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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62화 (162/273)

162화

WE엔터를 찾아가고, 우연히 문희진과 마주친 그날 밤 KBC 홀.

성현은 오늘 주최 측에서 잡혀 있던 라디오 일정을 소화하러 이곳에 와 있었다.

하지만 성현은 생방송으로 라디오 출연을 하는 내내 정신이 딴 곳에 팔려있었다.

방송이 끝난 후, 몰려드는 팬들 때문에 퇴근이 어려워진 천소울과 함께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에도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도 스폰서가 없어서 대중교통이나 하다못해 택시를 타러 나가야 했는데, 팬들이 너무 몰려 방송국에서 나설 수 없어진 바람에 주최 측에서 배려를 해준 것.

그리고 그런 성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천소울은 미간을 좁혔다.

‘어디 아픈가.’

오늘 성현은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천소울은 아까 전부터 방송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성현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뭐라고 말을 걸기에는 성현이 워낙 생각에 깊게 잠겨 있어, 쉽사리 먼저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 성현의 집 앞까지 도착할 때까지 결국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입을 달싹이다가 닫은 천소울을 눈치채지 못한 성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집 들어가서 푹 쉬어요. 아까 보니까 기침 조금 하던데 자기 전에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자요.”

성현이 먼저 차에서 내리는데, 천소울이 따라 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의아해서 쳐다보는데 거기에 한술 더 떠, 천소울은 운전을 하는 기사님을 그대로 보내기까지 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천소울의 행동에 멍하니 있던 성현이 얼떨떨해서 물었다.

“왜 내렸어요?”

“무슨 일 있습니까?”

천소울은 성현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아까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대로는 집에 가봤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생겼으니까.

“지금 저 걱정돼서 내린 거예요?”

평소 같으면 천소울의 이런 모습에 퍽이나 감동 받았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성현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얼른 천소울을 보내고 타개책을 찾으려는 성현은 천소울에게 괜찮은 척 웃어 보였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늦었는데 왜 따라 내렸어요. 기다려봐요. 택시 불러줄게.”

성현이 휴대폰으로 택시 부르려는데, 천소울은 그런 성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앞장서 걸었다.

이대로 돌아갈 거라면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걸으면서 얘기 좀 해요.”

성현은 천소울을 보다가 이내 그의 뒤를 따라갔다.

***

“오늘 어땠어요? 라디오 출연은 처음이었잖아요.”

천소울의 말에 성현은 작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의 포문을 여는 것은 성현의 몫이었는데, 오늘따라 천소울이 천소울답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네.

“재밌었어요. 김영신 진행자님 입담이 장난 아니던데요? 왜 라디오 시청률 1위인지 알 것 같았어요.”

천소울은 평소와 달리 성현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작하고, 성현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오디션이 시작된 지도 벌써 몇 개월 흘렀네요.”

“그러게요. 시간 참 빠르죠? 난 아직도 천소울씨 처음 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예선전에서 성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자신을 붙잡고는 싸클 아냐고 물었던 성현의 모습.

그 뒤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천소울은 힐끔 옆에서 걷는 이성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성현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좋았습니다. 이성현씨랑 같이 무대하고 음악 하는 그 순간이 좋았어요.”

천소울의 진심 어린 말에 성현은 조금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천소울이 이렇게까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건 드물었기 때문.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하는데, 천소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프로듀서 이성현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우리 처음 봤을 때 말했잖아요. 저 같은 프로듀서는 없을 거라고.”

성현은 천소울 말에 웃으며 농담을 건네며 말하는데, 천소울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성현은 하하, 웃던 얼굴을 점차 풀었다.

“전 이제 이성현씨를 믿는데 이성현씨는 저를 믿나요? ”

“......”

성현은 순간적으로 천소울의 질문에 말이 없어졌다.

그제야 지금까지 천소울이 구구절절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이유를 알게 된 것.

천소울은 귀신같이 성현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부러 이러한 질문을 하기 위해 포석을 깔아놓던 것이었다.

성현은 모두 털어놓을까 하다가 말을 골랐다.

“프로듀서면 당연히 자기 가수를 믿어야죠.”

“그럼 말해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강경한 어조로 요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겠다는 천소울의 말에 성현은 입을 닫았다.

오늘 스케줄 내내 넋이 나가 있던 성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절대 예삿일이 아니었다.

‘난감하네…….’

성현은 프로듀서로서 천소울이 음악에만 신경 쓰길 원했다.

괜히 이런 일까지 관여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고, 무엇보다 이제 이 문제는 천소울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문희진의 개인사가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성현으로서는 섣불리 입을 열기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 당장 천소울에게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이 문제를 얼마나 깊게 개입을 할지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또한, 개입을 한다면 어떻게 문희진씨를 도와줘야 할지도 정리해야 했다.

