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달력을 확인한 성현은 메모들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달력을 가지고 방을 박차고 나갔다.
“이거 혹시 아주머니가 한 거예요?”
“놀래라.”
성현은 한달음에 부엌으로 향했다.
요리 중인 아주머니의 어깨 너머로 불쑥 달력을 내밀며 묻는 성현의 말에 칼질을 하던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성현을 봤다.
“죄송해요. 놀라셨죠.”
성현은 그제야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식칼을 확인하고 얼른 사과를 건넸다.
급한 마음에 그만 아주머니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
순간 흥분해서 소리친 것을 깨닫고 사과하는 성현을 보던 아주머니는 칼을 내려놓고 달력을 유심히 봤다.
“글씨체 보면 모르겠어? 딱 봐도 네 아버지 글씨체잖아.”
아주머니는 달력을 들여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다시 요리를 하는 아주머니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성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성현도 달력을 보자마자 아버지의 글씨체라는 건 단번에 알았다.
알았지만,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물어본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정말 이 메모를 아버지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어떤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디 그것뿐인지 아니? 너 나온다는 오디션 영상도 다 챙겨보셨어. 최근엔 제드인지 뭔가 하는 나쁜 놈 때문에 잠도 설치시는 것 같더라.”
아주머니는 성현은 쳐다보지 않은 채 칼질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연이어 나오는 믿기 힘든 말에 성현은 물끄러미 달력에 적힌 메모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다 보고 계셨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성현은 그동안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해 왔다.
아들을 집에서 내쫓을 정도로 반대하던 꿈을 계속해서 좇고 있었던 성현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누구보다 자신을 걱정하고 응원을 보내오고 있었다니.
성현이 아버지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던 찰나에 집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오셨나 보네.”
아주머니가 웃으며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집에 도착한 것이다.
***
성현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니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요 몇 년 동안 보이지 않던 아들의 모습에 성현의 부친은 잠시 멈칫했다.
“오셨어요.”
성현의 말에 성현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성현의 아버지가 건네는 겉옷을 받아주고, 성현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성현이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버지를 못본 지 3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그 사이 아버지가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였고, 충분히 정정한 나이였지만 자신이 커서 그런 건지 아버지가 늙어서 그런 건지 성현은 어쩐지 아버지가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묘하게 작아 보이는 아버지의 체구를 살피던 성현은 방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밥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성현의 아버지는 쇼파에 앉아있는 성현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그 말에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성현이가 오시면 식사 같이 하겠다고 기다렸지 뭐예요. 밥 다 됐으니까 다들 와서 앉으세요.”
아주머니의 말에 성현의 아버지가 성현을 쳐다봤다.
성현은 순간 당황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의 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성현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 식탁에 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는 어떤 말도 없고 젓가락질만 할 뿐이었다.
적막하다 못해 싸늘한 식탁 분위기를 본 아주머니가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성현이 너 온다고 갈비찜 좀 해봤는데 어때?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넉넉하게 해놨으니까 먹고 남은 거 가져가. 자취하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거 아니야.”
“괜찮아요. 들고 가는 것도 일이고.”
아주머니는 내도록 이 집에 살다가 자취를 하는 성현이 신경 쓰이는지 성현에게 재차 음식을 가지고 가라 하지만, 성현은 괜히 짐이 늘어난다고 거절했다.
완강한 성현의 태도에 결국 포기한 아주머니는 조금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내 보려 애써 밝게 말했다.
“참, 성현이가 여기 앞집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 왔더라구요. 식사 다 하시고 저녁에 시장하시면 말씀하세요.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시고.”
아주머니 말에 성현은 작게 기침을 했다.
그 말도 성현의 아버지는 말없이 식사를 이어가고, 아주머니는 마지막 말을 남긴 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방에는 성현과 성현의 아버지만 남겨졌다.
전화로 서로의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는 건 오랜만이기 때문에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많았지만 서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두 사람.
“아주머니 시켜서 음식 좀 싸달라 할 테니까 가져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던 성현은 툭 던져진 아버지의 말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그 말만을 던진 성현의 아버지는 성현의 시선을 피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성현은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대답했다.
“네.”
그뒤로 성현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이어가고, 다시 주방에는 침묵이 나돌았다.
잠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뜸을 들이던 성현의 아버지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자취는 할 만하고?”
“네.”
아버지의 물음에 성현은 여전히 다시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국그릇에 뭔가 귀한 걸 숨겨놓은 사람 마냥 눈을 떼지 않고 식사를 하던 성현을 물끄러미 보던 아버지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할 만하고?”
아버지의 물음에 성현은 조금 놀란 듯 그를 쳐다봤다.
서로 암묵적으로 음악에 관한 물음은 피해왔던 둘이었다.
