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제드 프로듀서와의 만남을 마치고 WE엔터에서 나오자, 성현에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문희진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문희진은 성현과 헤어진 후 WE 엔터테이먼트 사옥 앞에서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서지현은 아까 마주쳤던 문희진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자 조금 놀랐는지 조심스레 성현과 문희진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문희진은 서지현을 힐끗 보며 말하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 뿐,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성현은 문희진이 제드 프로듀서 방에서 나온 것부터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봤다.
‘뭔가 있구나.’
성현은 우선 옆을 돌아보며 서지현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현씨,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요? 약속 있으면 먼저 가셔도 돼요.”
“아니에요. 저 그럼 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전화하세요.”
서지현은 문희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성현과 문희진 둘만 남게 되자, 문희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미안해요. 다른 사람이 듣기 좀 그런 내용이라서요.”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성현의 물음에 문희진은 멀어져가는 서지현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성현을 돌아봤다.
문희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현을 살폈다.
서지현이 사라지고 나서 돌변한 그녀의 모습은 숫제 신문이라도 할 법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성현은 문희진의 얼굴을 보고 그녀 역시 제드에게 남다른 볼일이 있는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설마 서지현씨 때문인 건가요?”
“네. WE 엔터쪽에서 서지현씨한테 영입 제안을 했습니다.”
성현의 이어지는 말에 문희진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 코웃음을 한 번 친 문희진은 환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성현에게 충고했다.
“잘 들어요. 서지현씨 절대 계약시키면 안 돼요. 이성현씨가 옆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계약 못 하게 막으셔야 해요.”
문희진은 지난날 대기실에서 제드 프로듀서의 이름을 들었던 천소울과 같이 흥분하여 말하고 있었다.
성현은 문희진이 갑자기 발끈하며 말하자 당황했지만, 곧 천소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여자 연습생들한테도 손을 댔다 했어. 그럼 혹시?’
성현은 혹시 그녀 또한 제드와 관련된 피해자인가 싶어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만약 성현이 제드 프로듀서에 관련된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는다면?
이 문제가 천소울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일인 만큼 먼저 얘기를 꺼낼 순 없었다.
성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둘러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성현은 최대한 문희진에게 돌려서 물었지만, 문희진 역시 처음 천소울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이유를 설명해주려 하지 않았다.
“부탁인데 그냥 제 말을 그냥 믿어주세요. 안 그러면 정말 서지현씨가 다칠 수도 있다구요.”
화를 내던 문희진은 간절한 어투가 되어서 성현에게 말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어 덤덤한 척 가장한 성현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거라 여긴 것 같았다.
성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있는 건 확실해.’
제드 프로듀서와 관련해서 상처받은 사람이 주위에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성현은 게임 속 인물인 천소울과 현실의 문희진이 같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혹시 제드 프로듀서와 관련된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
“말을 해주셔야 저도 서지현씨를 설득하죠.”
성현은 문희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
천소울뿐만 아니라 문희진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성현에게 정보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희진은 성현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건지 시선을 피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성현은 한숨을 삼키며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네요. 이유도 없이 서지현씨의 계약을 막을 순 없습니다. WE엔터정도면 대형 소속사고 2달 안에 데뷔를 시켜준다는 조건까지 내걸어서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 같거든요.”
성현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하자, 문희진이 다급히 성현을 붙잡았다.
이대로 성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말할게요..! 계약하면 안 되는 이유.”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문희진은 한참동안이나 입술을 짓씹으며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성현은 차분하게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아마 천소울처럼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컸으니까.
망설이던 문희진은 결국 제드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동생이 자살 시도를 했어요.”
성현은 예상치 못한 문희진의 말에 놀라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문희진은 성현의 반응이 놀랍지 않은지,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그 후로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매일 죽고 싶단 말을 달고 살았고 삶의 의욕도 완전히 잃었어요. 뭐가 힘드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도 없어서 속만 타들어 가는데 어느 날 걔 친구가 찾아왔어요.”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천소울의 말을 들어서 이 뒷말이 예상이 갔지만, 제발 그 예상이 빗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동생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 안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라면서...... 동생이 지속적으로 성 접대를 강요받았다고 했어요.”
문희진은 애써 태연하려고 말했지만, 이 말을 뱉는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 떨렸고, 눈물을 참으려는 듯 연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현실은 잔혹했다.
천소울이 말했던 피해자 중 한 명이, 문희진의 여동생이라니.
문희진도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그녀의 동생이라면.
게다가 이 일이 최근에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저런 곤욕을 치러야 했던 동생과, 그녀의 가족들의 겪었을 고통.
성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에 눈을 즈려 감았다.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하느라 잠시 말을 멈췄던 문희진이 평정심을 가장하며 계속 말을 뱉었다.
“동생은 가수 지망생이었고 당시 WE 엔터와 연습생 계약을 맺었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3개월이 뒤면 데뷔를 할 수 있다고 신나서 떠들던 모습이. 그 말만 믿고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어요. 매일 연습을 하느라, 월말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동생은 밤늦게 들어오거나 연습실에서 쪽잠을 자는 듯했어요.”
