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마이크를 잡은 할아버지는 힘겹게 일어나더니 임하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단 오늘 이 자릴 만들어준 임하나씨한테 고맙단 말씀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살아온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임하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황송해하며 허리를 숙였다.
“제가 더 감사하죠.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우리 집이 여기서 차로 네 시간 걸리거든. 올까 말까 했는데 리무진 보내준 준대서 온 거예요. 이럴 때 아니면 리무진을 언제 타보겠나. 하하.”
할아버지의 말에 다른 참전 용사들 모두 작게 웃었다.
그 덕분에 엄숙했던 분위기도 풀어졌다.
할아버지는 한바탕 웃음이 가지자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에,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손을 들었어요.”
서 있는 것이 위태로워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임하나는 재빠르게 말했다.
“아, 그럼 무대로 올라오시겠어요? 거기 계시는 스탭분들이 할아버지 부축 좀 해주시겠어요?”
임하나의 말에 스탭들이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무대에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내가 한국 전쟁 당시에 한국 군인들한테 참 고마운 일이 있어서 그 말을 이 자리에서 꼭 해주고 싶었어요.”
“고마운 일이요?”
할아버지는 곁에 선 임하나 손을 꼭 붙잡더니 생각에 잠긴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계속되는 전투에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였습니다.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가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한국 군인들을 만나게 됐어요.”
놀란 임하나는 할아버지를 응시하며 물었다.
“설마 저희 할아버진 아니겠죠?”
“아닐 겁니다. 그 양반은 성은 김씨였거든. 아가씨 성은 임씨잖아.”
기적같은 우연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임하나는 다른 지점에서 크게 놀랐다.
“아직까지 성을 기억하세요?”
벌써 몇십 년 전의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잠시 마주쳤다던 동방의 작은 나라 군인의 성씨를 기억한다니......
“사실 찍은 거야. 한국엔 김씨가 제일 많잖아요. 마을 전체가 김씨인 곳도 있더라고.”
또 한 번 감동이 와장창 깨졌다.
임하나는 생각보다 유쾌한 할아버지의 등장에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한국에 김씨가 많긴 해요.”
“아무튼 한국 군인들 대단했어. 우리보다 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항상 웃으면서 노래까지 부르더라고.”
노래라니?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도 전해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에 임하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노래요?”
“그래. 그때 그 노래 때문에 미국 군인들까지 힘을 내서 버틸 수 있었어요.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김씨 군인들과 한국의 노래 덕분이라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한국의 노래......
아마 전시상황에 말도 통하지 않는 국적이 다른 군인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뭉치게 해주었던 것이 다름 아닌 노래라니.
“혹시 어떤 노래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목은 기억 안 나는데 조국의 혼이 담긴 노래라고 했어요.”
조국의 혼.
그 정도 힌트로는 당장 떠오르는 노래가 없었다.
임하나는 재촉하듯이 할아버지의 노래를 말없이 응시하며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허밍으로 노래를 불렀다.
객석에서도 할아버지의 허밍에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임하나는 곧 할아버지가 부르는 노래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노래.
“아리랑. 할아버지가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에요.”
“아리랑...... 이름이 참 예쁘네요.”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수 십 년이 지나, 자신의 손으로 지킨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서 드디어 알게 된 노래의 제목.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아리랑을 읊조렸다.
임하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몇 번 입 안으로 웅얼거린 다음 마이크를 잡았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오... 오......!”
임하나의 선창에 아리랑을 들어본 적 있는 참전 용사들이 웅얼거리며 노래를 따라했다.
“이게 지역마다 되게 다양하거든요. 제가 몇 개 모르는데 그거라도 한 소절 불러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임하나는 경기 아리랑, 밀양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을 차례로 불렀다.
전곡의 가사를 알지 못해서 짧은 후렴구만 부르기도 했고, 1절만 부르는 아리랑도 있었다.
그것뿐인데도, 무대에 올라와 있던 할아버지와 객석에 있는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리랑이 끝이 나자, 스탭의 인도로 할아버지가 객석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임하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후, 한국과 관련된 사연을 들으며 몇 곡을 더 불렀다.
이제 마지막 곡만을 남겨둔 상황.
“마지막으로 부를 곡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입니다.”
미국의 국민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는 삶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 충만함에 대해 노래하는 곡이었다.
임하나는 이것을 여자 버전으로 편곡하여 피아노 반주에 맞춰 차분히 불러나갔다.
“And now the end is near 이제 끝이 보여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내 삶의 마지막 커튼이 내려가네
My friend, I'll say it clear 친구여, 확실히 말할 게 있어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내가 잘알 고 있는 걸 말하겠네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난 충만한 인생을 살았어”
평소 소울풀한 노래를 주로 하는 임하나였지만 이번 노래만큼은 달랐다.
