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다음 날 오전, 작업실을 벗어난 성현이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자 곧 카페 문이 열리더니 서지현이 들어왔다.
“성현씨 오늘 스케줄 있는 거 아니었어요?”
“네. 이따 저녁에 라디오 스케줄 있어요.”
성현은 말을 하며 생각난 김에 주최 측에서 보내준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행히 오늘은 일정이 오후 하나 뿐이기에 시간은 널널했다.
“7시까지만 방송국에 도착하면 되니까 지현씨랑 얘기할 시간은 충분해요.”
성현이 싱긋 웃으며 말하는데 진동벨 울리고, 서지현이 음료수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서지현은 음료수를 마시며 의아해서 물었다.
갑자기 어젯밤 늦게 성현에게서 만날 수 있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늦은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는 것은 분명 무슨 급한 용건이 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되었다.
서지현은 어제 성현에게서 문자를 받은 뒤로 내내 생각했던 일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WE엔터 때문에 그래요? 거긴 성현씨 말대로 안 가기로 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성현은 천소울에게서 제드 프로듀서에 대해 들은 이후, 서지현에게 WE 엔터와는 절대 계약을 하면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현의 말에 서지현은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서지현은 아직도 그 일이 걱정이 되나 싶어서 저도 모르게 타이르듯 말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성현의 입에서는 그것과 정반대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아직 제드PD한테 캐스팅 답변 안 보냈죠?”
“네.”
“오늘 저랑 같이 WE엔터테이먼트 가요.”
자신의 말이 끝나자 서지현이 놀랐는지 콜록거렸다.
마시던 주스가 목에 잘못 걸린 듯했다.
성현이 서지현과 오전부터 만날 약속을 잡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소속사에서 계약 제의를 보내면, 당연히 해당 아티스트에게 고민할 시간을 준다.
성현은 서지현이 WE 엔터테인먼트의 제드 프로듀서에게 캐스팅 요청을 받고 아직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성현은 반대로 이 상황을 이용하여 제드를 만나볼 생각을 한 것.
“......어젠 그렇게 가지 말라 하시더니 갑자기 왜요?”
서지현은 성현이 계약을 극구 말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WE엔터로 가자고 하는 것이 이해 가지 않아 물었다.
하지만 지금 성현의 입장에서 자신의 계획을 지금 서지현에게 전부 말해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천소울의 사생활이 얽혀있었고, 그의 트라우마를 자신의 입으로 남에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
‘거기다 자세한 내막을 알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고.’
서지현의 성격상 이번 일과 관련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면 서지현 본인도 나설 것이 뻔했다.
성현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당장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제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여성 참가자들을 모으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계약하러 가잔 거 아니에요.”
“그럼요?”
“저번에 기획사 차릴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다른 회사들은 어떻게 운영되고 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조사가 조금 필요해서요.”
성현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말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유를 짜내 둘러댔다.
이 이유를 듣고 서지현 또한 납득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성현의 기획사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진지해지기까지 했다.
‘이러니까 더 섣불리 말을 못 하겠어.’
서지현의 성격상 멤버들과 관련된 일이기에 두 손 두 발 걷고 돕겠다고 나설 테고, 혹시 모를 위험에 그녀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다른 이들까지 위험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하긴. 성현씨는 스폰서도 없으니까 따로 자문을 구할 곳이 없겠네요.”
“네. 그래서 서지현씨랑 제드 프로듀서가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떤 식으로 계약을 맺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음, 그러니까 진짜로 계약을 하라는 건 아니고 계약을 원하는 척하라는 거죠?”
“네. 바로 그거예요.”
성현의 말을 들은 서지현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쉰다.
사실 어제 성현의 연락을 받고 서지현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던 성현의 말이 기억나, 혹시 생각이 바뀌었나,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나,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었다.
‘다행이다. 혹시나 WE 엔터랑 계약을 맺으라고 하는 줄 알고 놀랐는데.’
서지현은 그런 생각을 숨기며 성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성현을 도울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같이 가요, 우리.”
서지현은 그 말을 하며 휴대폰을 들어 WE 엔터 쪽으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앞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성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서지현의 통화에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서지현입니다. 네, 계약 건 때문에 연락 드렸어요.”
‘서지현씨요? 잠시만요. 아, 네. 더 넥스트 슈퍼스타 서지현씨 맞나요?’
