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문희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성현이 부른 마지막 영입자의 정체는 문희진이었다.
문희진, 그녀와 성현의 고발 이후 WE엔터테인먼트는 대대적인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WE엔터와 피해자인 문희진과의 계약은 자연스럽게 해지됐다.
그걸 안 성현이 평소 그녀의 음악적인 실력을 높이 사고 있었기에 영입을 제안한 것이다.
문희진 역시 다른 기획사의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고민 끝에 성현과 함께하기로 했다.
“어, 안녕하세요…….”
“…….”
성현의 작업실에 도착한 문희진은 모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첫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서지현을 비롯한 성현의 동료들이 그녀 쪽으로 달려들었다.
“기사 봤어요. 충격 많이 받았죠? 괜찮아요?”
“네, 네……?”
서지현은 기사를 통해 문희진의 일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걱정되어 물었다.
문희진은 서지현의 관심에 오히려 당황하여 몸을 뒤로 뺐다.
“나쁜 새끼들. 희진씨 그런 놈들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도 없어요. 시간 아까워. 다음에 또 그런 놈들 만나면 말만 해요. 내가 방송에서 생매장을 시켜 줄 테니까.”
어느새 릴리 또한 문희진 옆에 붙어서 격한 위로를 건넸다.
문희진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에 조금 당황하지만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만 보면 릴리씨도 은근 성격 무섭다니까.”
“은근히 아니라 대놓고 무서워졌어요.”
서자명과 주영준은 화가 잔뜩 난 릴리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장난으로라도 그녀를 건드리면 안 되겠다고 소곤거리는 두 사람.
성현은 언제나와 같은 멤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혹시 새로 온 문희진이 적응을 못 할까봐 걱정했는데 역시나 멤버들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만약 문희진의 과거를 몰랐다면 그녀를 영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과 같이 게임을 통해 오디션의 정보를 많이 아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정보를 사용했는지 지켜봐왔으니까.
음악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문희진이 오디션에 참가했던 이유도, 그렇게 간절하게 높이 올라가고 싶었던 이유도.
전부 동생을 위했던 문희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 성현은 마음을 바꾸었다.
‘섣부른 판단이었을지도 몰라.’
사실 따지고 보면 문희진이 편법으로 올라간 적은 없었다.
주어진 정보와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을 뿐.
물론 성현이 보기에 마냥 탐탁지는 않지만, 그녀가 그랬던 이유가 있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 떠나서 생각했을 때, 문희진은 무엇보다 실력이 좋고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훌륭했다.
“잠깐만 주목해주시겠어요.”
문희진에게 몰려들어 너도나도 위로를 건네던 멤버들이 모두 성현을 바라보았다.
성현은 자신에게 주목하는 멤버들을 둘러본 후, 문서를 공개했다.
“이전에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렸지만 전 기획사를 차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현재 설립 승인 허가를 기다리는 중인데 대표는 여기 계신 심훈영 선생님께서 맡게 될 겁니다.”
멤버들은 성현이 공개한 문서를 받아 들어 살폈다.
대표라는 말에 심훈영을 힐긋거리는 멤버들도 있었다.
언제 또 이런 준비를 다 해놓은 건지.
몇몇 멤버들은 오디션을 진행 중인 성현이 이 많은 준비를 해놓은 것에 감동의 눈초리를 보냈다.
성현은 잠시 기다린 후에 그들을 오늘 이곳으로 부른 결정적인 이유를 밝혔다.
“허가만 떨어지면 바로 계약을 맺고 싶은데 그 전에 여러분들의 의견이 궁금해서요. 저와 함께 음악을 하고 싶나요?”
성현이 멤버들의 대답을 기다리며 물었다.
멤버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이내 입을 뗐다.
모두가 모여서 이 일에 대해 상의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그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전 함께하고 싶어요.”
“저두요.”
서지현과 요하의 말을 시작으로 서자명, 릴리, 주영준, 문희진 모두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사무실은요?”
서자명이 가장 중요한 사무실 문제를 꺼내들었다.
모두가 제일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말.
그 질문이 터지자 작업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성현이 서자명에게 사무실 문제를 설명하려는 순간, 갑자기 심훈영이 성현의 말을 가로챘다.
“안 그래도 오늘 말씀드리려 했는데,”
“잠깐!”
심훈영은 재빠르게 성현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성현에게 자신이 대표 자리에 올라 모두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고 선언한 이후, 밤낮없이 생각한 결과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자신은 이름만 대표인 자리에 허허롭게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사무실 문제는 나도 틈틈이 혼자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에도 이곳 작업실에서 시작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 위치적인 열악함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춰지지 않았으니까.”
심훈영의 말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
“…….”
그의 말에 멤버들 모두 말이 없어졌다.
멤버들은 그 말에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발하지도 못하고 조용히 심훈영과 성현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성현의 작업실은 혼자 작업을 하기엔 충분할지 몰라도 기획사를 차려 멤버들 모두를 케어하기엔 부족했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건 차도 올라가기 힘든 좁은 오르막길을 매일 마주해야 한다는 것.
