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일주일에 한 번씩, 총 3주에 걸쳐 세 번의 버스킹 공연이 진행되며 공연을 본 관객들은 최대 10달러까지의 공연비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복으로 공연비를 지불할 수는 없으며 공연비의 총합이 더 많은 팀이 승리하게 될 겁니다. 그럼 버스킹 공연이 가능한 20곳의 장소를 공개하겠습니다.”
이대훈의 말에 연회장에 설치된 스크린에 주최 측이 선정한 20곳의 장소가 떠올랐다.
리버풀 매튜 스트리트.
체스터 시계탑.
포토벨로 로드 마켓.
맨체스터 마켓 스트리트.
버윅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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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장소들.
영국과 아일랜드의 명소가 고루 뒤섞인 버스킹 장소들을 훑는 성현의 눈초리는 날카로웠다.
저 중에서 선점해야 할 곳은…….
“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 가지.”
“버윅? 버윅 스트리트란 곳이 있어?”
영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참가자들 생소한 이름에 낯설어하느라 바빴다.
장소 리스트를 다 확인한 성현이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아직까진 게임이랑 별반 다르지 않아.’
게임을 통해 경험해 본 영국의 버스킹 지역과 똑같은 장소 리스트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성현이 영국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
바로 ‘그 장소’에서의 버스킹이 가능하단 소리였다.
성현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그 장소’를 보며 회심의 눈을 빛냈다.
저곳만 먼저 선점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미션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럼 양 팀 간 상의를 통해 각 팀의 첫 번째 공연 장소를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대훈의 말에 성현의 팀과 나머지 팀이 연회장 한가운데로 모였다.
두 팀은 누가 먼저 장소 선택권을 가질 것인가 의견을 나누었다.
“복잡하게 갈 거 없이 가위바위보 어때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긴 팀이 먼저 선택하고 이후엔 번갈아 가면서 고르는 걸로 하죠.”
임하나의 말에 상대팀 참가자들도 모두 동의를 했다.
두 팀의 동의하에 장소 선택권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게 되었다.
성현은 다른 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가위바위보 잘해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니까 가위바위보로 하자고 했죠.”
임하나가 자신감을 보이며 웃고, 이내 양 팀에서 가위바위보를 할 멤버들이 차출되었다.
임하나는 맡겨만 달라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가위바위보!”
임하나가 힘껏 구호를 외치며 가위를 내는데, 상대팀이 보자기를 냈다.
“꺅!”
임하나는 고작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거지만 첫 번째 장소 선택권을 얻은 것에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진 상태팀도 가위바위보에서 졌지만, 그렇게 아쉬운 눈치는 아니었다.
어차피 20곳의 장소 중 어디를 택하는 건지 정하는 것뿐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공연 모두 SNS 사전 홍보도 불가능하니 장소 선택이 결과에 아주 큰 영향을 안 미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하실 건데요?”
상대팀 프로듀서 물음에 성현이 임하나와 천소울을 불러 모았다.
“제가 첫 번째 순서로 하고 싶은 장소가 있는데 거길 선택해도 될까요?”
“전 상관없어요. 어차피 봐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고.”
“저도 상관없습니다.”
천소울과 임하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이 ‘그’ 장소를 고른 것에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성현은 곧장 이대훈 PD에게 선택할 장소를 말했다.
“체스터 시계탑으로 하겠습니다.”
이후 상대팀 역시 장소 한 곳을 선정했다.
두 팀이 한 곳씩 고르자, 첫 번째 버스킹 장소 선택이 완료됐다.
“성현씨 체스터 시계탑을 첫 번째로 고른 이유가 뭐예요?”
연회장을 나가던 임하나가 특별한 이유가 있나 궁금해서 물었다.
그 말에도 성현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장소 선택이 영향을 안 미치는 건 사실이지만 성현만이 이번 대결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변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멤버들에게는 아직 비밀이었다.
***
성현의 팀은 호텔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내 카메라 가방을 든 남자가 그들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자의 정체는 성현의 일행에게도 익숙한 김인호 AD였다.
“늦어서 미안.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김인호는 한국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오느라 뒤늦게 합류했다.
오자마자 성현의 팀과 체스터로 답사를 가기 위해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나온 참이었다.
김인호까지 장비를 가지고 합류하자, 네 사람은 호텔을 나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다른 교통수단이나 택시보다는 기차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른 루트였다.
“근데 왜 하필 체스터 시계탑이에요?”
체스터로 향하는 기차 안, 앞 좌석에 앉아 있던 김인호가 궁금한 듯 뒤돌아 성현에게 물었다.
성현은 이번에도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호의 말에 천소울과 임하나도 궁금하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기에, 성현은 대충 둘러댈 말을 찾았다.
“그냥 느낌이 좋아서요. 예상치 못한 행운을 얻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아닌데.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쵸. 저도 뭔가 이상해요.”
김인호와 임하나는 그게 다가 아닐 거라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들이 성현과 함께한 세월이 있었다.
김인호는 이미 성현에 대해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성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분명 남들이 보지 못하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 성현을 지켜보면서 얻은 경험을 통한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추측한 것.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 거냐.’
성현은 두 사람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꿋꿋하게 웃을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김인호가 성현의 속내를 궁금해 하는 사이, 기차가 체스터에 도착했다.
2천 년 역사를 가진 체스터는 영국에서도 중세 도시로 알려진 만큼 영국의 왕조 시대 건축 양식들 건물이 눈에 띄는 곳이었다.