그 길고 길었던 침묵을 뒤로 하고, 아버지가 먼저 이와 관련된 말을 꺼낸 것.
성현은 쥐고 있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좋아요.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재밌게 그 어느 때 보다 음악 하는 게 재밌어요.”
성현은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성현의 아버지는 성현이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하자, 놀란 듯 눈이 커지더니 그 역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성현의 아버지는 그 뒤로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땐 내가 조금 과했던 것 같다. 너한테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됐는데.”
아버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혼란스러워 아버지를 쳐다보는 성현.
그러나 성현의 눈에 들어온 아버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나지막한 목소리.
“미안하다. 더 일찍 사과를 했어야 하는데.”
김유혁의 말이 맞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성현의 아버지 성현을 똑바로 보며, 용기를 내서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성현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현 또한 아버지처럼 먼저 용기를 내지 못했기에 지금 그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 말하고 있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오디션 영상 속 행복해하는 널 보는데 내가 네 행복을 막고 있었다는 걸 알겠더라. 다 내 욕심이었던 거지.”
성현의 아버지는 성현이 프로듀서로서 오디션에 출현해 방송에 출연하고 화제가 되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 그런 소꿉놀이 같은 오디션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내쳤던 아들이 포털사이트 뉴스란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인기검색어에도 오르내리는 것을 알게 되자 처음부터 방송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뒤로, 그는 익숙지 않은 너튜브 라이브 방송까지 찾아보며 아들이 남기고 있는 궤적을 훑어왔다.
성현의 아버지는 그간 생각이 많았었는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고,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혹시라도 힘든 일 생기면 연락해. ……항상 응원하마.”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쑥스러운지 다시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는데, 이어지는 성현의 말에 그의 젓가락질이 다시 멈췄다.
“저도 죄송해요. 그때 그렇게 집을 나가면 안 됐는데. 생각이 짧았어요.”
“…먹자. 음식 다 식겠다.”
성현 아버지는 자식이 건넨 사과에 덤덤하게 말하며 식사를 마저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 보며 저녁 식사를 이어가는데, 이 모습을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는 주책맞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아주머니 저 밥 좀 더 주세요.”
성현은 마침 아주머니가 지켜보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눈물을 훔치던 아주머니 화들짝 놀라 소매로 급하게 얼굴을 훔쳤다.
“어, 그래. 국도 더 줄까?”
“국은 됐어요.”
“잡채는? 잡채 많이 남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성현이었다.
익숙한 아주머니의 손맛에 집에 돌아온 실감이 났는지,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런 성현의 반응이 기쁘기만 한지 분주하게 움직이며 반찬을 채워주었다.
성현의 아버지는 조금 망설이다 성현에게 물었다.
“오늘 자고 갈 거냐?”
“자고 가야죠. 이불이랑 다 준비해 놨는데.”
아주머니는 얼른 성현의 아버지를 거들며 말했다.
두 사람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던 성현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내일 스케줄이 있어서 다음에요.”
“그래. 집엔 아무 때나 오면 되는 거니까.”
성현의 아버지 입에서 집이란 말이 나오자 성현은 다시금 놀라지만, 티는 내지 않고 식사를 마저 했다.
“맞아요. 아무 때나 오면 되는 거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마디를 덧붙이면서.
***
성현이 본가에 들른 후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주최 측에서 공지 사항이 있다며 TOP 7을 모이게 했다.
그들은 한남동 건물에서 다시 만났다.
“성현씨 일은 어떻게 됐어요?”
요즘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임하나는 단체 스케줄 외에도 공식 개인 스케줄이 바빠, 그동안 성현과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임하나는 제드 프로듀서와 성현의 일을 기사로만 접했던 터라, 혹시 성현에게 무슨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한가득인 표정이었다.
“잘 해결됐어요.”
웃으면서 하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이 지나가면서 말을 얹었다.
“이성현씨한테 그런 엄청난 빽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빽이요? 무슨 빽이요?”
천소울의 말에 임하나가 궁금해서 재차 물었지만, 성현은 그저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자신만 모르는 사실이 있다니 참을 수 없는 임하나가 집요하게 성현을 캐물으려는 찰나, 참가자들이 있는 대기실로 매인 PD가 들어왔다.
참가자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마친 PD는 오늘 이 자리로 참가자들을 부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부로 여러분들의 공식 스케줄이 모두 종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앞으로 있을 미션에 대한 공지 시작하겠습니다.”
마침내 주최 측에서 마련한 2주간의 공식 스케줄이 모두 끝이 났다.
달콤하기만 했던 스타의 삶은 끝났다.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 참가자로서 ‘더 넥스트 슈퍼스타’ 오디션으로 돌아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