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기획사를 세우면서 계획한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요하를 중심으로 한 락밴드 결성.
성현은 요하와 함께할 멤버들을 뽑을 준비 중에 있었지만, 성에 차는 멤버를 뽑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요하를 어쩐다…….’
성현은 당장 요하를 무대에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더 비기너와의 콜라보라는 특집 앨범 기획에 생각이 미쳤다.
성현은 바로 더 비기너에게 콜라보레이션을 해서 곡을 발표하자는 제의를 건넸던 것.
오늘은 그 대답을 들으러 온 참이었다.
“저번에 요하랑 했던 무대가 반응도 괜찮았고 콜라보 하면 우리야 좋지.”
이재원은 선선히 승낙의 뉘앙스를 풍겼다.
성현은 그 말에 화색이 돌았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모양이었다.
“그럼 확실히 되는 건가요?”
“아니. 아직 대표형이랑 얘기가 덜 끝나서 오늘 당장 확답은 못 주겠다.”
김동우는 그런 성현의 희망을 묵살시키듯 덧붙였다.
곁에 있던 최혁이 웃으며 김동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에이, 괜히 애 긴장시키지 마요. 내부적으로 얘기 다 끝났으면서.”
“……아무튼 이 자식 때문에 무슨 척을 못 해요.”
“척할 게 뭐 있어요. 성현이 우리 식구 같은 놈인데.”
김동우와 최혁이 티격거리고, 이재원은 이를 한심하듯 쳐다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저 자식들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이재원은 둘을 무시하며 성현을 돌아보았다.
“뭐 아무튼 거의 된다고 보면 돼.”
“네, 그럼 요하한테도 그렇게 말해 둘게요.”
성현의 말에서 요하가 등장하자 더 비기너 멤버들의 눈이 반짝였다.
“요하는 잘 있지?”
“네. 요즘 작곡 공부한다고 정신없어요.”
예상치 못한 요하의 근황에 이재원의 눈이 커졌다.
보기보다 재능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부지런할 줄은 몰랐다.
“작곡?”
“네. 밴드하면 작사 작곡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 말에 최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밴드라면 자신의 곡은 직접 작곡할 줄 알아야 하는 거라며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하면 좋지. 곡 만든 것 좀 있어?”
“혼자 몇 개 만들어서 싸클에 올린 것 같던데 들어보실래요?”
“그래, 그럼.”
성현은 관심을 보이는 더 비기너 멤버들에게 요하의 노래 들려주었다.
멤버들은 요하의 자작곡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성현과 이런저런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하에게 전해주겠다는 성현의 말에 더 비기너 멤버들은 자신들도 오랜만에 연락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신인 작곡가 기 좀 살려줘야지.”
“꺾어야 하는 거 아냐?”
“너는 새끼가, 요하한테 그렇게 야박하게 굴 거냐?”
성현은 그 뒤로 더 비기너 멤버들과 한참 얘기를 나눈 후에야 연습실을 나왔다.
***
“와, 건물 진짜 좋다.”
임하나는 B&V 건물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천소울 또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건물 외관에 잠시 말을 잃었다.
오늘의 약속 장소라며 보내온 곳이었다.
천소울과 임하나는 오늘 처음 B&V 건물에 초대받았다.
영문을 모른 채 이곳을 찾은 임하나는 멤버들에게 이곳이 성현의 기획사이고, 이제 우리의 사무실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마주쳤다.
둘은 확신했다.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임하나였다.
“갑자기 서운해지려 해요. 우리 몰래 기획사까지 차리고, 이런 좋은 데서 자기들끼리만 연습하고.”
성현의 기획사 설립에 대해 전혀 얘기를 듣지 못했던 임하나가 서운함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천소울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한텐 영입 제안했는데.”
순간, 임하나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경악을 한 채로 입을 벌린 임하나가 분하다는 듯이 외쳤다.
“와, 천소울씨한테도 영입 제안을 했다구요? 그럼 나만 빼고 다 영입 제안 한 거잖아. 너무해.”
