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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90화 (190/273)

190화

임하나가 주문한 음식들과 술이 서빙되었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 우승을 위하여!”

“위하여!”

셋은 커다랗고 차가운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천소울씨는 왜 안 하세요?”

“당연한 소리니까요.”

무표정으로 나온 천소울의 뻔뻔한 소리에 임하나의 입이 벌어졌다.

아니,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서 그런 건가?

임하나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일단 깊고 고소한 아이리쉬 맥주의 맛을 즐기기로 했다.

“포테이토 맛있네요. 하나씨.”

“그쵸! 이게 제일 평이 좋았어요. 하나 더 시킬까요?”

“먹고 시키죠.”

세 사람 모두 음식을 즐기면서 오랜만에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임하나는 앞에 있는 흑맥주 잔을 비우며 조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뗐다.

“외국 와서 제일 좋았던 건 맛있는 음식이나 술 때문이 아니라 공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분위기요?”

성현의 질문에 임하나가 감자 한 조각을 집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한국에서 버스킹 문화가 있긴 하지만 여긴 정말 뭐랄까, 음악 자체를 온몸으로 즐긴다고 할까. 한국에선 버스킹 공연 보면서 춤추거나 그림을 그리지는 않잖아요.”

체스터 시계탑 광장과 오늘 그래프턴 스트릿에서 만난 관중들.

모두들 자유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즐겼다.

임하나는 이번 공연을 통해 느꼈던 점을 진솔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천소울은 그런 임하나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천소울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낀 임하나는 조금 얼굴이 빨개졌다.

저 얼굴로 사람을 저렇게 들여다보는 건, 반칙이지.

“왜,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냥요.”

“왜요. 또 왜 그러는데.”

이쯤되니, 임하나는 달아오른 얼굴이 서서히 식는 것을 느꼈다.

천소울이 또 무슨 말을 꺼낼지 가늠이 안 되기에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아니 그냥 이 정도면 인지 부조화가 아닌가 싶어서요.”

“인지 부조화라뇨?”

발끈한 임하나의 질문에 천소울의 시선은 테이블 위 빈 맥주잔과 음식 접시로 향했다.

어느새 임하나가 잔뜩 주문한 음식과 맥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외국 와서 좋았던 점이 음식이나 술 때문이 아니라는 사람치고는 너무 싹싹 긁어 드셨네요.”

반짝이는 빈 그릇 앞에서 임하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저 혼자 먹은 거 아니고 서, 성현씨도 먹었거든요?”

임하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성현을 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한두 개 정도 집어 먹고 만 성현은 그런 둘의 모습이 귀여워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천소울씨 요즘 제가 만만하죠? 왜 저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성현의 도움이 영 요원하다고 여겼는지, 임하나는 자신이 직접 천소울에게 부딪혔다.

“임하나씨 반응이 재밌으니까요.”

“전 재미 없거든요?!”

임하나는 살짝 술에 취해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빽 외쳤다.

그 소리에 성현의 바로 옆 테이블 남자들이 성현이 있는 테이블 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해. 목소리 너무 컸나 봐요.”

갑자기 옆 테이블에 있던 덩치가 큰, 문신을 한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에 임하나는 조급 겁을 먹고 속삭였다.

성현의 테이블로 점점 다가오는 남자는 뒤로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뒤에 뭐 숨기고 있는 거예요? 여, 여기 총기 소지 돼요?”

임하나는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겁에 질렸다.

이내 성현의 테이블에 도착한 남자, 뒤에 숨기고 있던 걸 꺼내 드는데.

펜과 종이다.

“…….”

“…….”

임하나를 비롯한 성현과 천소울, 모두 당황해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셋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 아델 SNS에 올라온 사람들 맞나요?”

“네,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싸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남자는 성현의 일행을 알아보고 싸인 요청을 하러 온 거였다.

수줍게 펜을 내미는 남자의 모습에 성현은 흔쾌히 손을 뻗어 받아들였다.

“물론이죠.”

성현은 싱긋 웃으며 싸인을 해주었다.

정신을 차린 임하나와 천소울 역시 남자에게 싸인을 해주자, 신이 난 남자 함께 온 일행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것 봐! 내가 맞다고 했지!”

남자의 외침에 한 남자가 이마를 짚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맞다, 아니다 내기를 한 모양이었다.

희희낙락 남자가 일행에게 돌아가자, 곧 남자의 일행들 몇 명도 일어나서 테이블로 다가와 사진과 함께 싸인을 요청했다.

그들의 모습에 다른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까지 성현의 테이블을 기웃거리다가 눈이 커졌다.

어느새 성현이 있는 테이블 근처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바에 있던 사장님까지 나와서 가게에 걸어가야겠다며 싸인을 받아갔다.

“노래 정말 잘하시던데요? 제가 그거 들으려고 맨날 너튜브 들어갑니다.”

“우, 우와.”

임하나는 흥분해서 빠르게 말하는 손님의 말에 도와달라는 듯이 성현을 돌아봤다.

안 그래도 영어는 힘이 드는데, 여기 사람들의 말은 아일랜드 사투리까지 더해져 더욱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성현이 대신 나서서 임하나에게 방금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통역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공연도 있으니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성현이 싸인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런데 남자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조금 머뭇거렸다.

“왜 그러시죠?”

의아한 성현의 질문에 남자가 결심한 듯이 크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아무 곡이나 한 곡 불러줄 수 있을까요?”

