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WE 엔터테이먼트 사옥에 도착한 성현과 서지현은 곧장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두 사람을 발견한 안내 데스크 직원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제드 프로듀서님 만나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되죠?”
“서지현씨와 일행분 맞나요?”
미리 약속을 전해 들었는지 직원은 서지현의 이름을 확인했다.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고개를 들더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서지현과 함께 온다는 일행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현이었던 것.
‘더 넥스트 슈퍼스타’가 진행될수록 성현 역시 방송에 얼굴을 많이 비추었다.
“이, 이성현 프로듀서?”
“네, 맞습니다.”
“잠시만요.”
데스크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직원은 상기된 표정으로 성현과 서진현을 번갈아 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출입증 가지고 3층으로 가시면 돼요.”
데스크 직원은 성현과 서지현에게 출입증 두 개를 건네줬다.
성현과 서지현은 방문 출입증으로 게이트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무슨 말 먼저 꺼내야 할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성현은 이제 몇 분 뒤에 제드 프로듀서의 얼굴을 본다는 생각에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러야 했다.
그 바람에 애써 정리했던 생각들이 다시 복잡해졌다.
엘리베이터는 곧 3층에 도착했다.
성현과 서지현이 내리자 3층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성현과 서지현의 얼굴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드 프로듀서님 찾아온 거죠?”
“네. 미팅룸이 어느 쪽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은 서지현과 성현을 3층 복도 끝 문 앞으로 안내하고, 노크를 했다.
“PD님 서지현씨 오셨습니다.”
“잠시만.”
문 안쪽에서 넘어오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
제드의 목소리다. 성현은 마음을 다잡으며 주먹을 굳게 쥐었다.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이내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나왔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성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문희진씨......?”
“이성현씨?”
문희진.
그녀가 WE엔터 제드 프로듀서 사무실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음원 미션까지는 성현과 함께 진출했지만, 아쉽게 TOP4에 들지 못하여 탈락한 상황이었다.
오디션에서 마주칠 일이 없자, 그 이후 한 번도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우연히 만나더라도 설마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안 그래도 근황이 궁금했는데 왜 WE 엔터에?’
어쨌든 성현과 같이 게임 내용을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성현은 종종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문희진은 다른 탈락한 참가자들과 다르게 오디션 이후 두문불출하며 SNS에 근황을 올리거나,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제드 프로듀서의 사무실에서 튀어나오다니?
놀란 건 성현뿐만이 아니었다.
문희진 또한 성현을 이곳에서 마주친 것에 적지 않게 놀랐는지 눈이 커진 상태.
성현과 문희진은 서로 놀라서 뭐라 말도 못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들어오세요.”
성현은 일단, 당장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우선이었다.
문희진은 사무실에 안에 있는 제드와 서지현을 번갈아 본 후, 사무실을 나갔다.
둘은 그렇게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스치듯 헤어졌다.
“성현씨, 괜찮아요?”
서지현은 크게 당황한 성현에게 낮게 속삭이듯 물었다.
성현은 서지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사무실 들어갔다.
드디어 성현의 눈앞에 제드 프로듀서가 서서 둘을 반기고 있었다.
“반가워요. 프로듀서 제드입니다.”
제드는 서지현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겨우 도착한 호랑이굴이었다.
성현은 이성을 잃지 말자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WE엔터에서 문희진을 만난 건 성현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성현 또한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제드 프로듀서의 존재였다.
“안 그래도 지현씨 얼굴 직접 뵙고 말씀 나누고 싶었는데 먼저 연락을 다 주시고. 고마워요.”
제드는 호탕하게 사람 좋게 웃으며 서지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이런 계약은 처음이라 궁금한 게 좀 많아서요.”
“설마 이쪽이 같이 오겠다고 하신 분?”
“네. 이성현씨라고 저랑 같이 오디션 지원했던 분이세요.”
“이성현씨야 워낙 유명해서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반가워요. TOP7 올라간 거 축하드리고.”
제드 역시 성현을 알아보고 마찬가지로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성현은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방금 전 다짐이 무색하게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제드가 손을 내밀고 있는 상황인데도, 가만히 제드 프로듀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새끼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드네. 턱수염은 또 왜 기른 거야.’
찬찬히 그의 모습을 훑어보고 있자니, 제드의 외모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전에 좀 날렵했을 얼굴에는 욕심 많은 사람처럼 여기저기 나잇살이 붙었고, 뾰족 나온 턱에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턱수염이 간간이 솟아 있었다.
작고 흐리멍덩해 보이는 눈은 화려한 안경으로 가려놓은 상태였다.
옷은 유명 프로듀서인 만큼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는데, 그 모습으로 사람 좋은 척 웃고 있는 것이 더 재수가 없었다.
“성현씨......?”
서지현은 악수도 받지 않고 심상치 않게 제드 프로듀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성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성현은 서지현의 말에 그제야 손에 힘을 풀고 제드의 악수를 받았다.