천소울은 그 뒤로도 한참을 서운하다고 말하는 임하나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임하나는 투덜거리던 것이 언제냐는 듯이 고급스러운 내부 인테리어에 시선을 뺏겼다.
이미 서운함은 잊은지 오래였다.
천소울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현도 없이 임하나를 진정시키기에는 힘에 벅찼다.
그리고 그 역시 휘황찬란한 내부의 모습에 시선을 뺏겼다.
“그러니까 여기가 성현씨 아버지네 회사란 거죠?”
“네......”
천소울 역시 감탄하며 말했다.
멍하니 로비를 구경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천소울씨, 임하나씨?”
“네? 네. 네.”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에 놀랐는지 더듬거리는 임하나의 모습에 직원은 생긋 웃으며 엘리베이터 홀 쪽을 가리켰다.
“3층으로 올라가시면 돼요.”
직원은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해주었다.
임하나와 천소울이 건물 3층에서 내리는데 마침 복도를 걷고 있던 서지현과 마주쳤다.
연습실로 향하던 서지현이 눈이 번쩍 뜨였다.
“언니!”
“지현아!”
서지현은 오랜만에 보는 임하나를 보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임하나와 서지현은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듯 부둥켜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이성현씨는 어딨습니까?”
“성현씨, 지금 회의실에 있어요!”
서지현은 천소울과 임하나를 회의실로 안내해주었다.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주선아와 더 비기너의 모습이 보였다.
주선아와 더 비기너 모두 성현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이 모든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임하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선아가 왜 여깄어?”
놀라서 주선아를 가리키며 서지현을 향해 묻는 임하나에게 서지현은 웃으며 더 놀랄만한 소식들을 던져주었다.
“선아 이번에 저희랑 같이 데뷔하게 됐어요.”
“진짜?! 그럼 너랑 릴리씨랑 희진씨랑 선아 넷이 데뷔하는 거야?”
“네. 선아 소속사에서도 흔쾌히 허락해 줬다나 봐요.”
임하나는 너무 잘됐다며 서지현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더 비기너 멤버들을 유심히 보던 천소울도 말을 보탰다.
“더 비기너랑 콜라보 결국 진행되는 거군요.”
천소울의 대충 예상했다는 듯한 말에 임하나는 그게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서지현을 쳐다봤다.
“이건 또 뭔소리라니. 콜라보라니? 누구랑?”
“요하요.”
“진짜? ……아니 근데 아까부터 왜 나만 몰라? 천소울씨는 다 아는데?”
임하나는 다시 억울함이 스멀스멀 밀려오는지 천소울을 이글거리며 쳐다봤다.
천소울은 이제 서지현도 있겠다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얄밉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세 사람은 투닥거리며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서지현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회의 중이던 성현과 주선아 그리고 더 비기너가 이쪽을 쳐다봤다.
“하나 언니랑 소울씨 왔어요.”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성현이 시계를 확인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진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쯤 마무리하고 자세한 건 서자명씨랑 주영준 프로듀서랑 얘기 나누시면 될 것 같아요.”
성현은 오디션 회의를 위해 마무리를 지었다.
곧바로 정리하고 회의실에서 나가자 천소울과 조금 뾰루퉁 해 보이는 임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하나는 팔짱을 낀 채로 기다렸다는 듯이 성현에게 물었다.
“성현씨 왜 저만 왕따시켜요?”
“왕따라뇨?”
성현은 멍하니 되물었다.
“기획사 세우는 것도 그렇고 애들 데뷔도 그렇고 저만 빼고 다 알고 있잖아요.”
아, 맞다.
성현은 그제야 임하나에게 지금까지 거의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소울에게는 어쩌다 보니 조금씩 말을 흘리게 됐는데, 그때마다 임하나가 자리에 없었다.
성현은 머쓱해져서 뒷목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나씨가 오디션에만 집중하면 좋겠어서 말 안 했어요. 일부러 숨긴 건 아닌데 미안해요.”
“그럼 천소울씨는요? 천소울씨도 저랑 오디션 같이 준비하잖아요. 저한테만 영입 제안 안 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 핑계 대지 마세요.”