힘을 빼고 말하듯 가사 전달에 집중하는 임하나의 모습에 참전 용사들 모두 노래에 몰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Yes, It was my way.”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구절을 불렀을 때 참전 용사들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내며 공연이 마무리됐다.
***
UCLA 대학의 야외 공연장.
그곳에서 성현이 작은 연주회를 열었다.
천소울과 임하나 없이 성현만이 참석한 공연이지만, 어느새 소문이 쫙 퍼졌는지 공연장 객석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야외 공연장이기에 자리에 앉지 못한 관객들이 공연장을 빙 둘러서서 구경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김인호가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성현은 마지막 곡을 끝내고 피아노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며, 성현의 무대 또한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멤버들한테 연락 온 거 있나요? 지금쯤 공연 끝났을 때 된 거 같은데.”
성현은 객석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잊지 않으며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김인호를 향해 묻자 김인호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안 그래도 두 사람 다 공연 잘 끝냈다고 연락 왔어요.”
“다행이네요. 바로 호텔로 가면 되는 건가요?”
“네. 주차장에 차 대기시켜 놨다니까 가시죠.”
김인호는 카메라를 챙겨서 성현과 함께 미리 도착해있던 차에 올라탔다.
***
모든 공연이 끝나고 호텔 앞에 내린 성현.
지체없이 로비로 향하자 그곳에는 임하나와 천소울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곁에 처음 보는 중년의 남성이 함께였다.
남자는 천소울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키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지? 관계자는 아닌 거 같은데.’
성현이 곧장 멤버들에게 다가가니 천소울은 곧장 남자에게 성현을 소개했다.
“아까 말씀드렸던 프로듀서 이성현씨예요.”
천소울의 말에 성현은 일단 인사를 건넸다.
그런 성현은 이어지는 천소울의 말에 깜짝 놀라 허리를 펴고 말았다.
“아, 그 너랑 음악 같이 한다는 동료? 반가워요. 아들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 아들이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죠?”
‘아들? 그럼 이분이 천소울씨 아버지......?’
천소울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성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성현은 순간 당황하지만 이내 두 손으로 그와 악수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성현입니다. 그리고 신세는 천소울씨가 아니라 제가 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그냥 간다는 데 이 녀석이 꼭 인사를 시켜주겠다 해서.”
성현은 그 말에 천소울을 쳐다보자 스윽 시선을 돌리는 천소울.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은 성현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시는 줄 알았으면 좋은 식당이라도 예약해 놨을 텐데. 바로 가실 건 아니죠? 식사 드시고 가세요. 당장 좋은 덴 예약 못하더라도 괜찮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바쁜 것 같은데 인사도 했겠다 난 이만 가볼게요.”
천소울 아버지의 말에 성현이 놀라서 물었다.
“벌써 가시게요?”
“아들 녀석 얼굴도 보고 몇 없는 친구 소개도 받았고 할 건 다 했으니 가봐야죠.”
“들어가 보세요.”
천소울의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정말 쿨하게 돌아가고, 천소울 또한 딱히 그를 잡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옆에 있는 임하나만 안절부절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성현을 쳐다봤다.
성현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진짜 이대로 헤어지는 거예요? 무슨 일 년 만에 만났다는 부자가 어제 만난 것처럼 쿨해요?”
임하나의 말에 성현이 정신이 돌아왔다.
일 년?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일 년 만에 만난 거라뇨?”
“저도 방금 들은 건데 소울씨 아버지가 미국에서 작은 사업을 하신대요. 처음엔 가족들 다 같이 왔다가 이런저런 문제로 가족들만 한국에 보내고 7년째 혼자 계신대요.”
“......7년이요?”
생각보다 꽤 긴 시간에 놀라 되묻는 성현을 향해 임하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단하죠? 일 년에 한 번 한국 가시긴 하는데 소울씨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래요.”
성현은 임하나 말을 들으며 호텔 밖까지 아버지를 배웅해주는 천소울과 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어쩐지 자신이 먼저 한인 타운에 가겠다고 하더라니.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들려주고 싶단 사람이 아버지였구나.’
천소울이 말했던 자신의 노래를 들었으면 하는 사람.
바로 오래 떨어져 살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미국에 혼자 떨어져 사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사실 이건 성현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게임으로 숱하게 천소울을 만나 왔지만, 그의 가족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현실에서 직접 만난 천소울의 또 다른 이면.
‘그래서 한인들을 위한 무대를 하겠다 한 거였어.’
성현은 자신 또한 많은 일을 겪은 후, 아버지와의 관계가 애틋하기에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천소울이 그의 아버지를 보내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천소울씨!”
성현은 결국 호텔에서 벗어나는 천소울과 그의 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러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