남자의 부탁에 성현은 잠시 임하나와 천소울을 쳐다본 뒤에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방금 막 공연을 하고 온 참이라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성현은 임하나와 천소울의 목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먼저 남자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다.

임하나는 방금 남자가 뭐라고 크게 말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천소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성현을 제치고 나선 천소울의 한 마디.

자신들을 관심 있게 봐주는 팬들을 위해 계획에 없던 노래를 부르겠다고 일어난 것이었다.

성현이 놀라서 천소울의 어깨를 잡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봐! 여기 이분께서 노래를 한 곡 하신대!”

남자가 신이 나서 소리치자 이내 펍에 있던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치며 이를 반겼다.

화제의 인물들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니!

다들 오늘 밤은 운수가 좋다며 신이 나서 맥주를 시켜대고 있었다.

그 덕에 사장님은 깊은 미소를 지은 채 정신없이 주문을 받았다.

“괜찮겠어요?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성현은 오늘 공연을 끝내고 온 천소울 목 상태가 걱정되어 물었다.

천소울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컨디션 최상입니다. 한 번쯤 이런 작은 펍에서 공연해보고 싶기도 했고.”

로망이라는 듯이 중얼거리며, 잔뜩 기대 중인 손님들과 작은 무대를 돌아보는 천소울의 모습에 성현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이런 분위기에서 노래 한 곡 안 하고 배길 순 없겠네요.”

성현은 맥주 한 잔밖에 안 마셨지만,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당장 펍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분위기에 취한 것 같았고, 이는 술 한 방울도 먹지 않은 천소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님들은 서로를 도와 새로운 맥주잔을 하나씩 준비한 후에 성현의 일행이 펼칠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분위기에 취한다지만 무반주로 노래하는 건 좀 그런데. 반주 좀 해줄래요?”

천소울의 부탁에 성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함께 무대로 올라가자 작은 펍 안 가득 환호가 울려 퍼졌다.

술이 조금 취한 임하나는 손님들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두 사람 응원했다.

성현은 거리낌없이 무대에 있는 기타를 맸다.

“어떤 곡 부를 거예요?”

“이성현씨도 아는 곡이요. 싸클에 올렸던 제 첫 자작곡이요.”

Misty.

기타를 쥔 성현이 손이 작게 떨렸다.

성현이 천소울의 목소릴 처음 들었던 노래이자, 천소울을 만나기 전까지 수천 번을 들었던 그 노래.

“할 수 있겠어요?”

천소울은 씨익 웃으며 성현에게 도발하듯 물었다.

수십 번을 들었다고 자신했던 예선전에서 만난 성현에게 묻듯이.

“물론이죠.”

성현은 천소울의 Misty를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었기 때문에 반주를 연주하는 것쯤은 아무런 무리도 아니었다.

성현이 기타를 잡고 잠시 음을 고르더니, 곧 연주를 시작했다.

천소울이 성현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하얗게 사라져 가듯이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너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지 못할 때.”

시끄러운 펍 안에 천소울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퍼지자 술을 마시던 사람들 모두 쉬, 쉬 하며 노래에 집중했다.

모두 천소울과 성현의 무대에 시선이 쏠렸다.

마이크도 없이, 변변찮은 앰프 하나 없는 작은 간이 무대.

성현과 천소울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꿈만 같아.’

성현은 이 순간, 그 어떤 공연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이 꿈에 그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인 천소울과 함께 무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첫 곡을 아는 이 하나 없는 이방의 나라에서.

마음이 술렁이는 것은 성현뿐만이 아니었는지 천소울 또한 들뜬 얼굴로 노래를 열창했다.

짧은 두 사람의 공연이 끝났을 때, 펍에 있던 사람들 모두 맥주잔을 내려놓고 기립 박수를 쳤다.

앵콜! 앵콜!

바에 있던 사람들이 천소울에게 한 곡을 더 뽑아 달라 요청했다.

천소울이 손님들의 요청에 성현을 보자 성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멈출 생각은 두 사람에게도 없었으니까.

“다음 곡은.....”

천소울과 성현은 그 후로도 몇 곡을 더 불렀다.

***

호텔로 돌아가는 길, 성현을 비롯한 일행들은 모두 들떠서 말이 많아졌다.

“나도 한 곡 부르고 싶었는데. 소울씨만 세 곡이나 부르게 하고.”

“그러게 술을 조금만 먹었어야죠.”

성현은 입이 삐죽 나온 임하나를 달래며 말했다.

그러다 문득 호텔 위로 떠 있는 달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보름달이네요.”

성현의 말에 천소울과 임하나 역시 걸음을 멈추고 달을 올려다봤다.

“오늘 밤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저두요. 오디션을 떠나서 너무 행복했어요.”

천소울과 임하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행복에 잠기는 세 사람은 한동안 밝게 비추는 보름달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오디션에서 누군가 떨어지고 누군가는 붙겠지만 우리 딱 오늘처럼만 음악 해요. 즐겁게 욕심 없이.”

성현의 말에 임하나와 천소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셋 다 말이 없어졌다.

벌써 호텔의 정문이 코앞에 있었다.

셋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이대로 호텔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다.

“우리 딱 맥주 한 잔씩만 더 할까요?”

임하나가 성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말에 성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잔씩만이에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쾌재를 부르며 호텔에 있는 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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