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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05화 (205/273)

205화

“미션 준비 하루 미루죠. 회의 끝나고 저녁에 아버지랑 집 가세요.”

로비를 가로질러 호텔 입구에서 천소울을 붙잡은 성현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피해 주긴 싫습니다.”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대번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쯤은 예상한 성현은 천소울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말 들어요. 아버지 지금 이렇게 그냥 보내면 나중에 후회해요.”

그렇게 말하는 성현은 진지한 눈으로 천소울을 바라봤다.

천소울은 그런 성현의 모습에 멈칫했다.

천소울 역시 성현과 성현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알았다.

그리고 영국까지 날아온 이주성과 성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

천소울은 잠시 고민하더니 택시를 잡으려는 아버지한테 뛰어갔다.

택시까지 마중 나온 아들을 보고 손을 내저으며 그만 가보겠다며 택시 문을 여는 천소울 아버지의 모습.

그 택시 문을 직접 닫고 뭔가를 말하는 천소울의 모습.

결국, 천소울 아버지는 천소울과 함께 돌아왔다.

천소울 아버지는 성현을 보자마자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아닌가 몰라.”

지금 천소울의 아버지가 얼마나 미안해할지 훤히 보이기에, 성현은 그가 안심하도록 더욱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시간 적으로 여유 있어서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 두 분이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아가씨도 괜찮아요?”

어느새 뒤따라온 임하나는 자신에게 묻는 말에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네. 안 그래도 저도 하루 좀 쉬고 싶었는데 너무 잘됐죠. 아버님이 제 구세주예요.”

부러 더 너스레를 떨며 하는 임하나의 말에 그제야 천소울 아버지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구세주? 하하하. 귀여운 아가씨네.”

“맞아요. 제가 좀 귀여워요.”

뻔뻔하게 인정하는 임하나의 모습에 천소울의 아버지가 귀엽다는 듯이 더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사이에 천소울이 껴들었다.

“자뻑 그만하고 회의나 빨리 마무리 지읍시다.”

“자뻑아니고 팩트 거든요? 저 귀엽단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

임하나는 여느 때처럼 천소울과 티격태격하는데, 그때 얘길 듣고 있던 천소울의 아버지가 갑자기 호통을 쳤다.

“소울이 넌 숙녀한테 말이 그게 뭐냐. 얼른 사과 못 해?”

천소울의 아버지가 짐짓 근엄하게 말을 하자, 천소울은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임하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성현 역시 아버지 앞에서 바로 합죽이가 된 천소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천하의 천소울도 결국 부모님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항상 예의는 지키랬지. 사과해, 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천소울은 아버지 앞이기에 자존심 상하지만 한발 물러났다.

임하나는 이 상황이 상당히 재밌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아버님 집에 안 가면 안 돼요? 그냥 저희랑 계속 같이 지내요. 네?!”

임하나는 천소울을 향해 얄밉게 눈웃음을 치며 천소울의 아버지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천소울의 아버지 역시 그런 임하나의 싹싹한 모습에 쑥스러워하면서도 싫지 않은지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 걸었다.

“천소울씨 파파보이였어요?”

그 사이, 성현은 슬그머니 천소울의 옆으로 붙어 서며 물었다.

“파파보이가 몇 년을 아버지랑 떨어져 지냅니까? 아버지 없이 자랐단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이런 거에 조금 예민하셔서 맞춰드리는 것뿐입니다.”

천소울은 바로 틱틱거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벌써 저만치 앞서간 아버지와 임하나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듯이.

“뭐, 그렇다 쳐요. 파파보이씨 우리도 이만 가죠.”

성현은 천소울을 놀리며 자신 역시 발을 열심히 놀려 임하나의 뒤를 쫓았다.

저 멀리 둘을 남겨두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임하나의 모습이 포착된 탓이었다.

***

저녁을 먹고 세 사람은 성현의 방에 모여 간단하게 회의를 하기로 했다.

임하나와 성현은 먼저 탁자 앞에 앉아 얘기 중인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자, 마지막으로 천소울이 들어왔다.

“아버님은요?”

“피곤해서 방에서 잠깐 주무시려나 봐요.”

천소울이 임하나의 맞은편에 앉자 다시 회의가 진행됐다.

“본격적인 회의 진행 전에 두 분이 이번 공연을 통해 느꼈던 점을 자유롭게 말해주면 좋겠어요.”

언제나처럼 성현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직접 한인타운의 한국인들과 6.25 참전 용사들을 만나고 온 두 사람의 감상이 궁금했다.

“전 아직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주고 싶은 메시지가 맞는 건지 조금 헷갈려서요.”

“천소울씨는요? 시간 더 필요해요?”

성현의 시선에 천소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말하겠습니다.”

천소울은 잠시 자신의 아버지가 누워 있을 옆방 쪽으로 시선을 준 다음 말을 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미국에 가족 전체가 이민을 온 경우도 있지만, 저희 아버지처럼 혼자 떨어져 지내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전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소울이 한인 타운에서 받은 사연 중 대부분은 한국에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국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사연에 비해서는 그 수가 적었다.

