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B&V 건물 3층에 있는 스튜디오에 도착한 성현은 곧장 미디 앞에 앉아 USB를 연결했다.
화면 가득이 성현과 천소울, 임하나가 골라두었던 노래 파일이 떴다.
‘영국에서 가장 먹힐 수 있는 곡이어야 해.’
이전부터 대충 버스킹 공연에서 사용될 곡을 이미 분류해 놓은 상태였다.
다만, 버스킹 공연 무대가 영국으로 확정된 만큼 그에 맞춰 곡을 추리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 추가로 선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곡은 생각보다 대중적이지 않을 거야.’
‘하나씨의 고음을 담지 못해.’
‘천소울씨의 목소리에 이 곡이 최선일까?’
성현은 이때만큼은 철저히 대중이 사랑하는 곡을 만드는 프로듀서가 되어야 했다.
버스킹 공연의 관객이 될 영국인들의 취향, 자신의 가수들의 실력, 이 모든 걸 고려해서 까다로운 기준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미리 선별해 놓은 노래들을 다시 한번 걸러냈다.
집중해서 여러 곡을 듣다가 이내 맨 처음 듣던 노래를 듣기도 하고, 무작위로 노래를 돌려 들으며 어떤 노래의 합이 괜찮을지 판별해내기도 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곡들을 듣던 성현의 마우스 포인트가 한 곡 위에 멈췄다.
영국이 선택되길 바라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곡 때문이었다.
게임 속에서 영국이 선택되었을 때마다 이 곡을 선택하면, 무대를 선보였을 때 엄청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의 히든 카드가 되어줄 곡.
단순히 관객을 많이 모으거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가져올 곡이었다.
‘현실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 장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도 아쉬운데......’
이미 게임이 아닌 현실로 넘어오면서 변수가 많이 생기고 말았다.
그로 인해 게임 내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 곡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중에 제일 큰 변수라고 할 수 있는 건 성현 자신이었기에 달리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곡 자체가 너무 좋았기에 이대로 그냥 버리기는 상당히 아쉬웠다.
성현은 천소울, 임하나 두 사람이 이 곡을 부르는 장면을 상상해보다가 결국 그 곡을 공연 세트 리스트 파일에 넣었다.
‘꼭 그만큼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곡이니까.’
성현은 곡 선별을 마치고 나서, 두 사람에게 맞는 편곡을 할 요량으로 밤새 곡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
미디 앞에 앉은 성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곡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하지만, 헤드폰을 쓰고 있는 성현은 음악에 집중하느라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곡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벌써 출근했어?”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에 성현은 헤드셋을 벗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심훈영이 서 있었다.
“오셨어요.”
심훈영이라는 것을 확인한 성현이 대답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심훈영이 멈칫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업실 테이블에 놓인 컵라면이었다.
다 먹고 국물만 남은 것을 발견한 심훈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출근이 아니라 퇴근을 안 한 거 였구만?”
그 말에 성현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고, 심훈영은 혀를 끌끌 찼다.
“바쁜 건 알겠지만 몸 사려가면서 해. 짊어질 식구도 많은데 그렇게 몸 함부로 쓰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성현이 이제부터 건사할 식구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회사라는 것이 그랬다.
차려놓는다고 장땡이 아니었으니까.
심훈영의 입장에서 볼 때, 주축이 되어야 할 성현의 건강 상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멤버들의 걱정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중간에 소파에서 눈 좀 붙여서 괜찮아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는 성현은 정말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밤을 새웠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간 얼굴에 심훈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원래 자기가 좋은 거 할 때는 힘든 줄도 모르는 법이지.’
일단 뒤에서 지켜보자고 마음먹고 잔소리를 삼켰다.
그때 복도에서 서지현, 릴리, 문희진, 김요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이 건물 3층이 기획사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들 역시 연습실을 쓰기 위해 아침 일찍 나온 참이었다.
성현은 반가운 목소리에 복도로 얼굴을 내밀었다.
“다들 일찍 왔네요.”
“저 열정이 언제까지 갈진 모르겠다만, 뭐 일단은 다들 의지가 충만해.”
심훈영은 멤버들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괜히 툴툴거렸다.
지난 며칠 간 사무실에서 멤버들의 연습을 지켜본 심훈영이었다.
이미 그들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낯간지러운지 괜스레 염려를 표했다.
“바짝 불타다 식을 열정 아니에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성현은 심훈영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호언장담했다.
심훈영은 성현의 자신감에 알겠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성현을 찾아온 이유가 떠올랐다.
“참,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내일 시간 돼?”
“시간이야 만들면 되는 건데, 일단 소개해 줄 사람이 누군데요?”
“김성민 대표.”
김성민, 이라는 이름에 성현의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혹시, 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현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심훈영.
그러자 성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맥이 부족한 상태에서 기획사를 차린 자신에게 이만큼 맞춤형인 대표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번에 네가 말했던 계획도 있겠다 같이 작업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일단 성현이 네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 싶어서.”
“전 좋아요.”
“그래, 그럼 약속 잡아보마. 이따 회의 때 보자.”
심훈영이 성현의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성현은 그런 심훈영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그를 대표로 모셔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그 등이 든든하게 느껴져서 성현은 씨익 웃었다.
확실히 심훈영은 오랜 세월 음악 활동을 해온 만큼 알아서 일을 척척 진행해주고 있었다.
이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선별해내는 것이 그의 첫 임무인 셈이었다.
성현은 그의 선택을 기대하면서 일단 오디션에 집중해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곡 작업에 매진하는데 몇 시간 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직원이 들어왔다.
