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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63화 (163/273)

163화

제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성현을 만나자 깜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미소 지었다.

오늘 왜 성현이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성현씨도 이런 데 좋아하는 줄 몰랐네. 여기가 물이 좋긴 해요?”

제드는 그러면 그렇지, 라는 눈으로 성현을 훑으며 말했다.

이제 한국 TOP 7으로 이름도 좀 날렸겠다, 유명세 좀 탔다고 바로 이런 곳을 들락날락하는 성현이를 향한 비웃음.

결국 네놈도 자신과 다를 것 없다는 안도감이 섞인 비아냥이었다.

“전 오늘 처음 와서 잘 모르는데 PD님은 자주 오시나 봐요.”

“나도 자주 오는 건 아니고 오늘은 비즈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건데 딱 만났네. 나도 클럽 이런 데 시끄러워서 딱 질색이거든.”

정말 질색이라는 듯이 인상을 구긴 제드의 능청스러움에 성현은 당장에라도 그의 얼굴을 갈기고 싶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었다.

제드는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와 다른 성현의 분위기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성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이성현씨는 오늘 왜 온 거예요? 친구들 따라서?”

“아니요. 누굴 좀 데리러 왔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봐요.”

성현의 말에 제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 얘길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제드는 뚝 대화를 그만뒀다.

오늘 자신의 목적은 여기서 히히덕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시 화장실 들어가려는데, 성현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문희진이다.

성현과 문희진는 증거를 잡기 위해 계속 통화를 하면서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성현은 전화를 끊더니 재빨리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일 분 일 초라도 틀어지면 오늘 계획은 성공할 수 없으니까.

“지금이에요.”

성현은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자 얼마 안 있어, 바로 위 지하 1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제드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넋이 나갔다.

저 멀리 지하 2층으로 향하는 통로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이 씨부랄, 이거 놓으라고!”

클럽의 가드들은 이리저리 무선을 넣으며 지하 2층 통로로 집결하는 중이었다.

“어쭈? 너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 공경도 몰라?!”

“내 나이가 어때서! 백 세 시대에 58년생은 클럽도 못 들어가게 하고. 세상이 말세야 아주!”

엄청난 수의 술 취한 아저씨들의 무리가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딱 봐도 형편없이 취한 취객 한 무더기가 막무가내로 클럽에 들어가겠다고 서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지하 1층은 이미 뚫렸는지 VIP만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는 통로에 클럽 가드 대부분이 몰려들어야 막을 수 있는 판국이었다.

“아니, 왜! 왜 막아! 우리도 손님이라고! 이 밑에 뭐 있는지 구경만 한다니까?”

“형씨들, 싸게 싸게 비켜보지. 응? 아! 좀, 뒤에서 고만 좀 밀어!”

“우리가 이래 봬도 오아시스 패밀리여! 우리 애들 건들면 다 잣되는 거라고!”

한바탕 난리가 된 통로는 너도나도 외치는 고함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제드는 룸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아시스 패밀리는 또 뭐야.”

술 취한 남자들의 모습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멀뚱히 싸움을 지켜보는 제드를 확인한 성현은 보디가드들이 취객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틈을 타 복도 끝 방으로 달려갔다.

뒤를 힐긋 보니 제드는 아직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싸움 구경하듯이 고개를 빼들고 있었다.

‘제발.’

성현은 문희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길 바라며 곧장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때, 반쯤 흘러내린 드레스 차림의 문희진을 소파에 강제로 눕히려던 남자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성현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희진을 데리고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자신이 걸치고 있던 자켓을 벗어 문희진에게 덮어준 성현은 아수라장이 된 통로 쪽으로 향했다.

룸에 있던 남자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는지 고함을 질렀다.

“이, 이! 이봐! 제드! 제드! 이 새끼는 또 어디 간 거야. 이봐, 여기 지배인!”

남자는 풀어헤친 앞섶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한 채 얼굴이 벌게져서 자리에 일어났지만, 이미 꽤나 취한 상태이기에 휘청거리는 걸음이었다.

뒤늦게 통로로 얼굴을 내밀고 고함을 쳐봐도 복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성현과 문희진이 가드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클럽 밖으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클럽 밖에서 나간 지 얼마 안 있어서, 클럽에서 행패를 부렸던 술 취한 남자들이 대거 몰려나왔다.

남자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성현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실제로 조금 취하기는 했지만, 반쯤은 실감 나게 연기를 펼쳐준 오아시스 단골 아저씨들을 향해 성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들 고마워요. 갑자기 연락받아서 당황했을 텐데.”

“고마우면 언제 한 번 들려서 노래 한 곡 뽑구 가.”

“그래! 우리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야? 그런 섭한 소리 말어.”

“노래만 뽑으면 서운하죠. 술도 한 잔씩 돌리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남자들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잠깐 와서 몸싸움 벌인 것밖에 없는데, 이 정도면 아주 후했다.

“그럼 우린 오늘 임무 완성했겠다 이만 간다.”

“집으로 바로 가시게요?”

“무슨 소리여. 2차로 오아시스 가야지. 또 보자고.”

남자들 성현에게 인사를 한 후, 삼삼오오 어깨동무를 한 채 떠났다.

