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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67화 (167/273)

167화

셋은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정리를 시작했다.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역할을 척척 맡아서 정리하는 모습은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 익숙하기만 했다.

“성현씨 음식물 쓰레기 봉투 어딨어요?”

“거기 싱크대 아래 서랍에 있어요.”

“분리수거 여기다 하는 거 맞아요?”

“네. 노란 통이 플라스틱이고 초록 통이 유리예요.”

“남자 자취방이 이렇게 꼼꼼할 줄이야. 우리 엄마보다 더 꼼꼼한 것 같아요.”

무엇을 물어봐도 집주인인 성현이 척척 알려주었다.

친절한 성현의 안내에 세 사람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금방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주선아는 성현의 꼼꼼한 성격에 혀를 내둘렀다.

어디를 열어도 깔끔했고, 무엇이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매일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자신의 엄마도 이곳에 오면 아무 소리도 못 할 거 같았다.

“이런 데서 평소 성현씨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보이는 거 같아요.”

“제가 완벽주의자인가요?”

“네. 완전. 가만 보면 고집도 엄청 세고 평소 성격은 온화한데 은근 승부욕도 엄청 강하고.”

서지현은 단호하게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본 성현의 모습을 읊어주었다.

줄줄 나오는 서지현의 평가에 릴리와 주선아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기까지 했다.

성현은 이게 과연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어서 얼떨떨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근데 성현씨는 누구 닮았어요? 부모님 얘긴 한 번도 안 하신 것 같아서.”

“그러게. 부모님 중에서도 성현씨처럼 완벽주의자인 분이 계세요?”

서지현의 물음에 성현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부모님이라는 말에 과거 아버지와의 일이 떠올랐다.

요즘 부쩍 아버지에 대해 떠오르는 일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면서.

어린 자신의 눈에도 지독한 연습벌레였던 아버지는 한결같았다.

성현은 악보 위에선 단 하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성현의 완벽주의자적인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성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물음에는 어물쩍 넘어가며 말했다.

“글쎄요. 밥도 다 먹었는데 이제 음악 들을래요?”

“성현씨 새로 작업한 노래 들려줘요. 궁금해요.”

“잠시만요. 제가 설거지만 마무리하고 들려드릴게요. 세 분이서 쉬고 계세요.”

성현의 말에 서지현과 릴리, 주선아는 성현이 작업하는 기계 앞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새로 만들었다는 성현의 곡에 대한 궁금증에 셋은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성현이 설거지를 빠르게 끝내고 물기가 묻은 손을 닦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지?’

성현은 일단 전화를 받았고, 통화가 연결됐다.

“네, 이성현입니다.”

성현이 대답을 하며, 상대방 목소리를 기다리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성현은 한 번 더 말했다.

“여보세요?”

재차 말을 하지만 수화기 너머는 여전히 묵묵부답.

성현은 혹시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서 휴대폰을 다시 확인하는데 분명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잘못 전화하신 것 같은데 끊겠습니다.”

성현은 장난 전화이거나 전화를 잘못 건 거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고 성현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

성현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거라 애써 부정하는데, 이번엔 더욱 명확하게 들려왔다.

“성현아, 나다.”

오랜만에 귓가에 꽂히는 무섭도록 익숙한 묵직하기만 한 목소리.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해 매섭게 소리 질렀던 그 목소리가 차분한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너무 놀란 성현은 당장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하얗게 비어버린 것처럼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지?’

성현은 오랜만에 하는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김유혁 아저씨와 관련된 일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안부를 먼저 물어야 할까?

“네, 아버지.”

그러나 정작 긴 침묵 후에 나온 말은 별 볼 일 없는 한마디였다.

성현은 긴장한 탓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고, 이후 성현의 아버지 또한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의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성현의 아버지였다.

“유혁 아저씨 만났다면서. 괜찮은 거냐?”

“네. 검찰 조사 들어갔다 하니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제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도 아니고.”

아무래도 김유혁이 아버지에게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성현이 아버지를 안심시키며 말했고, 그 말이 끝나자 이내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 말에 이어서 성현은 그동안 잘 지내셨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이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었지만, 자신을 향해 차갑게 돌아섰던 아버지의 등허리가 어른거려 말할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만을 반복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침묵을 깬 건 성현의 아버지였다.

“내일 저녁에 집으로 좀 올 수 있겠냐?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성현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싸웠던 마지막 날, 성현의 아버지는 성현에게 두 번 다시 집에 발을 들이지 말라 했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자신을 내쫓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가지 못할 것 같았던 집에 아버지가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냥 얘기나 좀 나누자는 거니까 너무 부담 느낄 필요는 없다.”