“PD님 회의 시간 됐습니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가자 회의실에는 이미 심훈영을 비롯한 모든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한담을 나누던 멤버들은 성현의 등장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두 모이게 한 이유는 앞으로 우리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진행할 프로젝트에 대해 아낌없는 피드백 부탁드리고 어떤 의견이라도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성현의 말에 심훈영과 멤버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내 성현은 첫날이니만큼 자신이 먼저 준비한 안건에 대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당장 우리 회사에 필요한 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회사를 관리할 직원부터 해서 매니저, 가수, 프로듀서까지 적극적인 인사 채용이 있을 계획입니다. 당장은 제가 이것을 모두 책임지고 할 수 없으니 심훈영 대표님께서 담당하게 될 것 같고 주변에 좋은 인재가 있으면 가감 없이 추천해주세요.”
일리 있는 성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갑자기 기획사를 차리겠다는 성현의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알았다.
성현이 앞으로 자신들을 잘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걸.
앞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 회사를 채워나갈지 기대 어린 눈빛들.
성현은 그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다음 이야기를 진행했다.
“이어서 지금 있는 아티스트들에 대한 대략적인 활동 방향성에 대해 얘길 나눠보고 싶은데......”
성현은 말을 하며 서지현과 릴리, 문희진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셋은 갑자기 자신들을 지목하는 성현의 시선에 살짝 긴장했다.
“제 생각엔 세분이 솔로보단 함께 그룹으로 데뷔했을 때 훨씬 더 좋은 시너지가 날 것 같거든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때요?”
“오?”
서자명이 성현의 말에 바로 반응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셋은 모두 비주얼이 좋았다.
무대에 있는 모습을 그려봤을 때, 어느 누구의 매력이 묻히지 않을 정도로.
각자 가지고 있는 특성이 다르기에 조화를 이루기도 수월할 듯싶었다.
“훨씬 더 많은 매력을 보여줄 수 있겠네요. 성현씨 이건 언제부터 생각한 거예요?”
적극적으로 성현의 의견에 지지표를 던지는 서자명의 말에 성현이 웃으며 답했다.
“문희진씨를 영입하면서 멤버 수도 적당하겠다, 퍼뜩 떠올랐어요.”
그리고 서지현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 역시 성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아요. 애초에 솔로 데뷔를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
서지현 말에 릴리와 문희진 역시 나쁘지 않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요즘 가요계의 흐름에 여자 솔로 혼자 데뷔를 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룹으로 데뷔를 한 뒤에, 한시적으로 솔로 활동을 하는 것에도 제약이 없으니, 우선 그룹 활동으로 인지도를 쌓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셋의 조합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문희진과는 이번에 처음 함께하는 거라 미지수지만.
서지현과 릴리는 이미 서로의 무대를 많이 봐왔고 함께 음악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럼 이렇게 세 명이 그룹이 되는 건가요?”
문희진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여겼는지 서지현과 릴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요. 4인조 걸그룹을 만들 계획이에요.”
성현의 말에 멤버들 모두 의아해서 성현을 쳐다봤다.
지금 이곳에 모인 멤버는 서지현, 릴리, 문희진 총 세 명이었기 때문.
요하를 껴서 혼성 그룹을 만들 생각은 아닐테고 말이다.
“남은 한 명은 오디션을 통해 뽑을 건가요?”
“아니요. 이미 생각해 둔 아티스트가 있어요. 여러분도 다 아는 사람인데.”
“우리가 다 아는 사람이라구요?”
성현의 말에 멤버들 모두 생각에 잠겼다.
당장 그들이 모두 아는 사람은 임하나와 주선아뿐이었다.
임하나는 아직 오디션 중에 있었고, 주선아는 이미 계약된 소속사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에 성현이 답했다.
“주선아씨를 섭외할 생각이에요.”
“네에?”
성현의 말에 릴리는 말이 안 된다는 듯 크게 반응했다.
주선아는 다른 기획사와 계약을 맺은 지 오래였다.
요즘 근황을 들어봐도 연습생으로 곧 데뷔가 머지않아 보이는 애를, 무슨 수로 데려온다는 거지?
“자세한 건 내일 주선아씨 기획사 대표님을 만나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계획이 그렇다는 것만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성현의 말에 짚이는 게 있는지 서지현이 손을 들더니 물었다.
“선아 소속사 대표면 김성민 대표님 아니에요?”
“네.”
그렇다. 아침에 심훈영이 성현에게 말했던 소개해준다는 사람.
김성민 대표가 여전히 주선아의 소속사 대표였던 것.
“그분 요즘 되게 바쁘다고 들었는데......”
김성민과의 약속은 사실은 심훈영의 공이 컸으나, 결국 심훈영을 모셔온 것도 성현이니 굳이 누구의 공이라고 따질 필요는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기획사를 차리겠다는 성현의 모습에 걱정부터 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성현의 숨겨진 능력은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중이니, 요즘 멤버들은 방심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쪽에 동의만 하면 전 좋을 것 같아요. 선아 비주얼도 괜찮고 실력은 이미 오디션으로 인정받았잖아요.”
“선아씨라면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해야죠.”
“저도 대환영이요.”
릴리의 말에 문희진 역시 환영의 뜻을 표하고, 서지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걸그룹 치고 세 명은 조금 적은 숫자였다.
여기에 주선아까지 합류하면 더욱 경쟁력이 생길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오디션에서 이미 이름을 날린 네 사람이기에 각각이 가지고 있는 팬층도 상당했다.
“김성민 대표랑 만나서 얘길 나누기 전까지 확실한 건 없으니까 일단은 세 분이서 함께 하는 걸 중점으로 두고 연습하시면 될 것 같아요.”
성현의 말에 멤버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례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 성현이 요하를 쳐다봤다.
“요하 넌 록밴드 보컬 어때?”
요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더 넥스트 슈퍼 록스타가 된 요하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