가늘게 눈을 뜨고 이쪽을 쳐다보며 하는 임하나의 말에 성현은 조금 난처한 듯 천소울 쳐다보았다.
그러자 천소울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군.
성현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눈알을 굴리다가 말했다.
“그, 하나씨는 당장 스폰 맺은 기획사도 있고 오디션 끝나고 회사가 좀 더 안정되면 제안하려고 했어요.”
“......진짜요?”
“네. 어떤 프로듀서가 하나씨 같은 가수를 그냥 놓치겠어요.”
진심어린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넘어가는 것은 섭섭하다는 듯이 시선을 비끼는 임하나를 보고 성현은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이 요즘 워낙 경황이 없기는 했던 모양이다.
성현은 일단 오늘 모인 이유를 상기시키기로 했다.
“그럼 버스킹 연습하러 가도 될까요?”
“연습실이 어딘데요?”
“저기 복도 끝이요.”
아마 임하나는 성현이 보여주는 연습실을 보여주면 당장 음악에 빠져들 것이 뻔했으니까.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곧장 연습실로 가서 문을 열어보고는 놀란 듯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문제 있어요?”
성현은 임하나가 왜 놀라는지 대충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문제가 아니라 시설 왜 이렇게 좋아요? 압구정 스튜디오보다 훨씬 좋은데요?”
임하나는 홀린 듯이 연습실로 들어갔다.
척 봐도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연습실보다 좋아 보이는 시설이었다.
임하나와 천소울은 연습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최신 장비를 둘러보았다.
성현은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일단 제가 준비한 곡 먼저 들어볼게요.”
세 사람 각자 버스킹에 올리고 싶은 곡들을 논의했었다.
성현은 그중 몇 곡을 임하나와 천소울 색깔에 맞게 편곡해 놓은 상태였다.
연습실 구경에 신이 났던 임하나는 차분하게 앉아서 성현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천소울 역시 한 편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천소울과 임하나가 숨을 죽이고 노래에 집중했다.
노래가 한 곡 한 곡 지나갈 때마다 성현의 편곡 실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준비된 모든 노래가 끝나자 임하나가 작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대한민국 1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개인적으로 원곡보다 훨씬 좋은 것 같은데요?”
임하나와 천소울 모두 성현의 편곡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좋은 음악 줘서 고마워요. 저도 좋은 노래로 보답할게요.”
모든 노래가 끝나자 임하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척 들으면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퀄리티의 곡이 결코 그냥 나온 게 아니란 걸.
안 그래도 기획사 설립 문제로 바쁜 성현이 편곡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그녀 또한 알았다.
성현의 노력을 알기에 이번 미션에 더욱 진지한 태도로 임하겠다는 마음을 표출한 것이었다.
“연습실은 몇 시까지 사용 가능합니까?”
“몇 시까지 하실 생각인데요?”
천소울의 말에 성현이 되물었다.
“내일 아침까지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무리해도 돼요. 이성현씨도 무리해서 곡 만들었잖아요.”
천소울 역시 성현이 이번 곡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한 것을 알기에 진지하게 연습에 임할 각오를 다졌다.
그만큼 연습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었다.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각각 연습에 들어갔다.
천소울과 임하나는 각자 준비한 한국 노래와 영국 가수들의 팝송까지 여러 곡들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를 듣고 있던 성현은 두 사람의 보컬에 감탄한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안 본 사이 또 성장했네.’
천소울과 임하나 모두 오디션을 거쳐 오면서 보컬리스트로서 더욱 성장했다.
성현은 확실히 둘이 가지고 있는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이 말해주지 않아도 각자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면서 완성형의 가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영국에서 두 사람의 노래를 어떻게 들을까.’
성현은 이제 한국 무대가 아니라 영국에서 두 사람의 노래가 어떻게 들릴지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까지 영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음색과 그들에게 익숙한 곡의 만남.
기대감과 설렘 속에 영국으로 향하기 전날까지 세 사람의 맹연습은 계속됐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영국으로 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