심훈영 역시 멤버들의 눈빛을 읽고는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오아시스 바를 팔면 큰돈은 아니더라도 서울 외곽에 조그마한 사무실 구할 정도의 자금은 마련할 수 있을 거야. 필요하면 연습실을 대여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일단 작게나마 사무실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때?”
심훈영의 말에 멤버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반갑고, 감사한 말이었지만 오아시스 바를 파는 것이 말은 쉬워도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었기에 섣불리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저희야 좋지만 오아시스 바를 파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번 일은 성현이 못지않게 나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니까.”
심훈영의 말에 멤버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못해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훈영은 모두의 의견을 모은 뒤에 마지막으로 성현을 돌아봤다.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은 성현 혼자뿐이었으니까.
“성현이 네 생각은 어떠냐?”
“오아시스바는 사장님께서 누군가의 쉼터가 되기 위해 만든 곳이잖아요. 바가 사라지면 술을 찾아 방황할 아저씨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서 싫어요.”
단호한 성현의 말에 심훈영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훈영은 성현의 말이 농담인 건지 진담인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심훈영의 표정을 본 성현이 이내 싱긋 웃었다.
“사무실 걱정 안 해도 돼요. 이미 구했으니까.”
성현의 말에 심훈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무실을 구했다고?”
심훈영뿐만이 아니었다.
숨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멤버들 역시 성현의 폭탄 발언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라서 성현을 쳐다봤다.
“네. 안 그래도 오늘 공개하려고 했어요. 지금 바로 보러 가실래요?”
***
성현의 사무실을 구했다는 말에 도착한 곳은 서울 강남의 한 커다란 건물 앞.
멤버들은 성현이 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노른자 땅인 강남으로 온 것도 모자라서 이 건물 앞으로 온 것이 의아했다.
“성현씨 여긴 대체 왜 온 거예요......?”
“B&V 엔터테이먼트? 여기가 뭐하는 곳이지.”
건물에 크게 적혀 있는 상호명을 본 요하가 궁금해서 곧장 휴대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 요하보다 심훈영의 대답이 빨랐다.
“B&V.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을 책임지고 있는 굴지의 클래식 엔터테인먼트 회사. 최근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인도 이곳 소속이라고 알고 있어.”
역시 굴지의 작곡가답게 장르가 다를지라도 업계의 굵직한 회사를 줄줄 꿰고 있었다.
심훈영의 설명에 멤버들은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멤버들은 더욱 성현을 의아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무실을 얻었다는 말도 긴가민가했는데,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음악과는 영 거리가 먼 곳으로 끌고 왔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저 설명으로 얼마나 대단한 기획사인지는 알겠는데, 대중음악과 거리가 먼 클래식 기획사에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일까?
“성현씨……?”
결국 참다 못 해 서자명이 대표로 성현의 이름을 불렀다.
성현은 그런 멤버들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나하나 보고 싱긋 웃으며 건물을 가리켰다.
백 마디 말보다 보여주는 게 설명이 빠를 거 같았으니까.
“일단 들어가 볼까요.”
성현이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멤버들은 으리으리한 건물 외관에 잠시 망설이더니 성현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하나둘 들어갔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1층에서부터 잔잔하게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성현을 알아보고는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의 아드님인 성현의 얼굴은 직원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 그 아들이 유명한 오디션에 나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원래 성현의 얼굴을 모르던 직원들까지 사장님의 아들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성현 또한 익숙한 듯 인사를 받아주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 모든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멤버들은 이 모습을 보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눈치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3층에 도착한 멤버들은 크고 넓은 시설에 다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성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3층에 있는 시설들을 하나하나 멤버들에게 보여주었다.
복도를 따라 여러 개의 연습실이 갖추어져 있고, 최신장비가 빵빵하게 갖춰준 스튜디오까지 없는 게 없었다.
“우와…….”
“괜히 유명한 게 아니네요.”
“게다가 장비들이 다 새 거인데요?”
멤버들은 일단 성현을 따라 둘러보긴 했지만, 여전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뒤를 따르던 멤버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엄청난 시설들을 구경했다.
한차례 안내를 마친 성현은 멤버들을 데리고 휴식 공간처럼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깐 앉아 계세요.”
성현이 멤버들은 앉히고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커피기계에서 자연스럽게 멤버들이 마실 커피를 타는데, 이를 본 서지현이 깜짝 놀라 성현에게 달려왔다.
“성현씨, 이런 거 막 만져도 돼요? 이러다 쫓겨나면 어떡해요.”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성현을 만류한 서지현은 누가 들을세라 작게 타박했다.
성현은 서지현이 왜 이러나 싶었다가 곧 멤버들의 불안한 눈빛을 확인하고 작게 웃었다.
“지현씨는 제가 남의 기획사 들어가서 커피 타 마실 사람으로 보여요?”
“네?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가 우리 기획사도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3층을 둘러보면서 남의 것이라고 생각해 조심조심 움직이는 멤버들이 재밌었지만, 여기서 더 했다가는 앞으로 멤버들의 어떻게 나올지 후환이 두려웠으니까.
성현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짧게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가 앞으로 함께 작업할 공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