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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06화 (206/273)

206화

세 사람에게 주어진 하루 동안의 자유시간.

성현은 일단 미뤄뒀던 작업을 조금 하다가 낮잠을 잤다.

오랜만에 갖는 꿈 같은 휴식에도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대가처럼, 풀리지 않는 피로가 성현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앞이.......’

이대로 호텔방에서 하루를 보내기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성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맞네.’

성현이 호텔에서 나왔을 땐 해가 저물어가는 초저녁이었다.

호텔에서 나온 성현이 곧장 향한 곳은 바로 베니스 비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비슷하게 생긴 비치로 유럽풍의 건물들과 벽화 같은 것들이 유명하며 예술과 자유가 있는 곳이었다.

성현은 지는 해를 보며 터벅터벅 해변가를 걸었다.

비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핑을 하는 서퍼들.

비치볼을 하는 사람들의 쾌활한 웃음소리.

머슬 비치에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

스케이팅을 타고 묘기를 부리는 보더들과 해변가에서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성현은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며 풍경을 구경하다 이내 뭔가 생각난다는 듯 사진을 찍었다.

제자리에 멈춰선 성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진을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이성현: 형 여기가 어디게요?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었지만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성현은 답장을 기다릴 겸, 웃으며 해변가를 걸으려고 했다.

지잉.

답장이 오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성현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김동율 형: 베니스 비치?! 야! 너 설마 거기 가려고?!

-이성현: 네. 그럼 서핑할 것도 아닌데 제가 여길 왜 왔겠어요.

성현은 상대방의 폭발적인 반응에 웃음을 터뜨리며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김동율 형: 와씨, 부러워 죽겠네. 너 TOP 7 올라간 것보다 거기 가는 게 더 부럽다.

-이성현: 알아요. 그래서 사진 보냈어요. 형 부러우시라고.

성현은 그렇게 말하며 방금 찍은 베니스 비치의 사진을 연달아 전송했다.

-김동율 형: 너 지금 복수하는 거냐?

-이성현: 네. 형도 동아리방에서 맨날 저한테 엄청 자랑했잖아요.

김동율.

그는 성현이 재즈 동아리 활동을 하던 당시 알게 된 선배였다.

성현이 오늘 베니스 비치에 오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음악이 음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성현의 음악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람이기도 했다.

-김동율 형: 너 이 새끼! 너 오랜만에 연락해 놓고선, 뭐? 형 약 올리려고 했다고?!

성현은 연달아 날아오는 김동율의 답장을 읽고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라이브 녹음해서 보내주면 깜짝 놀라겠지.’

성현은 김동율에게 보내줄 깜짝 선물을 생각하며 곧장 시내로 향했다.

이미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는 듯이 성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드디어 여길 와보네. 항상 말로만 들었던 곳인데.’

성현은 조금 설레는 마음을 안고 유럽풍의 건물들 사이 골목을 지났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드럼 스틱을 들고 깡통이나 드럼통을 치며 연주하는 길거리 연주가들.

언뜻 보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성현은 걷다가 걸음을 멈추며 공연을 구경했다.

골목 곳곳에 보이는 벽화들을 사진으로 찍으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해가 다 지고 나서야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름한 외관의 건물을 올려다보니 전광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Venice Jazz Club]

성현이 베니스 비치까지 온 이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베니스 재즈 클럽에 오기 위함이었다.

성현의 동아리 선배인 김동율은 항상 자신이 다녀갔던 전 세계 재즈바에 대해 자랑을 해댔다. 그중 단연코 그가 최고로 뽑는 곳이 바로 LA 베니스 비치에 위치한 베니스 재즈 클럽이었다.

좁은 동아리 방에서 그는 항상 그곳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공연 퀄리티도 퀄리티지만 그냥 음악을 즐기는 관객들 분위기가 너무 좋더라. 재즈를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지더라고. 황홀함. 난 태어나 처음으로 그곳에서 황홀감을 느꼈어.’

김동율의 말을 들었을 때 성현은 결심했다.

언젠가 꼭 이곳 베니스 재즈 클럽에 가봐야겠다고.

LA에서 본선을 치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곳도 이곳이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성현은 설렘을 안고 재즈 바 안으로 들어갔다.

***

바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좁고 긴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 속 바텐더가 위스키와 칵테일 등 주류를 제조 중이었다.

스탠딩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서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동율에게 들은 그대로의 분위기.

성현은 미소 지으며 바로 직행했다.

“맥주 한 잔 주세요.”

“뭘로?”

“쿠어스 라이트로요.”

바텐더는 성현에게 맥주를 건네주었다.

성현은 곧장 계산을 치르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 모양 전광판이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있다.’

그곳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이 클럽은 좁아 보이는 실내가 끝이 아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벽에는 이곳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진과 앨범들이 걸려 있었다.

성현은 5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재즈 아티스트의 사진들을 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성현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멈췄다.

Miles Davis - Kind Of Blue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앞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는 성현이 태어나 처음으로 산 재즈 앨범이었다.

‘감회가 새롭네.’

