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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07화 (207/273)

207화

“아쉽지만 오늘 준비한 마지막 곡이 끝났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그들이 준비한 마지막 곡까지 끝나고 말았다.

‘벌써 끝났구나.’

성현은 아쉬움에 괜히 빈 맥주병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마지막 곡을 끝낸 밴드는 곧장 무대를 내려가지 않고 관객들 사이 누군가를 찾았다.

마이크를 든 남성은 아아, 아직 마이크가 작동되는 것을 확인하더니 목청을 키웠다.

“아까 탭댄스 추시던 할머니 어딨나요?”

마이크를 든 남성, 제프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번쩍 손을 들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환히 웃은 제프가 말했다.

“춤 완전 잘 추시던데요? 저도 할머니한테 좀 배워야겠어요.”

제프가 박수를 쳐주며 말하자, 관객들도 따라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외간 남자랑 만나는 거 우리 영감이 알면 큰일 나!”

“이런, 아쉬워요.”

제프는 짐짓 아쉽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내 폰 번호 알려줄게. 은밀하게 연락해.”

할머니의 재치 있는 대답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관객들에게 치마를 들어 보이며 우아하게 무대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제프 조심해. 할아버지 알면 넌 뼈도 못 추릴 거야. 넌 고양이랑 싸워도 지잖아.”

“말조심해. 네가 잘 모르나 본데 고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녀석이라고.”

아만다와 제프의 농담에 사람들 모두 재밌어 하며 웃었다.

밴드는 그렇게 한동안 관객들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이대로 집 가긴 좀 아쉽지 않아? 오늘 공연 분위기 죽여줬잖아.”

건반 앞에 앉아있던 톰이 고개를 저어가며 소리쳤다.

“이대로 안 가면 뭘 더 하고 싶은데?”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

아만다의 물음에 제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신 대답하더니 이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번에도?”

못 말린다는 듯한 아만다의 반응에도 제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재즈가 뭐겠어. 이게 재즈지.”

제프는 그 말을 하며 마이크를 잡더니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이대로 가긴 아쉬워서 공연을 좀 더 이어가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들 중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나요? 있으면 손들어 주세요.”

제프의 물음과 동시에 객석에 있던 사람들은 옆 사람을 힐끗거렸다.

혹시 손을 드는 사람이 있나 눈치를 보는데 그 누구도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엄청 잘할 필요 없어요. 함께 무대를 하는 것 자체가 특별한 거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무나 손을 좀 들어줘요.”

제프가 애원하듯 말하지만, 객석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맙소사. 재즈 공연을 보러 오신 이 많은 분들 중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이 한 명도 없단 말이에요?”

제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내 한 여자가 그에게 소리쳤다.

“저기 저 사람이요! 악기를 다룰 줄 아나 봐요.”

여자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밝은 얼굴이 된 제프가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손을 들고 있는 성현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성현에게로 쏠렸다.

쿵, 쿵.

지금껏 어떤 무대에 올랐을 때보다 더 떨리는 마음에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꿈에서만 그리던 무대에 오를 기회가 찾아왔다.

성현은 에라 모르겠다 손을 들고 말았다.

오늘 일은 김동율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냥 그의 본능이 이끌었을 뿐이었다.

지금 손을 들지 않으면, 성현은 그 어느 때보다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제프는 큰 소리로 성현을 무대로 부르고는 자신도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제프를 따라 성현 역시 낮은 단차의 무대에 성큼 올라섰다.

“짧게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제프가 마이크를 성현에게 넘겼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이성현입니다.”

성현은 유창한 발음으로 베니스 재즈 클럽 손님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의 참가자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만큼은 더 넥스트 슈퍼스타 참가자가 아닌, 재즈를 사랑하는 음악인이고 싶었기 때문에.

“혼자 왔어요?”

가만히 있던 아만다가 은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제프가 그 모습을 보고 뾰족하게 받아쳤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아만다?”

“잘생겼으니까.”

아만다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대답한 뒤 다시 성현을 봤다.

“대답해줘요. 혼자 왔어요?”

갑작스러운 아만다의 질문에 성현은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대답했다.

“네, 혼자 왔습니다.”

“끝나고 나랑 데이트할래요?”

아만다의 돌직구에 객석에 있는 사람들이 크게 환호했다.

성현은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외국인들은 원래 이런가? 마음에 든다고 사람들 보는 데서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성현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바빠서요.”

“아쉽네. 내 스타일인데.”

아만다는 성현의 거절에 더는 매달리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재즈 밴드의 멤버들은 이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마치 성현을 무슨 희귀종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훑는 제프와 톰.

“이거 놀라운데? 아만다 데이트 신청을 깐 건 당신이 처음이거든. 혹시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어요?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건가?”

마음에 둔 사람이라......

성현은 그 말에 씨익 웃으며 이렇게 받아쳤다.

