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71화 (171/273)

171화

“좋아.”

“네?”

“하겠다고, 성현이 네가 차릴 기획사 대표.”

생각 외로 심훈영의 대답은 쉽게 나왔다.

지금까지 숱한 거절을 생각해 본다면 너무 선뜻 나온 대답이었다.

성현이 저도 모르게 놀라서 되물을 정도였으니까.

심훈영은 그런 성현을 보며 싱긋 웃었다.

“너 평판이 괜찮더라.”

“평판이요?”

성현은 심훈영이 예상과 다른 대답을 한 것으로도 놀라운데, 연이어서 알 수 없는 말만 하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심훈영이 성현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르면 말고.”

소극장 공연에서 서지현과 요하와 함께 앉아 성현의 공연을 본 심훈영.

그날 성현의 동료들로부터 들은 성현과 관련된 얘기가 심훈영의 마음을 울렸다.

심훈영은 성현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그릇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좋은 프로듀서가 되는 게 다가 아니겠어.’

회사를 차리고, 신뢰할 만한, 실력 좋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뒤로도 자신의 이익 때문에 변치 않을 거라는 희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성현이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살다 보니까 사람만큼 귀한 것도 없더라. 잘해. 구정물을 내가 막아줄 테니까 네 사람은 끝까지 챙기라고.”

“선생님…….”

심훈영 말에 성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드디어 하나의 산을 넘은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면 심훈영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좋은 음악으로 보답할게요.”

“뭘 또 그렇게까지 해. 우리 사이에, 정 없게. 앉아.”

심훈영은 성현이 너무 깍듯하게 고마움을 표하자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짓에 다시 자리에 앉은 성현은 신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훈영은 현실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래서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건데? 건물은 구했고?”

“구체적인 건 지금 팀원들 최종적인 의견을 듣고 결정하려구요.”

최종적인 의견.

심훈영은 아직 멤버들의 영입이 제대로 마쳐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되새겼다.

하지만 별 걱정은 들지 않았다.

소극장 공연에서 만난 성현의 동료들의 눈빛을 돌이켜보자면 그들 모두가 곧 함께하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 애들한테도 쉬운 결정은 아닐 테니까. 함께 못하더라도 너무 속상해 말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훈영은 성현을 챙겼다.

“당연하죠. 저였어도 쉽게 결정 못 했을 거예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성현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프로듀서만 믿고 따라가기는 힘든 세상이니…….’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치며, 휴대폰을 꺼내 멤버들에게서 온 채팅을 확인했다.

같이 오디션을 안 하면서 얼굴을 본 지 오래였지만, 단체 메시지방은 오늘도 활발했다.

언제나처럼 서로 연습한 영상을 올리고 서로의 피드백이 오갔다.

-서지현: 저는 오늘 다이어트로 샐러드 먹어야 해요…….

-서자명: 나도 닭가슴살인데

-릴리: 다들 어디꺼 드세요? 저 이번에 협찬 받은 거 남았는데 드릴까요?

음악 얘기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를 뭘로 할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도 넘쳐났다.

이미 동료들은 단순히 오디션에서 만난 사이가 아니었다.

오디션은 작은 계기였을 뿐, 모두가 이미 그 이상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성현은 멤버들의 대화 내용을 넘겨보다가 곧 타자를 쳤다.

-성현: 내일 저녁에 다들 시간 돼요?

이제 남은 건 멤버들의 선택이었다.

***

띵동-

아주머니는 초인종 소리에 현관으로 향해 성현인 걸 확인하더니 곧장 문을 열어주었다.

“성현이 왔어요.”

아주머니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는 성현의 아버지 이주성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이주성은 신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오고, 그러다가도 다시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집안을 서성거렸다.

저번 날 이후로 이 집에 성현이가 오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잔뜩 긴장한 이주성을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속으로만 웃으며 식탁에 음식을 차리는 데 집중했다.

곧 현관문 열리고 성현이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그때까지 집안을 서성이던 이주성은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뒷짐을 지고는 점잖게 성현을 쳐다봤다.

“왔냐. 밥 먹자.”

이주성은 무심한 듯 말하며 먼저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성현은 아버지의 말에 곧장 손을 씻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놀란 성현이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겨우 둘이 먹는데 이 정도까지 준비해놓은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눈에 훤했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성현이 너 앞으로 글로벌 오디션인가 때문에 외국 나간다며. 너 해외 나가기 전에 집밥이라도 많이 먹어야 된다고 하도 재촉을 하시니까 내가 오늘도 하루 종일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다….”

아주머니는 말도 말라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크흠. 밥 먹자.”

그 말에 이주성은 급히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이주성 몰래 성현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눈짓을 본 성현은 작게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성현은 크게 외치며 말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이주성이 말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불고기를 성현의 앞으로 스윽 밀었다.

성현은 그런 이주성을 힐끗 보고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풀어진 것이 느껴졌다.

아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주성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남자 혼자 살면서 얼마나 끼니를 챙기는지도 모르겠는데, 숟가락을 놀리는 폼이 영 시원찮았다.

“나물만 먹지 말고 고기를 먹어, 고기를.”

“먹고 있어요.”

“떡갈비 맛있더라.”