‘찍을 맛 좀 나겠는데.’
김인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얼른 가벼운 카메라를 꺼내 들어 촬영을 시작했다.
이 영상이 쓰일지 안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경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 풍경은 일단 찍고 보라고.
성현의 일행은 자신들이 공연할 장소로 이동했다.
버스킹을 할 시계탑은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을 기념해 1897년에 세워진 역사 깊은 탑으로 관광객을 비롯한 현지인들로 북적거렸다.
평일 낮에도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본 천소울과 임하나가 살짝 놀랐다.
“해리포터 세트장 같은 느낌이에요.”
해외 여행은 처음인 데다가 영국에 처음 방문한 임하나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그 중에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혼자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꽤 있네요.”
한국이라고 버스킹 문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특정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였다.
그것도 팀을 이뤄서 공연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이곳 체스터 거리에는 유난히 솔로 버스커들이 거리에 많았다.
“이거지, 이거야. 이런 멋진 광경은 카메라로 담아 줘야지.”
김인호는 입맛을 다시며 거리에서 자유롭게 노래를 하는 버스커들을 촬영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천소울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천소울씨 무슨 생각 해요?”
그 곁으로 간 성현이 천소울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별다른 것이 없었다.
시계탑 앞 소담한 광장에 사람들이 이러 저리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조금 구석진 곳마다 솔로 버스커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무대요.”
천소울은 자유로우면서 어딘가 고즈넉한 분위기의 체스터에서 꾸밀 자신들의 무대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마땅한 장소 몇 군데를 눈으로 스캔한 천소울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버스킹 장소로 완벽한 것 같습니다.”
천소울은 만족했다는 듯이 성현을 돌아보며 웃었다.
성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게임에서 그와 처음 이곳에서 공연을 했던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많은 솔로 버스커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땐 게임 속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성현은 지금 현실에서 거리에서 자유롭게 공연을 하는 아티스트들을 자신의 눈으로 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때만 해도 자신 또한 이런 자유로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싶다는 부러운 감정뿐이었다.
마냥 부럽게만 생각했던 게임 속 상황이 현실이 된 것이다.
물론 당시 느꼈던 부러운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현이 이곳을 첫 번째 버스킹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현이 체스터 시계탑을 첫 버스킹 장소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
바로 이곳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가끔 히든 이벤트처럼 발생하곤 했기에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몰랐다.
‘이번에도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성현은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기대감에 부풀었다.
***
답사를 마치고 돌아간 성현의 일행은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버스킹 공연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공연 장소가 정해진만큼, 첫 번째 공연에서 부를 곡 리스트 먼저 정합시다. 우선 솔로곡 중 부르고 싶은 곡 있나요?”
“저 먼저 말할게요. 전 저번에 노천 카페에서 불렀던 애드 샤런 ‘Shape of voice’랑 앤 마리아 ‘perfect to you’랑......”
임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곡을 몇 개 늘어놓았다.
이어서 천소울 역시 자신이 원하는 곡을 말했다.
한국에서 이미 합을 맞추고, 편곡을 끝내놓았던 곡들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음. 역시 제가 생각했던 곡들이랑 큰 차이 없네요. 앞으로 일주일간 연습하면서 컨디션 따라 확정 지으면 될 것 같아요.”
성현은 자신과 멤버들의 생각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듀엣곡은 어떤 게 좋을까요?”
함께하는 버스킹 공연인 만큼 당연히 듀엣곡도 여럿 준비해왔다.
임하나는 성현에게 의견을 먼저 구했다.
“듀엣곡에 앞서, 이번 공연에서 꼭 올리고 싶은 곡이 하나 있습니다.”
꼭 올리고 싶은 곡.
성현이 먼저 이런 식으로 제안하는 것은 드물었다.
항상 가수들의 의견을 먼저 물어오던 성현이기에 천소울이 흥미롭게 성현을 쳐다보았다.
“무슨 곡입니까?”
천소울의 물음에 성현은 이내 자신이 원하는 곡을 이야기했다.
곡명을 들은 임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거 성현씨가 엄청 공들인 곡 아니에요?”
성현이 말한 곡은 이번 버스킹 공연을 준비하면서 성현이 특히 신경을 쓴 곡 중 하나였다.
임하나와 천소울은 스튜디오에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그렇기에 그 곡은 아껴놨다가 당연히 마지막 공연에서 부를 거라 생각했다.
그 곡이야말로 현재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할 곡 중 하나일 테니까.
“아껴뒀다가 마지막에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마지막 공연 때 관객도 제일 많이 몰릴 것 같고.”
마지막 버스킹 공연은 상대적으로 홍보 기간도 길었다.
그만큼 앞선 두 무대보다 관객이 더 많이 몰릴 확률이 컸다.
앞서 펼쳐질 두 번의 공연으로 인지도를 얻게 되면, 더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고.
이번이 첫 번째 공연인 만큼 현지 상황에 익숙지 않아 예상만큼 많은 관객이 안 모일 수도 있었다.
천소울과 임하나는 오늘이 해외 버스킹에 적응하는 공연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성현의 결정에도 의아함을 내비쳤다.
둘의 의아함이 가득한 의견에도 성현은 답지 않게 단호할 만큼 밀어붙였다.
“아니요. 이 곡은 꼭 첫 번째 버스킹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성현의 어딘가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결국 임하나와 천소울 역시 성현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저렇게 나올 때는, 언제나처럼 다 계획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