“사람은 아니고 음악이요. 전 음악이랑 결혼했거든요.”

성현의 농담에 밴드와 객석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제프는 성현의 대답에 흥미롭다는 듯 성현을 쳐다봤다.

“음악 듣는 걸 좋아하나 봐. 결혼까지 할 정도면.”

제프의 말에 성현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음악을 듣는 것과 만드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자신에게 매력적인가.

어느 것 하나를 고를 수 없는 어려운 난제였다.

‘각자 매력이 다르긴 한데.’

성현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제프가 성현을 다시 불렀다.

그제야 성현은 자신이 지금 무대에 올라온 상황이라는 것을 환기했다.

“악기는 어떤 걸 다룰 줄 알아요?”

밴드 멤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성현을 훑었다.

순수하게 성현의 음악적 역량을 궁금하게 여기는 모습.

바로 얼마 전, UCLA에서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던 학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관심이었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 오디션 참가자가 아무런 연이 없어 보이는 UCLA에서 공연을 한다는 말에 몰려온 학생들.

그들 역시 마지막에는 성현에게 팬심을 드러내며 열광하긴 했지만.

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피아노요. 드럼도 조금 다룰 줄 알긴 하지만 피아노를 가장 잘 칩니다.”

가장 잘, 이라는 말에 관객들과 밴드 멤버들이 작게 야유를 보냈다.

성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제프가 웃으며 물었다.

“자신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쳐줄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성현의 말에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아있던 톰이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성현은 바로 건반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짧게 숨을 가다듬은 뒤, 망설임 없이 건반 위 손가락을 움직였다.

성현이 택한 곡은 Frank Sinatra – Killing me softly

성현은 오랜만에 연주하는 재즈에 완전히 몰입했다.

어디 얼마나 하는지 보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서 있던 멤버들.

그들은 팔짱을 풀어야 했고, 짝다리를 짚고 있던 무릎이 절로 펴지는 것을 느꼈다.

노래를 듣던 제프를 비롯한 멤버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저러면서 조금 칠 줄 안다고 한 거야?”

“나보다 잘하는 거 같은데.”

“나 저 남자 꼭 잡아야겠어. 잘 생겼는데 재즈까지 잘한다니. 완벽한 내 이상형이야.”

제프는 어이가 없는지 성현의 현란한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봤고, 톰은 의기소침해져서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아만다만이 매력적이라며 성현을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성현은 멤버들이 자신을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 연주를 이어갔다.

멤버들은 모두 생각지 못한 성현의 연주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이제는 헛웃음이 나왔다.

“지저스.”

“저 남자 뭐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당연히 놀란 건 멤버들뿐만이 아니었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성현의 피아노 실력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가서 곡을 들었다.

휴대폰을 들어 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띵, 디링.

성현이 곡을 끝냈을 때,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

“한 곡 더!”

성현의 곡이 끝나기 무섭게 제프는 성현에게 한 곡 더를 외쳤다.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악기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성현은 자연스럽게 연주에 맞춰 멤버들과 즉흥으로 잼 연주를 했다.

객석에 있던 사람들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다시 처음 공연을 했던 때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아노를 치는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 처음 본 멤버들과 합주를 하는 거였지만, 전혀 긴장되거나 떨리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즐거워.’

성현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는 생각뿐이었다.

재즈 동아리 시절 동아리 사람들과 자유롭게 연주를 하던 과거가 생각나면서 짜릿했다.

오랜만에 하는 잼 연주에도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밴드 멤버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쳐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즐거운 걸 잊고 살았다니.’

성현은 오랜만에 하는 잼 연주에 빠져들어 열정적으로 건반을 눌렀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성현은 평소에도 호흡을 맞춰왔던 것처럼 멤버들과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멤버들과 몇 곡을 더 합을 맞추고 나서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성현이 무대에서 내려갈 때, 객석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보내왔다.

요란스러운 몇몇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고 성현에게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제 친구가 전해주래요. 당신 연주를 듣고 천국에 온 기분이었데요.”

시끌벅적한 환호를 받으며 자리에 돌아온 성현.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려 하는데, 갑자기 여자 하나가 맥주잔과 함께 냅킨을 건네왔다.

‘뭐지?’

성현은 얼결에 여자가 주는 맥주잔을 받아드는데, 같이 건네준 냅킨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제 친구 저쪽에 있는데 만나볼래요?”

여자가 자신의 친구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던 여자의 친구는 성현이 자신을 보는 걸 알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이를 본 성현은 난처한 마음에 웃기만 했다.

“미안해요. 지금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죠. 마음 바뀌면 연락 줘요.”

여자는 별말 없이 다시 친구에게 돌아갔다.

이후로도 몇 명의 여자가 성현의 테이블로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만 가볼까.’

성현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불가능한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또 성현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우리가 뭘 부탁할 줄 알고?”

성현은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곳에는 제프를 비롯한 그의 밴드 멤버들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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