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3주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성현은 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들어갔다.
벌써 영국으로 출국해야 하는 날이 바로 다음 날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성현이 왔냐.”
몇 주 전, 성현은 반지하 작업실을 정리하고, 이주성이 있는 본가로 들어간 참이었다.
그것도 거의 연습실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느라 얼마 들어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성현이 집에 들어가니 이주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현을 반겼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줄은 몰랐던 성현이 잠시 멈칫했다.
“저녁은 아직 이지?”
“저녁이요? 배 안 고......”
성현은 멤버들과 이미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들어왔기에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런데 이주성의 뒤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손을 들어 엑스자를 보이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성현은 그걸 얼른 캐치하고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배가 안 고픈 줄 알았는데 집에 오니까 고프네요.”
그 말에 이주성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어느새 얌전히 두 손을 내리고 있는 아주머니가 푸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거봐. 내가 애 저녁 안 먹었을 거라고 했잖나.”
“그러게 말이에요. 손 씻고 오면 금방 차려줄게.”
아주머니는 잘했다는 듯이 성현에게 윙크를 한 뒤, 부엌에 가서 저녁상을 준비했다.
그 사이 성현과 이주성은 거실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준비는 다 했고? 뭐 빼먹은 거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제가 앤가요. 그만 걱정하셔도 돼요.”
이주성은 성현의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하루가 멀다 하고 준비는 다 했는지 물어오는 중이었다.
성현은 늘 무심하기만 하던 이주성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지난 3년 동안 어떻게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성현이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풀어 성현의 뒷조사를 한 것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서도 항상 몸조심 해라. 너무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이주성은 그래도 맘이 놓이질 않는지 신신당부했다.
“스텝들 다 동행할 거고 위험한 곳은 그쪽에서 못 가게 할 거니까 치안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성현은 이주성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 말에도 이주성은 그래도 여전히 자식이 걱정되는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어떻게 다시 만난 아들인데, 아무리 좋은 기회라지만 먼 타국으로 아들 홀로 보내는 것은 영 마음이 헛헛했다.
“그래도,”
다시 이어지려는 이주성의 말에 성현이 작게 웃으며 선수를 쳤다.
“아버지. 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공연하러 가는 거예요.”
이주성은 성현의 말에도 한동안 답이 없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버진 우승 같은 거 바라지 않는다.”
성현은 이주성 입에서 갑자기 우승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의아해 그를 쳐다봤다.
다시 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주성이 곧 말을 이었다.
“마음껏 너만의 음악을 즐기고 오면 돼. 우승이 아니더라도 이번 경험을 통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많은 값진 걸 얻었으니 그걸로 됐다고 본다. 아버진 앞으로 네가 더 좋은 프로듀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주성의 말에 성현은 먹먹한 마음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주성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어느새 살펴본 아버지의 등허리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많이 가늘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현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많이 변하셨구나.’
성현이 어릴 적부터 이주성은 늘 엄한 아버지였다.
콩쿠르에 나가도 항상 1등을 바랐다.
연습을 할 때도 어린 성현을 결코 봐주는 법이 없었다.
‘다시 한번!’
흔한 칭찬 한 번이 없고, 혹독한 연습의 반복, 또 반복이었다.
그는 성현이 늘 최고이길 바랐고,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음악, 즉 클래식을 전공하길 바랐다.
성현이 그 정도를 벗어났을 때 불같이 화를 낼 때까지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성현이 하는 음악을 지지하는 걸로 모자라 결과가 아닌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알아들었냐.”
무뚝뚝하게 다가오는 아버지의 진심에 성현은 목이 메오는 것을 삼키며 대답했다.
“명심할게요.”
성현은 이주성이 한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다짐했다.
꼭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오겠노라고.
***
인천국제공항.
공항은 일찍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에 있었다.
오늘은 무려 ‘더 넥스트 슈퍼스타’ 한국 대표들이 영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TOP 7을 응원하는 팬들은 각자 응원 피켓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그때 공항 앞에 검정 벤이 도착하고, 대기 중이던 보안요원들이 차 주변을 통제했다.
이내 커다란 벤의 문이 열리고 TOP 7 멤버들 차례로 내렸다.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과 팬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질서 지켜주세요! 아티스트 만지면 안 됩니다!”
보안 요원들은 달려드는 팬과 기자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래도 워낙 사람이 많이 몰린 탓에 차에서 내린 TOP 7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멀리 인천국제공항 입구가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의 인파였다.
“나 좀 무서워질라 하는데......”
“와...... 이렇게나 많이 왔다고?”
“성현씨 우리 연예인 된 거 같아요.”
임하나 또한 수많은 인파를 보며 넋이 나가 성현을 돌아봤다.
그 사이 성현이 갑자기 몰린 인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며 휩쓸려갔다.
그리고 그때 천소울이 성현의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사람들을 헤치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고마워요.”
간신히 자신의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선 성현이 천소울에게 인사를 건넸다.