성현은 재즈를 처음 접했던 20살부터 24살까지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처음 마일스 베이비스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

그날 성현은 밤을 새우며 재즈 반주에 맞춰 피아노를 두들겨댔다.

이후로도 희귀한 재즈 앨범을 구하기 위해 성현은 뭐든지 했다.

집을 나온 상황에서도 없는 돈을 모아 일본이나 여러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내려갈 거예요?”

성현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지하 문에서 나온 남자가 성현에게 물었다.

계단이 좁았기 때문에 한 명이 먼저 지나가야 했다.

“네. 안에 공연하고 있나요?”

“방금 막 시작했어요. 빨리 가봐요. 완전 죽여주니까.”

성현의 물음에 상기된 표정의 남자가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남자는 얼른 들어가 보라며 지하 문을 세차게 가리켰다.

“근데 왜 당신은 죽여주는 공연을 앞에 두고 나가는 거죠?”

“와이프가 집에 안 오면 진짜 죽인다 해서요.”

남자는 아쉬운 듯 말하며 성현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성현은 곧장 지하 1층 내부로 들어갔다.

어두운 공연장 안, 무대에만 조명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그곳에서 피아노, 트럼펫, 색소폰, 콘트라베이스, 드럼 연주자들이 재즈 연주를 하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맥주를 쥔 손에서도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에 성현은 작게 몸을 떨었다.

지하 문이 열리기 전까지 들을 수 없었던 둔중한 베이스 드럼과 콘트라베이스의 화음.

그 위에 더해지는 화려한 연주에 성현은 곧장 홀린 듯 자리를 잡았다.

재즈를 감상하던 성현은 자연스럽게 재즈를 처음 접했던 20살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반주에 맞춰 재즈를 연주하던 김동율을 마주한 자신.

‘그때의 그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를 떠올릴 때면 팔뚝에 소름이 확 끼칠 정도였다.

‘이건 제대로 된 피아노가 아니라는 내 말에 바로 비웃음을 당했지.’

당시 성현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던 악보는 망가졌고, 제멋대로 음표들이 움직였다.

전혀 알지 못하던 멜로디가 덧붙여지고, 곡의 길이는 들쭉날쭉해졌다.

그럼에도 좋았다.

소름 끼치도록 즐거웠다.

그 감정을 숨기고 싶어서 악을 지르는 자신에게 김동율은 말했다.

‘너도 해볼래?’

클래식만 알던 성현이 처음 재즈를 접했을 때, 느꼈던 그 생생한 충격.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손가락.

제멋대로 강하게 때로는 두드리지 않는 듯 약하게 건반을 터치하는 자신의 손.

어느샌가 성현은 주워들은 채로 자신의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모든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음악가가 된 기분.

피아노를 치면서 자유롭다고 여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김동율을 비롯해 자신의 피아노를 듣고 있는 사람 중 누구 하나 틀렸다, 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인상을 쓰는 사람들도.

자신의 연주를 제대로 듣지 않고 딴생각에 빠진 이들도 없었다.

모두가 그저, 즐기고 있었다.

성현이 연주를 마쳤을 때, 김동율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같이 하자, 음악.’

김동율의 말에 성현은 자신이 바로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단지, 그 말에 희미한 구원을 받은 것 같다는 기억은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성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재즈를 감상했다.

그러던 성현은 왜 김동율이 이곳 베니스 재즈 바가 최고의 재즈바라고 했는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유롭다.’

잔잔하던 재즈의 리듬이 점차 거세어졌다.

그러자 재즈바를 찾은 많은 사람이 모두 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누가 시킨 것처럼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그들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재즈 리듬에 맞춰 그루브를 타며 춤을 췄다.

춤을 추기 위해 옷을 갖춰 사람도 있었고.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그들 모두 음악 자체에 심취해있다는 건 같았다.

그때 2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른 테이블에 있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며 춤을 청했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두 사람 함께 발을 맞춰가며 노래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80대가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탭댄스 신발을 신고 연주에 맞춰 탭댄스를 추기도 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흥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을 온몸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며 즐겼다.

그 모습을 보고 성현은 다시 한번 동아리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홀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관객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맞춰 재즈 밴드 또한 더욱 열정적으로 연주를 했다.

성현은 맥주를 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취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몇 개의 곡이 더 연주되고,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살짝 내려앉았다.

그때부터 편안하고 차분한 재즈 연주가 이어졌다.

조명 또한 이에 맞춰 조금 더 어두워졌다.

춤을 추던 사람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 노래를 감상하느라 적막에 휩싸였다.

성현 역시 맥주를 마시면서 여유롭게 노래를 감상했다.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렸으니까.’

아무리 음악을 즐긴다고 해도 오디션은 오디션.

제아무리 성현이라도 전혀 부담감이 없을 수 없었다.

의식적으로 부담감을 잊고 무시한다고 했어도, 오디션에서 오는 피로도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재충전을 위해 필요했던 건 잠이 아니라 지금의 여유인 거겠지.’

성현은 잠을 자도 풀리지 않던 피로감과 긴장을 이 시간을 통해 날려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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