매일매일 말라가는 여동생은 아이돌이 되려면 이 정도 체중감량은 해야 한다며 밝게 웃는 아이였다.
이번에는 아쉽게 1등을 못 했지만, 다음 달에는 꼭 연습생 중에서 1등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순수한 아이이기도 했다.
1등을 많이 할수록 센터로 데뷔할 기회가 높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3개월이 6개월이 됐고 6개월이 1년이 돼가도록 데뷔를 하지 못했어요. 계속 늦어지는 데뷔에 가족들 모두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제드 프로듀서 그 새끼가......”
문희진은 처음 사실을 알게 된 날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직 생각만 해도 분이 안 풀리는지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느새 문희진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않으며, 문희진은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자신의 분노를 고스란히 내뱉었다.
“처음엔 남자 몇 명이랑 술만 마시면 데뷔를 시켜준다 했데요. 정말 그것만 하면 바로 데뷔를 시켜주겠다고. 그 얘기를 들은 동생은 당연히 싫다고 거절했는데, 그 새끼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두 번 다시 가요계엔 발도 못 들이게 하겠다고 협박을 했대요. 가수를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니네 가족 인생까지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자기랑 회사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그 어린애한테 협박을 했던 거예요. 결국 동생은 몇 번을 접대 자리에 불려 나갔지만 데뷔는 없었어요.”
문희진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성현은 손이 부르르 떨렸고 차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천소울을 통해 제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사연을 들으니 도저히 그를 가만둬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가 되새겨졌다.
“그 어린 애가 가족들한텐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다가 자살 시도까지 했던 거예요.”
성현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지금으로서 그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분은 지금 괜찮나요?”
“많이 나아졌어요. 평범하게 대학 생활도 하고 있고. 그래도 아직 그때 그 상처 때문에 노래를 못 들어요. 팔목에 남은 자해 흉터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나요? 그때 받은 상처는 절대 사라질 수 없어요. 전 제 동생 인생을 망가뜨린 그 자식을 가만둘 수 없었고 그때부터 WE엔터랑 제드는 어떻게 끌어내릴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요. 다행히 비슷한 일을 겪은 연습생들 몇 명이 증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문제는 처벌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거였어요. 그런데 마침 더 넥스트 슈퍼스타 오디션이 개최됐고 거기 WE엔터가 스폰서로 참가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지원하게 됐어요. 최대한 높이 올라가서 WE엔터 눈에 띈 다음에 계약할 생각으로.”
문희진의 말을 들은 성현은 왜 그렇게 그녀가 절박하게 위로 올라가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생에 대한 복수,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진정 그녀가 원하던 거였다.
“그 과정에서 제가 아는 정보로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뺏은 건 제 잘못이지만 저도 동생의 복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애초에 즐겁게 음악을 하기 위해서 오디션에 도전한 자신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문희진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이용하면서까지 위로 올라가려고 했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됐다.
성현으로서는 그런 그녀를 질타할 자격이 없었다.
처음부터 오디션에 임하는 자신과 그녀의 목적이 달랐으니까.
그녀에게 게임을 통해 얻은 오디션의 정보는 사활이 걸린 기회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계약 제의는 받았나요?”
“네. 저랑 서지현씨 말고도 다른 여성 참가자들한테도 제의가 갔다고 들었어요.”
“이대로 계약을 할 건가요?”
“네. 증거를 모으는 게 우선이니까요.”
“문희진씨 혼자 어떻게 증거를 모으겠단 거죠? 지금까지 이런 일을 벌여왔으면서도 말이 새어나가지 못한 건 그만큼 저들이 철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결코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현의 말에 문희진은 잠시 주춤했지만, 그녀의 두 눈에 서린 증오는 지워질 줄 몰랐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제가 직접 그 자리에 나가면 돼요.”
문희진에 선언에 놀란 것은 성현이었다.
“그 자리라뇨? 설마 본인이 직접 접대 자리에 나가겠단 건가요?”
“네. 그것만큼 증거를 모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도 없잖아요.”
“너무 무모한 방법이에요. 그러다 잘못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제가 다치더라도 증거를 모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문희진은 단호하게 말하고 더 이상 협상할 여지가 없다는 듯 입매를 굳게 닫았다.
성현은 그 모습에 이 자리에서 문희진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알겠어요. 오늘 여기서 더 길게 얘기하는 건 무리인 것 같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렇다고 이대로 문희진은 하루살이처럼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성현이 문희진에게 번호를 요구하자, 문희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번호를 알려줬다.
모두가 무모한 일이라고 문희진을 말리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성현의 모습을 보아하니, 단순히 서지현의 계약을 돕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니라고 느껴졌다.
제드 프로듀서의 추악한 일면을 밝혔을 때, 이 정도로 놀라지 않은 사람은 성현이 처음이었다.
문희진은 그가 무슨 생각인지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번호를 교환한 뒤, 두 사람이 얘기를 마무리 짓고 헤어지려는데, 성현은 멀어지는 문희진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해진 생각을 애써 정리하려 했다.
‘문희진씨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문희진의 행동이 무모해 보여도 무어라 쉬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현은, 그녀가 무모하게 일을 벌이기 전에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