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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64화 (164/273)

164화

제드는 성현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얼마를 달란 건데?’

‘저번에 걔 다시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세 장 주시죠.’

‘이 자식 봐라?’

‘대표님 걔 좋아하셨잖아요. 그 정돈 투자하셔야죠.’]

두 사람이 준비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제드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주먹을 하고서 사무실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이번에는 문희진이 휴대폰을 꺼내서 녹음파일을 들려줬다.

[‘강남 에이스 클럽에서 11시 정도에 만났어요. 지하 2층에 끝 방으로 데려갔고 제드 그 사람 말로는 우리나라 금융업계 꽉 잡고 있는 사람이라면서 잘못 보이면 연예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싫다고 하면 때리기도 했어요. 기어오르지 말라고. 자기 말 거스르면 당장 회사에서 쫓아버릴 수도 있다고.’]

문희진의 계획을 듣고 용기 있게 나서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변조되어서 흘러나왔다.

그 음성들은 모두 명백하게 배후 인물로 제드를 말하고 있었다.

“너, 너……!”

제드는 흘러나오는 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파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문희진을 가리켰다.

문희진은 그동안 모아온 실제 피해자들의 증언들까지 몽땅 가져온 것이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뀐 판국에 문희진은 자신의 휴대폰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제드에게 물었다.

“이게 세상에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어줄까? 네 말처럼 유명 프로듀서인 너? 아니면 한낱 연습생인 나?”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고 제드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소파 등에 몸을 기대고 겨우 입을 열었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에 후들거리는 그의 다리와 함께, 볼썽사나울 정도로 흔들리는 그의 목소리.

“이건...... 그러니까...... 난 그냥 불쌍해서 좋은 마음으로 그랬던 거야.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전부 지들이 원해서 한 거라고. 지들도 술 몇 번 따라주고 스폰서 하나 제대로 물면 빵빵하게 데뷔할 수 있으니까 자발적으로 나선 거라고!”

제드는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며 변명하느라 바빴다.

성현은 그런 제드를 싸늘하게 쳐다봤다.

고작 이런 인간 때문에 지금까지 몇 명의 사람들이 고통받아 왔을까.

“당신은 가수를 꿈꾸는 연습생들 꿈을 이용한 쓰레기에 불과해. 프로듀서로서 절대 해선 안 되는 최악의 짓을 한 거라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잘못 없어. 물어봐. 저년들도 다 지들이 원해서 한 거라고! 그, 그래. 너! 문희진 너도 네가 괜찮다고 해서 간 거잖아!”

제드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드의 지목을 받은 문희진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시치미를 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오고, 제드의 표정은 더욱 사색이 됐다.

“천소울......?”

성현의 제드의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천소울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성현의 연락을 받고, 제드를 만나러 온 것.

천소울은 제드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쓰레기 같은 새끼.”

천소울은 세 사람의 대화를 밖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천소울에게 더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이와중에 제드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천소울에게 매달렸다.

더 이상 다리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지 거의 기다시피 천소울에게 다가온 제드는 천소울의 한쪽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듯 말했다.

“처, 천소울씨는 알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가수를 아끼는지. 그치? 응? 나만큼 가수들한테 잘하는 사람도 없었잖아.”

제드의 추한 발악을 지켜보는 천소울은 밀려오는 허탈함에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 온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를 안겨준 제드라는 사람이 너무도 별거 아닌 사람이라는 것에서 오는 허망함.

‘겨우 이딴 새끼 때문에 내가….’

성현이 원한 것이 바로 이거였다.

성현은 천소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천소울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상대의 본 모습을, 제드가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백 마디의 말보다 명백한 제드의 밑바닥을 까발리는 것이 성현의 목적이었다.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천소울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이딴 새끼가 뭐라고......”

바로 곁에서 바닥에 기듯이 천소울에게 애걸복걸하는 제드를 지켜보는 문희진 역시 마찬가지.

제드의 모습을 보며 분노와 허탈감이 밀려왔고, 이런 놈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던 동생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문희진은 어느새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동생이 받았던 아픔과 사라지지 않는 손목의 상처가 그녀를 짓눌렀다.

“더 상대할 가치도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

성현은 제드에게 욕할 힘도 잃은 것 같은 천소울과 문희진을 데리고 제드 사무실 나가려 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애원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악에 받친 제드가 성현 일행의 뒤에 대고 의미심장한 말을 퍼부었다.

“그래! 어디 맘대로 해봐라. 멍청한 새끼들, 순진하긴. 이게 전부 나 혼자 계획한 일일 것 같아? 그 녹음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상상도 못 할걸. 과연 니네들이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네.”