이주성은 성현의 앞 그릇에 떡갈비를 올려주며 말했다.

그 후에도 밥을 먹는 내내 성현에게 반찬을 챙겨주느라 바빴다.

성현은 결국 두 그릇이나 밥을 먹은 후에야 점심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점심에 이렇게 과식을 한 것은 오랜만이라 성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숨을 돌려야 할 지경이었다.

점심 식사 이후, 두 사람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기로 했다.

성현은 오늘 처음으로 이주성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이주성은 뭐든 알아서 하는 성현이 자신을 찾아와 조언을 구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표정이 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표정은 썩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

“네가 조언을 다 구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가 보구나.”

이주성 말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오늘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기획사를 설립하고 싶은데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이주성은 성현의 입에서 기획사란 말이 나오자 한동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성현의 꿈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기에 이 정도 포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주성이 누구인가.

클래식의 볼모지라고 불리는 한국에서 클래식 하나로 기획사를 차리고 한국의 클래식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학 교수 자리도 내어놓고 기획사 대표로 승승장구하고 있기까지 했다.

지금 성현에게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선배였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너도 날 봐와서 알다시피 기획사를 운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냐.”

기획사를 차린다는 말에 역시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말에 밀려오는 뿌듯함도 잠시, 뒤이어 현실적인 문제들이 밀려들었다.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놓치기 싫어요. 같이 음악을 할 방법이 제가 기획사를 차리는 방법밖엔 없어요.”

성현의 말에 이주성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였으면 고작 그런 이유로 기획사를 차리냐며 한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주성은 성현이 나오는 ‘더 넥스트 슈퍼스타’를 누구보다 열심히 본 시청자였다.

비록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성현이 음악을 향해 가진 열정과 진심을 이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말린다고 성현이 그만둘 아이가 아니란 걸 이미 3년 동안 충분히 느꼈다.

“…좋은 뜻인 건 알겠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야.”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조언 구하러 온 거고.”

성현의 말에 이주성은 이내 결심한 듯 물었다.

말릴 수 없다면, 가시밭길은 피하게 해주는 것이 부모이자 앞서 가본 선배의 역할이었으니까.

“사무실은 구했고?”

“당장 사무실을 구하긴 어렵고 제 작업실에서 시작할 생각이에요.”

“그 지하방에서 시작을 하겠다는 거냐?”

이주성이 순간 흥분해서 말하자 성현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봤다.

“지하방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

이주성은 아차 싶어서 입을 딱 다물었다.

성현이 집을 나간 이후, 몰래 걱정이 되어서 뒷조사를 했다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주성은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바꿨다.

“사무실 아직 못 구한 거면 아버지가 도움을 줄 순 있어.”

“조언을 구하러 온 거지 아버지한테 도움받자고 온 거 아닙니다.”

이주성 말에 성현은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이번만큼은 이주성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괜히 자존심 부리지 말고 도움 준다고 할 때 받아.”

성현과 이주성이 서로 말없이 기싸움을 벌였다.

성현은 형형한 아버지의 눈을 보고 이번엔 먼저 져주기로 했다.

지난 세월 동안 변변찮은 효도도 못 해 드리고 가슴에 대못만 박은 아들인데, 이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건데요?”

“사무실 구해주마.”

“아버지……!”

망설임도 없이 나온 통 큰 제안에 성현의 눈이 놀라서 커졌다.

이주성은 그런 성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바로…….”

***

이주성과의 회담을 마치고 며칠 후.

성현은 새로 단체 메시지 방을 하나 팠다.

오디션을 진행 중이라 소속사 계약이 불가능한 천소울과 임하나.

이미 기획사가 있는 조은별과 주선아.

네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이 초대된 메시지방에서 성현은 멤버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네 사람이 없음에도 좁은 작업실은 멤버들로 가득 찼다.

다들 모여서 성현의 말을 기다리는데, 노크 소리 들리더니 심훈영이 들어왔다.

“내가 제일 늦은 거야?”

심훈영이 좁은 작업실에 모여 있는 멤버들을 보며 물었다.

심훈영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자리에 앉아있던 멤버들 모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멤버들은 그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특히나 오아시스 라이브 바 공연에 함께하지 않았던 릴리와 주영준은 더욱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영준은 황송하다는 듯이 심훈영에게 달려가 두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선생님 팬입니다. 어떻게 그런 명곡을 만들어 내셨는지 존경합니다.”

심훈영은 이런 대접은 또 오랜만이라 흐뭇하게 웃어주며 주영준의 손을 꽉 쥐어주었다.

주영준은 따라다니던 연예인에게 악수를 하사받은 사람처럼 떨면서 심훈영과 악수한 손을 꼭 그러쥐었다.

이제 활동을 접겠다는 전설의 작곡가를 이런 지하방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예상 못 했다.

“이제 다 모인 거죠?”

심훈영까지 등장하자, 서지현은 이제 모일 사람은 다 왔다고 여기며 물었다.

그런데,

“아니요. 아직 한 분 더 남았어요.”

성현은 아직 아니라는 답과 함께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질문을 던진 서지현을 포함한 멤버들은 동시에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고 모두의 시선이 작업실 문으로 향했다.

성현은 그런 멤버들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작업실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성현이 선택한 마지막 영입 멤버의 등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