그리고 기러기 아빠, 결혼하면서 한국에 두고 온 친정 부모님 등…….

헤어진 가족에 대한 사연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천소울은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돌아온 것이다.

“좋은 것 같아요.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들의 희생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겠네요.”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들의 부성애.

이는 한국인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제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슬그머니 손을 들고 끼어든 것은 임하나였다.

“음, 그런데 전 너무 개인적인 건 아닌가 걱정이 좀 되네요. 자식을 지키는 부모님들의 희생은 세계 공통적인 거긴 하지만 미국에 사는 기러기 아버지는 조금 특수한 경우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거라는 말도 있잖아요. 세계를 울릴 수 있는 곡이 존재하기 위해선 그전에 한 개인을 먼저 위로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봐요.”

성현은 위로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소 실감했다.

신현식의 음성을 복원하며 곡 놀이터에 피처링을 넣었던 경험.

처음으로 성현이 신현식의 예전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진한 위로.

꼭 특정 상황에 들어맞지 않더라도 음악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거다...... 저 본선 7라운드에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은지 정했어요.”

임하나는 그 말에서 뭔가 힌트를 얻었는지 자신감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 자리에서 처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 할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셨거든요.”

“아, 그래서 참전 용사들을 위한 공연을 하고 싶다 했던 거군요.”

천소울의 말에 임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지켜주신 분들에게 꼭 고맙다는 진심 어린 인사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미처 몰랐던 임하나의 결심.

두 사람은 나서서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겠다고 했던 임하나를 떠올렸다.

“진심 잘 전해드리고 왔어요?”

“음, 네. 그런 것 같아요. 프리먼 할아버지도 알게 되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낯선 이름에 성현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프리먼 할아버지요?”

“공연 도중에 한국 전쟁과 관련된 사연을 듣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의 주인공이 프리먼 할아버지였어요. 전 프리먼 할아버지의 사연을 주제로 하고 싶어요.”

임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프리먼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는지 임하나는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떤 사연인지 일단 들어봐도 될까요?”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참전 당시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을 때 우연히 한국 군인들을 만났대요. 그런데 그때 그분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노래를 부르면서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와 미국 군인들도 덩달아 힘을 내서 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더라구요.”

무려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게 만든 노래.

천소울은 차오르는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성급하게 물었다.

“어떤 노래길래 전쟁을 이겨낼 정도인 겁니까?”

임하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으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아리랑이요.”

“아......”

임하나 말에 성현과 천소울은 한동안 말없이 숙연해졌다.

아리랑이 담고 있는 한국인의 한.

전쟁통에서 그들은 조국의 한을 느낄 수 있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낸 것이다.

‘확실히 이번 특별 무대가 두 사람한테 이번 라운드를 위한 좋은 거름이 된 것 같아.’

성현은 두 사람의 생각을 꼼꼼하게 노트북에 받아적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천소울과 임하나는 각자 무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현은 이번 라운드 무대 또한 잘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성현과 임하나는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 중이었다.

“천소울씨는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요.”

“궁금해요?”

임하나는 성현이 아는 눈치를 보이자 놀라서 얼른 대답했다.

“네.”

“궁금하면 오백 원.”

“......”

이 두 남자들은 갈수록 어려지는 거 같아.

성현의 농담에 임하나는 표정을 굳히고, 궁시렁거리며 스프를 떠먹었다.

성현은 그런 임하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버지랑 오붓한 시간 보내고 있겠죠.”

“부럽다. 저도 아빠 보고 싶어요. 엄마도 보고 싶고......”

임하나는 외국에 온 이후 매일 부모님과 영상 통화를 했다.

그럼에도 휴대폰을 보고 대화를 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인가, 그녀는 부쩍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조금 우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향수병이 이런 식으로 오는 모양이었다.

성현은 여전히 우울함이 가시지 않은 임하나의 표정을 살피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나씨, 오늘 뭐 할 거예요? 저랑 바람 쐬러 갈래요?”

축 처진 임하나의 기분을 조금 띄워주고 싶어 제안했건만, 임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 보내고 싶어요.”

“무슨 고민 있는 건 아니죠?”

“고민은 무슨. 고민 생기기 전에 성현씨가 다 해결해줘서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이따가 부모님이랑 영상 통화도 하기로 해서 호텔에 있고 싶어요.”

“......정말 괜찮은 거죠?”

성현은 임하나가 걱정되는 마음에 재차 물었다.

그 모습에 임하나는 걱정 말라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우리 너무 붙어 있었어요. 오늘은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성현씨는 제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시면 돼요.”

선언하듯이 제안하는 임하나를 살피던 성현은 별수 없다는 듯이 수긍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알겠죠?”

“무슨 일 없어도 전화할게요. 됐죠?”

“그것도 괜찮네요.”

뭐라 해도 걱정할 성현을 알기에 임하나가 못을 박듯이 말했다.

그 말에 성현은 임하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두 사람 기분 좋게 조식을 먹고 각자 호텔방으로 헤어졌다.

세 사람에게 주어진 평화로운 시간, 성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호텔을 나섰다.

왜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성현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오늘 밤, 특별한 경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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