제드의 말을 들은 성현은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지만, 그럼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

WE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나온 세 사람.

따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데, 가는 동안 각자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성현은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저런 놈 때문에 고통 받은 시간이 아깝다 느끼는 거겠지.’

제드의 처참한 모습.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제드 때문에 버려야 했던 과거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특히 천소울.

문희진이야 동생의 복수를 위해서였다고 해도, 천소울은 과거 그 일 때문에 음악을 포기할 정도로 고통 받았었다.

“저 자신이 한심합니다. 고작 저딴 놈한테......”

한참동안 말없이 걷던 천소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 문희진 역시 동의하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또한 과거에 얽매이는 거예요. 당장 앞으로 우리가 할 일에 집중합시다.”

성현의 말에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확보한 증거를 어떻게 이용할지가 중요한 문제였고, 이는 세 사람의 논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성현이 큰 증거를 잡았음에도 마냥 기쁘지가 않은 건 제드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아마 더 큰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거겠지.’

녹음이 공개되면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킨다는 건, 이 일이 단순히 프로듀서 제드 선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의미했다.

“마지막 말이 조금 걸리네요.”

성현은 생각에서만 그치지 않고 두 사람에게 말하는데, 두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제드 혼자 독단적으로 벌인 일은 아닌 거 같아요. 표면적으론 제드를 내세우고 있겠지만 분명 숨은 배후 세력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뇌물이나 접대 규모가 결코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정도의 규모가 아니니까요. 거기다 2주 동안 WE엔터에 있으면서 제드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모습을 종종 봤어요.”

이어지는 문희진의 설명을 들은 성현은 WE 엔터가 껴있을 거란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선뜻 믿기 싫은 심정이었다.

WE엔터테인먼트.

국내만이 아닌 해외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대형 기획사로, 이곳에서 탄생한 인기 가수만 세어 봐도 상당히 많았고 이에 대중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기획사였다.

‘그런 대형 기획사조차 이딴 일을 벌이는데 다른 기획사들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거야.’

성현은 쇼비지니스 바닥이 더러운 건 알았지만, 막상 그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하니 환멸과 허탈함, 여러 감정이 들었다.

거기에 작은 회사도 아니라, 많은 지망생들이 열망하는 큰 소속사가 대놓고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에 큰 회의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속사를 세워야겠다는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내 가수만큼은 내가 지키고 싶어.’

자신의 가수를 이런 진창 속에 뒹굴게 할 수는 없었다.

성현은 반드시 기획사를 차릴 것이며 멤버들에게 결코 음악 외적인 것으로 고통 받지 않도록 만들겠노라 스스로 다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소속사와 계약을 맺겠다는 멤버들이 있다 해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파일이 공개되면 한국 연예계 전체에 큰 파장이 올 건 확실한데 저희 셋만으로 감당이 가능할지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요. 상황이 커지더라도 제드가 벌였던 짓은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됩니다.”

그러나 당장 성현에게는 대형 소속사와 싸울 수 있는 인맥이나 빽이 없었다.

가뜩이나 스폰서도 없는 성현과 천소울이기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제드의 말처럼, 두 사람이 앞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가진 게 없는 성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많은 관심을 끄는 게 중요해요. 대중들이 이 문제를 이슈화시킬수록 저쪽에서도 코너에 몰릴 테니까요.”

“그거라면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최근 언론사 인터뷰가 많아져서 아는 기자님들이 많거든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이 화색이 돌아 덧붙였다.

안 그래도 요즘 두 사람의 주머니는 각종 기자들의 명함으로 터질 지경이었다.

그중에는 여러 번 인터뷰 자리에서 만나 꽤 가까워진 연예계 기자들도 있었다.

“저도 그쪽으론 손을 좀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천소울은 이번 한국 대표 중에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천소울이 이번 일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면 확실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음원차트 1, 2위 곡을 만든 성현 또한 인지도가 상당했다.

“다들 아직 오디션 중인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두 사람의 각오를 들은 문희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걸로 쫄면 프로듀서 할 자격 없죠.”

“음악으로 장난치는 새끼를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성현과 천소울은 문제없다며 곧장 오케이를 외쳤다.

하지만 성현은 이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리기 전 먼저 알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소속사를 차린 후 영입할 거라고 알렸던 동료들이었다.

대형 기획사들의 달콤한 제안 뿌리치고 있는 와중, 성현이 사회적 이슈가 될 일의 한 가운데 가는 것이 걱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분명 같은 생각이겠지. 그래도 기사를 통해 아는 것보다 미리 알려주는 게 나을 거야.’

성현은 머릿속으로 반격의 시나리오를 정리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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