성현은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고민이 있는 건 맞지만 천소울씨를 못 믿어서 말 못 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제 스스로도 아직 정리가 안 돼서,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거예요. 미안해요.”

성현은 결국 천소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천소울은 성현의 말을 듣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둘러대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생각이 정리되면 그땐 꼭 말해줘요.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싶으니까.”

천소울은 그렇게 덧붙이고는 발걸음을 떼었다.

성현은 그 말에 생각에 잠기고, 이내 두 사람 모두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성현이 갑자기 천소울을 불렀다.

“……만약 천소울씨라면 천소울씨와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내야죠. 외면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텐데 그때 가서 더 후회하기 싫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튀어나오는 천소울의 말에 성현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후회.

성현은 그 말을 머릿속에서 되짚어 봤다.

천소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처럼 이번 일을 그냥 외면한다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 것이 분명했다.

성현은 남은 삶을 그렇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고민하던 성현을 떠미는 그 말에 성현은 곧장 문희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애초에, 도울지 말지보다는 어떻게 도울지가 더 걱정이었으니까.

-이성현: 문희진씨 계획,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

이른 아침부터 성현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서지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지현: 성현씨, 제드PD가 아직도 결정 못 내렸냐고 연락이 왔는데 뭐라고 답장할까요?

-성현: 계약 못 하겠다 하세요.

-서지현: 그래도 돼요?

-성현: 네. 괜찮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세요.

성현이 답장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현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지현: 거절했어요! 마음 바뀌면 다시 연락 달래요.

서지현의 문자를 확인한 성현은 어제 내도록 문희진과 주고받았던 대화방에 들어갔다.

-문희진: 내일 오전에 WE 사옥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더 자세한 정보가 나오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어제저녁 문희진으로부터 온 문자였는데, 그후에 아직까지 답장이 없었다.

성현은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하게 휴대폰을 켰다가 다시 끄기를 반복했다.

‘일이 틀어진 건가.’

성현은 저녁이 다 되어갈 때까지 연락이 없자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리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성현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다급하게 문자 확인하는데 드디어 문희진으로부터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문희진: 내일 저녁 강남에 있는 클럽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정확한 장소 정해지면 다시 연락 드릴게요.

예상대로 문희진 역시 접대 제안을 받았다.

문희진은 직접 증거를 모으기 위해 접대 자리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그걸 성현에게 알린 것이다.

성현은 머릿속으로 세운 계획을 확인하고 어딘가로 급히 연락을 돌렸다.

조그마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기에 서두르는 성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

다음 날, 문희진이 말했던 시끌벅적한 강남 클럽의 지하 1층.

제드가 문희진을 데리고 비밀스러운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 2층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나왔다.

둘은 망설임 없이 바로 복도 끝에 위치한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세팅 되어 있었다.

아슬아슬한 드레스 차림인 문희진이 제드 모르게 까득 이를 악물었다.

‘동생도 이와 같은 풍경을 수도 없이 봤겠지.’

다시금 화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지만, 겨우 참아냈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자리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희진씨 미래가 결정돼요. 데뷔하고 싶으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고 절대 눈밖에 벗어나는 짓은 하지 말라고. 알겠어요?”

낮게 웃으며 말하는 제드의 말에 문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내 노크 소리와 함께 룸에 남자가 들어왔다.

제드는 그 사람을 보고 황급히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고, 제드의 손짓에 문희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인사를 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앉으시죠.”

제드가 직접 자리를 안내하고 문희진한테 눈치를 보내자, 문희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 옆에 바짝 붙어 앉고 눈웃음을 흘렸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며.

“말씀드렸던 애입니다. 뭐해요? 인사 안 하고?”

제드의 말에 문희진은 남자에게 인사를 하며 술을 따라주었고, 그걸 시작으로 술자리가 진행됐다.

“저번에 보내주신 건 잘 받았습니다. 다음엔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걱정마. 늦지 않게 들어갈 거니까 애들이나 잘 준비해놔. 저번처럼 수준 미달인 애들 데려다 놔서 술맛 떨어지게 만들지 말고.”

제드와 남성의 대화 이어가고, 문희진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귀를 쫑긋 세웠다.

문희진은 남자의 술잔이 빌 때마다 잔을 채워주는데, 남자가 은근슬쩍 손을 뻗어 문희진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를 본 제드는 그게 신호라도 되는 양,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드는 아무것도 못 본척 씨익 웃으면서 문을 가리켰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오늘도 순조로웠다.

문희진은 생긴 걸로만 봐서 꽤 도도하게 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잘해주고 있는 듯싶었다.

오랜만에 괜찮은 애를 건졌다는 생각에 제드가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실로 향하는데 화장실에서 익숙한 남자를 만났다.

“이성현씨?”

성현은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 입구에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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