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록밴드 보컬이요? 제가요?”
요하는 불안한 목소리로 놀라서 되물었다.
경연 때 몇 번 록밴드와 콜라보 무대를 꾸민 적은 있었지만, 한 밴드의 목소리를 책임진다는 생각은 아직 해본 적이 없었다.
성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 네 목소리가 록이랑 가장 잘 맞으니까.”
“밴드면 같이 할 팀원도 구해야 하잖아요.”
요하의 걱정은 하나 더 있었다.
이미 걸그룹을 꾸릴 만한 인원이 있는 저쪽과는 사정이 다른 탓.
보컬을 자신이 한다 하더라도 밴드의 다른 인원을 구해야 하는 부담을 성현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여러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훤히 보여서 성현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걱정 없이 음악을 하게 해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요하는 되레 성현의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그 문젠 형이 알아서 하니까 넌 당장 록밴드를 만들었을 때 어떤 음악을 할지 그것만 생각해.”
성현의 단언에 요하는 감동을 먹었는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형.”
“고맙긴. 그러려고 기획사가 있는 거고 프로듀서가 있는 거야. 아티스트가 편하게 음악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이 회사를 차린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성현의 말에 요하는 여전히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사 전체를 움직이는 완벽한 리더의 모습.
홍대팀으로 동료들이 똘똘 뭉쳐 성현을 따랐을 때처럼, 희미한 설렘이 요하를 감쌌다.
이제는 팀이라는 이름 아래 뭉친 것도 아니고, 성현이 당장 자신의 음악을 디렉팅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소속사라는 이름 아래 함께한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더 비기너랑 콜라보를 진행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참고만 해둬.”
“진짜요?!”
잔잔한 감동은 성현의 폭탄선언에 깨졌다.
신이 난 요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되물었고, 성현은 그런 요하가 귀여워 웃었다.
“대략적인 얘기만 오간 거라 아직 확실해진 건 아니야.”
“그래도 꽤 긍정적인 대화가 오가고 있으니까 기대해도 될 거다.”
덧붙여지는 심훈영의 말에 요하는 확정이라고 여겼는지 신이 나서 쾌재를 불렀다.
다음으로 성현은 서자명과 주영준을 불렀다.
“앞으로 제가 자릴 비울 일이 많을 텐데 두 사람이 책임지고 프로젝트 진행을 맡아주셨으면 해요.”
“요하야 이전에 작업한 적이 많아 문제없는데 서지현씨네 팀은 조금 걱정이네요.”
당연히 이런 흐름일 거라 예상한 두 사람이기에 반발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걸그룹 프로듀싱을 맡아본 적이 없는 서자명이 조금 난처한 듯이 걱정을 내비쳤다.
“조은별씨랑 작업해 볼 생각이에요.”
성현의 말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은별씨라면…… 괜찮겠네요. 멤버들이랑 사이도 좋고. 실력도 좋고.”
서자명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는 중이었고.
“그럼 제가 백업하겠습니다! 릴리랑은 작업도 자주 해와서 서로 그편이 편할 것 같고.”
주영준은 탈락한 이후로도 꾸준히 작곡을 하고 릴리와 여러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있었다.
주영준의 말에 릴리는 자신도 좋다는 듯이 성현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 서자명씨랑 주영준씨가 도와주시겠어요? 두 분이 지금까지 써온 곡도 좋으니까, 당장 앨범을 만들려면 조은별씨 혼자만으로는 벅찰 겁니다.”
성현의 말에 서자명과 주영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와, 드디어 저희 곡이 통과되나요?”
기뻐하던 서자명이 성현에게 다시 한번 묻고, 성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가져온 곡에 통과라는 소리를 해준 적이 없는 성현이었다.
“서자명씨! 저희 무대 구성안 끝내주게 해봅시다.”
“그거 좋죠!”
두 사람은 성현에게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고양감과, 오디션 때처럼 함께 뭉쳐서 일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다.
“좋네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대략적으로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진행될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나자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멤버들은 그 말에 모두 회의실을 나가고, 성현과 심훈영만 남았다.
성현은 멤버들이 나가자 길게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심훈영은 그런 성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성현의 심정을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자신일 테니까.
“울타리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뭐든 쉽게 얻는 건 쉽게 가잖아요. 그만큼 제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해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하는 성현.
그런 성현을 기특한 듯 쳐다보는 심훈영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겨 주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 울리고, 화면을 확인한 심훈영이 씩 웃으며 성현을 봤다.
타이밍도 좋게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김성민 대표 답장 왔다. 내일 두 시까지 오래.”
***
이성현과 심훈영은 나란히 서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건물에는 자사 연예인들의 사진이 거대하게 프린트되어 걸려 있었다.
그 위로 KS라는 이니셜 간판이 눈에 띄었다.
KS 엔터테인먼트.
국내에서 상당히 입지가 탄탄한 엔터테인먼트사로 수많은 연예인들이 이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었다.
KS 엔터테이먼트의 수장이 바로,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김성민 대표였다.
“같이 길거리에서 소주 까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출세했네, 녀석.”
아련한 눈으로 라떼를 말하는 심훈영을 보며 성현이 웃었다.
“대표님 2집 앨범도 같이 작업했다고 들었는데.”
성현의 말에 심훈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당시에 그 녀석이랑 작업 안 한 가수가 없었으니까. 기타를 좀 잘 쳤어야지. 대한민국에서 기타 좀 친다는 사람 중에 이 녀석보다 성공한 녀석도 없을 거다.”
“그런 사람을 발굴한 대표님 안목도 한몫했죠.”
“그래. 그러니까 저놈도 지금 저 자리 올라가서도 은혜 갚겠다고 만나주는 거 아니겠냐.”