“이성현입니다.”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다 오시고. 두 분이 친한가 봐요?”
다행히 제드는 성현이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호의적인 미소를 매단 채 둘의 모습을 살폈다.
제드는 성현과 서지현을 자리로 안내하며 말하고,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에게 차 세 잔을 달라고 부탁했다.
“네. 오디션 내내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저한텐 없어선 안 될 은인 같은 분이에요.”
“오, 그렇군요. 팀으로 무대를 준비한 건 알았는데 탈락하고도 연락을 주고받을 줄은 생각 못 했네요.”
두 사람의 관계를 안다는 식으로 말하며, 제드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더 넥스트 슈퍼스타’ 열성팬이라고 밝혔다.
제드는 성현과 서지현의 관계를 흥미로워 했는데, 제드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성현 정도 이름값이 있는 참가자가 아직 오디션이 끝나지 않아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오디션에서 만난 동료를 위해 이곳까지 발걸음을 했다는 것.
제드가 생각하기에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지현씨가 이런 쪽으론 전혀 아는 게 없어서 걱정이 되기도 하고, 저도 WE엔터에서 스폰 계약 제안을 받은 게 있어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제가 먼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성현은 제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제드 또한 별다른 의심 없이 곧장 계약 건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엔터테이먼트에 소속된 입장으로서 성현이 자신의 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기도 했고, 또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제드는 미리 프린트 해둔 계약 조건을 서지현에게 보여주며 이와 관련된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 커넥트 앱으로 드렸던 계약 조건과 동일하니까 편하게 읽어보시면 돼요.”
그렇게 말한 제드는 서지현이 부담감 없이 계약서를 읽을 수 있도록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제드의 말에 서지현과 성현은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데, 역시나 성현의 눈을 사로잡는 건 데뷔와 관련된 항목이었다.
제드 역시 두 사람이 그 항목에 눈을 멈춘 것을 느꼈는지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자랑하듯이 말했다.
“장담하는데 저희 쪽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겁니다. 계약만 하면 최소 두 달 안에 데뷔 할 수 있는 기획사는 여기밖에 없어요.”
“그게 가능해요? 두 달이면 너무 촉박하지 않나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기획사 능력인 거죠. 그래서 제가 장담했잖아요. 저희 쪽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거라고.”
제드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WE 엔터테이먼트라면 업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기획사.
말로만 들으면 그럴듯한데, 저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무서운 점이었다.
“혹시 이와 관련된 자세한 플랜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게 왜 궁금하죠?”
“서지현씨 말고도 이번 오디션에 참가했던 여성 참가자 여러 명한테 영입 제안을 했다고 들어서요.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데뷔시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궁금하네요.”
성현이 별다른 추가 설명이 없는 계약 항목을 가지고 집요하게 묻자, 제드는 조금 표정을 구기고 되물었다.
이때 여직원이 셋의 차를 가지고 오고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 속 제드는 차를 마시며 성현을 빤히 봤다.
1순위 프로듀서가 제 발로 찾아왔다길래 단순하게 복덩이가 굴러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제드는 이내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뗐다.
“그건 영업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겠는데. 회사 노하우를 계약도 안 한 외부인한테 설명할 의무는 없습니다.”
제드 프로듀서는 끝까지 대답을 피했지만, 성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계약을 할 당사자한테는 설명할 의무가 있는 거 아닌가요? 외부인이 절 지칭하는 거라면 전 여기서 빠질 테니까 지현씨한테만 이라도 설명을 해주시죠.”
성현이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제드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성현은 점점 더 기분이 나빠져 가늘게 눈을 뜨고 제드가 어떻게 나올지 살폈다.
서지현이라는 인재를 놓쳐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역시 처음부터 서지현을 자신의 소속사 인재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성현씨, 뭐가 걱정인지 아는데 WE 엔터 정도 되는 대형 소속사에서 설마 아티스트 뒤통수를 치겠습니까?”
제드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묻자 성현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전면전을 걸어봤자 손해였다.
여기에서는 물러서기보다 강수를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럼 저희도 어쩔 수 없네요. 계약 건에 대해선 좀 더 생각을 해보고 답변 드리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제드는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곧 다시 여유를 보이며 웃었다.
마치 여기서 자신이 손해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러세요. 생각 정리되면 연락 주세요, 그럼.”
제드는 끝까지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이대로 보내기에는 서지현이 꽤나 아까운 패였는지 잠깐 표정이 굳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괜찮은 척 말하는 제드를 두고 성현과 서지현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에서 나섰다.
저토록 기분 나쁜 호랑이굴에서 오래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수작에 걸려들었을지 가늠해보는 성현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떠렸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네.’
가지고 있던 패를 모두 써버린 성현은 앞으로 계약과 관련된 비밀을 어떻게 알아낼까 고민하며 WE 엔터 사옥에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뒤에서 성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얘기 좀 하죠.”
뜻밖의 인물이 성현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