 성현에게 건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이게 뭐예요?”

“아버지가 직접 담근 건데 연습 미뤄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선물?

두 사람은 바로 천소울이 준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투명한 유리병 속에 레몬과 생강 슬라이스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레몬생강청인데 목에 좋다고 하니 시간 날 때 챙겨 드시면 됩니다.”

“아버지께서 이런 것도 담가요?”

정성에 놀란 성현이 감탄하며 물었다.

레몬과 생강.

목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혼자 사신지 7년이 넘어가니 웬만한 건 직접 다 해 드세요.”

천소울은 제가 다 뿌듯한 표정으로 아닌 척 덤덤하게 말했다.

“와. 향 너무 좋다. 정말 너무 감사하다고 꼭 전해줘요. 또 내 인사만 쏙 빼놓고 전달하지 말고. 알았죠?”

“알았어요.”

천소울은 임하나의 당부에 귀찮은 듯이 말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미안한데 그거 좀 들고 사진 좀 찍읍시다.”

“왜요?”

임하나는 의뭉스럽다는 듯이 천소울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주저하던 천소울이 입을 뗐다 다물었다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인증샷 보내줘야 합니다.”

천소울이 조금 부끄럽다는 듯 말하자, 임하나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푸하! 인증샷이래!”

“......”

천소울은 자신도 부끄러운지 별말 못하고 성현을 도와달라는 듯 쳐다봤다.

성현은 달아오른 천소울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역시 파파보이가 맞네요.”

“큭, 아, 파파보이! 맞네!”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더욱 크게 웃음이 터졌다.

연습실은 곧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찰칵.

“아, 웃겨. 아니. 잠깐만, 지금 정신없이 웃고 있는데 찍은 거예요?”

“아버지한테 보내드릴 겁니다.”

“다시 찍어요! 성현씨!”

하루의 휴식이었지만 세 사람 모두에게 값진 시간이었다.

짧았던 휴식이 세 사람의 웃음소리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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