성현의 대답이 없자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조급함이 묻어 나왔다.

이를 눈치챈 성현은 아버지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내일 뵐게요.”

비록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던 아버지였지만.

지금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도 그였다.

성현은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전에 자신만만하게 천소울에게 말했던 것처럼 트라우마를 마주할 기회 말이다.

***

택시에서 내린 이성현이 도착한 곳은 한남동 고급 주택 단지.

성현은 택시에서 내려 오랜만에 방문한 동네를 둘러봤다.

조용하고 사람도 몇 지나다니지 않는 동네는 거대한 주택들의 담으로 가로막혀 살풍경한 광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십 몇 년 동안 오갔던 동네는 성현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같은 풍경이었다.

‘저기 빵집은 여전히 사람이 많네.’

주변을 훑어보자 성현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동네이기에 자연스럽게 과거 일들이 생각이 났다.

그의 발걸음은 아버지와 함께 자주 가던 빵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막 빵이 나왔는지 고소한 빵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중 쇼윈도에 비친 켜켜이 쌓여 있는 바게트가 성현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 바게트 참 좋아하셨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성현은 이내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띵동-

빵 봉투를 든 성현이 집 앞 벨을 누르자 누구냐고 묻는 것도 없이 바로 문이 열렸다.

성현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오르는데 자신도 모르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이제 계단을 오르면 정원이 나올 거고 정원을 지나면 아버지가 계시는 집이 나온다.

몇 년 전, 자신이 직접 박차고 나왔던 그곳.

성현이 아버지를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고민하며 계단을 오르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 한 명이 성현을 향해 한걸음에 달려왔다.

“세상에. 이게 몇 년 만이야. 밥은 잘 먹고 다녀?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성현의 집에서 10년째 일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였다.

반가운 모습에 성현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는 성현의 얼굴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이가 몇인데. 밥도 못 챙겨 먹겠어요?”

“성현이 네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도 나한텐 평생 애야. 나가더니 연락도 통 안 되고. 얼마나 걱정 했는 줄 아니?”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어릴 적부터 성현을 봐온 아주머니에게 성현은 자식 같은 아이였다.

성현이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 못지않게 걱정을 했었다.

“이건 뭐야? 빵이네?”

아주머니가 성현의 손에 들린 봉투를 확인하는데, 커다란 빵 봉투에는 바게트를 비롯해 각종 빵들이 담겨 있었다.

“그, 그냥 오랜만에 먹고 싶어서 사왔어요.”

성현은 아버지 때문에 사왔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변명하듯 둘러댔다.

그 속에서 바게트를 발견한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아버지 좋아하시겠다.”

아주머니는 얼른 들어가자며 성현의 등에 손을 대고 이끌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집 안은 사람이 없는 듯 조용했다.

“아직 퇴근 전이셔. 오시려면 좀 걸릴 것 같은데 배고프지? 과일이라도 먼저 줄까?”

“괜찮아요.”

아버지가 없는 빈 집.

그의 부재를 확인하자 성현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성현의 표정을 살핀 아주머니가 성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는 식사 준비를 마저 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빵 봉투도 들려 있었다.

혼자가 된 성현은 오랜만에 온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넓고 횅한 거실과 먼지 하나 없이 정리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 한 구석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자신과 아버지가 번갈아 앉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추억의 물건도 있었다.

유일하게 바뀐 것이 있다면 거실의 넓은 창을 통해 보이는 정원의 계절감 정도가 다였다.

‘그대로네.’

집안은 성현이 나갔을 당시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곧바로 성현은 자신이 쓰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현은 잠시 멈칫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성현의 방 또한 그대로였다.

먼지 하나 쌓여 있지 않은 방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방에서 생활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성현은 오랜만에 들어온 자신의 방을 구경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이 성현의 시선을 끌었다.

현재 연도의 날짜가 적힌 달력.

몇 년 전에 집을 나간 성현이 쓴 적 없는 달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달력엔 작은 글씨로 메모까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호기심에 달력을 가까이서 본 성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가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김유혁이 전했을 때도 실감 나지 않았던 성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달력에는 오디션 내 이성현의 활동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성현이, 첫 라이브 공연을 한 날.

성현이, 첫 음원을 공개한 날.

성현이, 음원 성적 1위를 기록한 날.

성현이, 첫 방송이 시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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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넥스트 슈퍼스타’를 지나온 성현의 무수한 발자취가 정갈한 글씨로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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