계속 겸손하게 말하는 심훈영에 성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띄워주자, 심훈영도 따라서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그럴 때도 있었는데 말이지.’
김성민, 그는 과거 유명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무명이던 그를 발굴한 건 다름 아닌 심훈영이었다.
심훈영은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김성민 대표를 자신의 앨범 작업에 참여시킨 것도 모자라, 다른 프로듀서들에게까지 소개해주며 홍보를 해주었다.
그 결과, 김성민 대표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향후 그가 기획사를 차리고 난 뒤에도 기타리스트로서 그의 명성은 여전했다.
“가자.”
심훈영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건물로 들어갔다.
성현은 심훈영의 뒤를 따랐다.
외관만큼이나 현란한 내부가 보이고, 안내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사람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심훈영은 바로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심훈영 대표님 맞으시죠?”
“예. 성민이 만나러 왔는데.”
“대표님 4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직원은 성현과 심훈영을 5층 김성민 대표 사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심훈영 대표님 오셨습니다.”
직원의 말에 문이 열리더니 환하게 웃는 김성민 대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명성에 걸맞게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대표실에서 김성민이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형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너 출세했더라? 잠깐만. 얼굴에도 뭐 맞았어? 얼굴이 그대로다?”
“형님도 참. 맞긴 뭘 맞아요.”
김성민은 심훈영의 농담에 그의 등을 아프지 않게 두드리며 웃음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거지만 어색함 하나 없이 서로 농을 이어가는 두 사람.
활짝 웃던 김성민이 심훈영과 함께 온 성현에게로 향했다.
“어어?”
깜짝 놀란 김성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성민은 당연히 이성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회사 역시 오디션에 스폰서로 참여하기도 했으니 성현을 눈여겨보았다.
오디션 내에서 활약이 뛰어났던 성현에게 스폰 제안을 건네기도 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이성현씨가 여길 왜......? 설마 형님이 같이 온다던 친구가 이 친구예요?”
“만나면 깜짝 놀랄 거라고 했잖아.”
아니,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던가.
김성민은 경황없이 중얼거리며 황망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성현은 그런 김성민의 모습에 일단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프로듀서 이성현입니다.”
성현이 김성민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자, 김성민도 얼떨결에 성현과 악수를 나누며 심훈영을 봤다.
“형님이 저희 회사를 다 찾아오시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그렇게 오라고 사정을 해도 안 오시던 분이 별안간 무슨 바람이 들어오신 건지.”
김성민은 그 말을 하며 이번에는 성현을 힐끗 보며 덧붙였다.
게다가, 혼자도 아니었다.
“좀 무섭기까지 하네요.”
십 년이 넘게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심훈영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성현과 함께 온 것을 보니 보통 일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
“뭘 또 무서워. 잘 지내나 싶어서 온 거야.”
“형님이 15년 전에 저 기획사에 소개해줄 때 했던 말이랑 똑같네요. 누구였더라? 이영철 형님이었나?”
김성민은 이제 심훈영의 수작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아, 생각나네. 그때 너 무작정 데려가서 써달라 했더니 그 형님이 온갖 쌍욕을 하더니 네 연주 듣고 나서는 그 회사 아티스트 앨범 전체를 다 맡겼잖아.”
심훈영과 김성민 추억에 잠긴 듯 옛날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참을 향수에 젖어 있던 심훈영이 곧 웃음기를 거두며 성현의 어깨를 잡고 김성민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오늘은 얘 써달라고 온 거 아니고 소개해주려고 온 거야. 이래 봬도 기획사 대표님이시거든.”
심훈영의 말에 깜짝 놀란 성현이 외치듯 말했다.
“대표님은 사장님이시잖아요.”
“난 그냥 임시직인 거고 실질적 주인은 너잖냐.”
심훈영이 성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싱긋 웃으며 김성민을 돌아보자, 김성민은 많이 당황한 듯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현이 프로듀서로서 재능이 있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기획사를 차렸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
“그래서 오늘 진짜 인사만 시켜주려고 온 거라고?”
김성민은 당장 당혹감을 감추며 미심쩍다는 듯이 묻는데 이번에는 성현이 나섰다.
포문을 열어주는 심훈영의 역할을 끝이 났다.
이제부터 승부를 볼 사람은 성현이었다.
“아니요. 일단 노래 한 곡 먼저 들어주시겠어요?”
“노래?”
“네. 일단 노래 먼저 듣고 얘기하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성현의 말에 김성민은 곧 생각에 잠기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곡을 먼저 듣는 건 밑지는 장사는 아닌 듯했으니까.
성현은 곧장 노래를 틀어줬다.
조용한 사무실에 힙합과 트로피컬하우스 장르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청량감 넘치는 사운드에 김성민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탔다.
노래가 끝난 뒤에 만족스럽다는 듯 팔짱을 끼기까지 했다.
“좋은데? 이성현씨 곡인가?”
“아니요. 제 곡은 아니고 이번 오디션에 참가했던 조은별 프로듀서가 만든 곡이에요.”
조은별이라는 이름에 김성민 대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이름도 낯익었다.
“아, 그 친구. 떨어져서 아쉬웠는데 곡 작업은 계속하고 있었나 보네. 그래서 그 친구 홍보해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아니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면 좋겠는데.”
성현이 계속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자, 김성민 대표가 답답한 듯 재촉했다.
“이 노래로 4인조 걸그룹을 데뷔시키고 싶은데 멤버 한 명이 더 필요해서요.”
“멤버가 필요하면 오디션을 보든가 하지 왜 날 찾아오지?”
이제 그만 네 놈의 꿍꿍이를 보이라는 김성민 대표의 말에 성현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주선아씨를 마지막 멤버로 영입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