시끌시끌했던 아저씨들이 빠져나가자 길거리에는 성현과 문희진만 남게 됐다.

문희진은 쌀쌀한 날씨에 성현의 자켓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아깐 갑자기 왜 들어온 거예요?”

“문희진씨가 소리 질렀잖아요.”

“......최대한 참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문희진은 좀 더 취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버티고 있었던 것.

남자에게 일부러 처음부터 독한 술을 막 먹인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문제는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이 문희진의 생각보다 훨씬 거셌다는 점이었다.

“제정신이에요? 거기서 뭘 더 어떻게 참겠단 겁니까?”

성현은 같이 계획을 세우고도 더 무모한 짓을 벌이려 했던 문희진의 말에 조금 화가 나서 따져 물었다.

문희진은 성현의 흥분한 모습에 살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성현은 방금 전까지 험한 꼴을 당한 문희진을 떠올리고 화를 참아냈다.

자신이 화를 낼 상대는 문희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증거는 충분해요. 그 사람들 대화 내용 전부 다 녹음했어요.”

성현은 문희진에게 녹음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대화에는 제드와 룸으로 들어온 남성이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얼마를 달란 건데?’

‘저번에 걔 다시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세 장 주시죠.’

‘이 자식 봐라?’

‘대표님 걔 좋아하셨잖아요. 그 정돈 투자하셔야죠.’]

접대 자리에 나왔던 남자와 제드의 대화 내용이 흘러나왔다.

성현과 문희진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걸로 제드의 자백까지 받을 수 있을까.’

성현이 애매하게 정보가 감춰진 대화에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희진도 역시나 같은 생각이었는지 성현에게 먼저 제안했다.

“이거 가지고 내일 당장 그 자식 찾아가요.”

문희진의 말을 들은 성현,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한 사람 더 데려갈 생각입니다.”

“누구요?”

“있어요. 문희진씨 말고도 제드랑 지독한 인연을 끝내야 할 사람이.”

***

다음날, 성현과 문희진은 함께 WE 엔터테이먼트로 향했다.

WE 엔터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성현은 천소울과의 채팅방에 다시 들어가 확인했다.

-성현: 내일 1시까지 WE 엔터 사옥 앞으로 와요. 제드 프로듀서를 만날 겁니다. 트라우마, 끊을 때도 됐잖아요.

성현이 보낸 메시지는 천소울이 읽었다고 표시는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답장은 없는 상태였다.

성현은 초조하게 대화방을 연신 확인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

‘꼭 왔으면 좋겠는데.’

성현은 이번 기회로 천소울이 트라우마를 끊어내길 바랐다.

그러는 중에 택시는 WE 엔터 사옥에 도착했다.

문희진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가시죠.”

문희진은 성현에게 결연하게 말하고 두 사람 WE엔터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제드 프로듀서를 만나러 왔는데요.”

문희진이 1층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은 곧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성현과 문희진은 저번처럼 출입증을 받아 곧장 제드의 사무실로 향하는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제드는 문희진과 성현이 함께인 것에 놀라더니 곧 성현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어제 그 남성에게 성현의 인상착의를 듣고 문희진을 데려간 사람이 성현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

“이성현씨, 미쳤어요? 어제 그 자리가 어떤 자린 줄 알고 기어들어 갑니까?”

제드는 성현과 문희진이 녹음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렇기에 자신의 주제 파악도 못 한 채로 지금 둘에게 길길이 날뛸 수 있었다.

“이성현씨 하나 때문에 몇 명이 피해를 본 줄 알아요? 당신 때문에 우리 회사 연습생들 앞길이 막혔다고! 지금 이 일 앞으로 다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피해 보상 청구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피해 보상은 저희 쪽에서 청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제드는 성현의 말을 듣고 휙 성현을 보더니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지?”

제드는 성현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물었지만, 성현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남의 꿈 이용해서 성 접대시키는 건 최악 아닌가?”

“회사 관계자들끼리 비즈니스 겸 술자리 좀 가진 거 갖고 성 접대라니? 진짜 어이가 없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드가 시치미를 떼자, 그동안 참고 있던 문희진이 나섰다.

“쓰레기 새끼. 몸 더듬고 강간하려는 게 어떻게 비즈니스니?”

“문희진씨 몰랐는데 허언증이 있어? 난 그런 걸 목격한 적이 없는데 멀쩡한 사람들 강간범을 만들어버리네.”

제드 프로듀서는 문희진의 반박에 웃음을 터트리며 부정했다.

전혀 당황하는 낌새도 없는 걸 보면, 이런 식으로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문희진은 반대로 자신을 매도하려는 제드를 보고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서려다가, 한쪽 팔을 들어 자신을 제지하는 성현을 보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내가 허언증인지 당신이 허언증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누가 들어주긴 하고? 백날 떠들어봤자 니네들 얘기 아무도 안 믿을걸? 내가 당신들 딱해서 말해주는 건데 가요계에서 생매장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눈치껏 꺼지세요. 알겠어요?”

제드가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 위풍당당하게 말하자, 성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 꺼내고 이리저리 무언가를 조작했다.

곧, 휴대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제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룸에서 했던 추악한 대화가 녹음기를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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