천소울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공항에 있던 스탭 하나가 성현과 천소울을 불렀다.
“이성현씨, 천소울씨, 두 분만 이동하겠습니다.”
성현과 천소울이 스탭을 따라가니 그곳엔 별도의 인터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기자 몇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TOP 7 멤버 중, 각 파트별 1위인 이성현과 천소울이 대표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올림픽 경기에 한국 대표로 나가게 된 건데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승 욕심 있습니까?”
“다른 나라 참가자들 중 가장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죠?”
“만약 우승을 해서 상금을 받게 되면 어디에 쓰실 예정이죠?”
기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댔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천소울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쏟아지는 질문에도 성현과 천소울은 침착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우승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당장은 매 무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상금에 대한 건 아직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두 사람은 생각해왔던 대로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나갔다.
“한국 대표로 나가는 만큼 조심스러운 점도 많지만 한국인의 매운맛 제대로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만나보고 싶은 다른 참가자요? 없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터뷰는 잘 마무리되었다.
TOP 7 멤버들 모두 마지막까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출국 심사를 끝냈다.
***
영국행 비행기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성현을 비롯한 TOP 7 참가자들 각자 티켓을 들고 탑승 준비를 했다.
한국 대표 참가자들은 주최 측의 배려로 퍼스트클래스 티켓을 받았기에 기다리지 않고 곧장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저 비행기 처음 타봐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 퍼스트 클래스는 보통 얼마 정도 해요?”
“못해도 오백은 넘을걸요.”
부잣집 아들인 성현은 망설임 없이 그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평소에 이런 문화에 전혀 문외한인 임하나는 입을 떡 벌렸다.
“오백이요?! 비행기 티켓 하나에 오백이라구요?”
“네. 그것도 편도만 해서요.”
이어지는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렸다.
얼마 안 있어 더욱 놀라고 말았다.
다리를 쭉 뻗을 수 있게끔 넓은데다가 커다란 스크린까지 딸린 좌석을 보고 감탄한 것이다.
“와......”
임하나는 진심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는 임하나뿐 만이 아니었다.
다른 TOP7 멤버들 역시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이라 놀랐지만, 속으로 감탄사를 숨겼을 뿐이었다.
성현은 아이처럼 좋아하는 임하나를 보며 피식 웃으며 익숙한 듯 자리에 앉고, 천소울 역시 덤덤한 척을 하며 성현의 앞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좌석에 붙어있는 버튼을 이리저리 조작하느라 의자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이 성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소울도 이런 건 신기해하는구나.’
성현은 피식 웃으며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임하나는 천장에 있는 버튼 하나하나까지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안내 멘트 이후 비행기는 빠르게 달리며 이륙 준비를 하고 마침내 허공에 오르자 임하나는 신기한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오. 갑자기 귀 멍해진다.”
임하나는 어린아이처럼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마저 신기해했다.
곧 승무원이 멤버들에게 각각 웰컴 드링크로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대박. 이거 또 마셔도 돼요?”
하늘 위에서 샴페인 잔을 황송하게 받아든 임하나가 승무원의 설명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하나는 곧장 잔을 비우며 승무원에게 물었다.
성현은 그런 임하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하나씨, 술 적당히 마셔요. 우리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니잖아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TOP 7 중 참가자 하나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예요?”
“예쁘죠? 대표님이 꼭 우승하라고 커스텀 마이크 맞춰줬어요.”
참가자는 스폰서 대표가 맞춰준 거라며 멤버들에게 마이크를 자랑했다.
곧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마이크로 쏠렸다.
“여기 자세히 보시면 제 이니셜도 박혀있어요.”
“오, 보라색 유광 예쁘다.”
기내에 있던 TOP 7 참가자들 모두 부러워하며 이를 지켜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보던 천소울이 힐끗 옆을 보자, 천소울 뒤에 앉아 있던 성현이 그 모습을 눈치채고 곧장 말을 걸었다.
“왜요? 부러워요?”
“그냥 본 겁니다.”
천소울을 안 지 몇 달, 이제 성현은 이런 소리에 그냥 넘어갈 바보가 아니었다.
아닌 척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성현은 히죽거리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부러워서 본 것 같은데. 부러우면 스폰서 계약하지 그랬어요.”
“안 부럽다니까요. 전 노래방 마이크 써도 이길 자신 있습니다.”
천소울은 성현의 놀리는 듯한 말에 마찬가지로 농담을 하며 맞받아쳤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힐끗힐끗 마이크를 쳐다보았다.
이를 모두 지켜본 성현은 천소울 몰래 미소를 지었다.
‘안 부럽긴. 서울 돌아가면 마이크 하나 사줘야겠네.’
성현은 이전에 천소울이 스폰서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날 성현과 천소울은 우리가 같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궁금하니, 끝까지 함께 해보자라고 다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겠지만, 그 끝이 꼭 그 무대가 됐으면 좋겠네요.’
성현은 조용히 비행기 시트에 몸을 묻으며, 언젠가 반드시 올 그 광경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