“네.”
‘제드 프로듀서님 연결해드릴게요.’
WE 엔터테이먼트 관계자와 이야기를 마치자, 연결음이 들렸고 잠시 후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거슬리지 않는 중저음의 목소리.
‘네, 서지현씨. 연락 안 올 줄 알고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전화 줘서 고마워요.’
“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찾아가서 직접 얼굴 보고 얘길 나누고 싶어서요.”
‘나야 좋지. 오늘 시간 돼요?’
“네.”
서지현은 오늘 성현의 스케줄이 오후 늦게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바로 대답했다.
‘그럼 음.....3시간 후에 WE엔터 사옥으로 오세요. 로비에서 제 이름 대면 출입증 줄 거예요.’
“네. 저기, 제가 이런 계약이 처음이라서 아는 지인이랑 같이 갈 생각인데 괜찮나요?”
서지현은 앞에 앉아 있는 성현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제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이내 흔쾌히 허락의 말을 했다.
‘뭐,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따 봐요.’
서지현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성현은 마침내 제드 프로듀서를 만날 기회를 잡았다.
***
카페에서 제드 프로듀서가 말한 대로 시간을 보낸 성현과 서지현은 시간에 맞춰 WE 엔터테이먼트 사옥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WE 엔터테이먼트에 가는 내내 성현의 머릿속은 제드 프로듀서와 관련된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했다.
‘제드 프로듀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곧장 천소울을 아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그냥 만나자마자 면상을 갈겨 버릴까?’
성현은 생각이 길어질수록 속이 뒤집힐 듯이 화가 올라오는 바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천소울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제드 프로듀서와 만날 약속을 잡긴 했지만, 이런 일은 성현 또한 처음이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디션의 일이라면 게임 플레이를 해본 경험으로 적이 어떤 생각인지 알고, 전략이라도 생각해볼 텐데.
문제는 이번 일이 순도 100프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
천소울만 생각하면 만나자마자 진짜로 면상을 갈기고 싶었지만, 그건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드 프로듀서에게 약점이 잡히는 꼴이 되어버린다.
‘일단은 만나서 계약 건을 핑계로 대화를 나눠보자.’
성현은 당장 방법은 없지만, 일단 그와 만나 대화를 나눠보기로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다행인 건 생각보다 지현씨를 통한 접근이 꽤 괜찮다는 거야. 어쨌든 저들이 탐내는 참가자 중 하나니까.’
그런 의미에서 서지현과의 계약을 핑계로 그를 만나는 건 꽤나 좋은 방법이었다.
어찌됐든 그는 여성 참가자들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더 넥스트 슈퍼스타’를 통해 인기가 높은 서지현은 그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참가자들 중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서지현을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그들이 서지현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다면, 그들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건지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게 성현의 계산이었다.
“우리 다음 역에서 내리는 거죠?”
“그럴걸요?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볼게요.”
서지현이 WE 엔터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데, 그녀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를 받은 서지현은 다급하게 휴대폰을 덮고 성현의 눈치를 봤다.
“뭐예요? 스팸 문자라도 온 왔어요?”
“네? 아니, 그건 아닌데.....”
서지현은 말끝을 흐리더니 재빠르게 대화를 돌렸다.
“맞다, 우리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거 맞아요.”
“지현씨, 무슨 문제 있는 거예요?”
성현은 서지현이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리자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이번 제드 프로듀서의 접근도 그렇게 비슷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서지현에게 벌어질까 염려되었다.
서지현은 걱정 어린 성현의 물음에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다른 기획사한테서 온 연락이에요.”
서지현은 계속해서 여러 기획사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소속사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이성현과 함께 음악 하고 싶다는 마음.
단지 그 마음 하나만으로 수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서지현은 이 일을 성현이 안다면 마음을 쓸 것을 알기에 성현에게 감추려고 했다.
“성현씨 때문 아니니까 미안해할 거 없어요. 그냥 조금 고민이 돼서 그래요.”
서지현은 혹시, 먼저 건넨 성현의 제안 때문에 그가 미안해할까 봐 먼저 선수 치듯 말했다.
성현은 서지현의 말을 듣고서 문득 다른 동료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기다려주고 있는 거구나.’
성현은 이 사실을 깨닫고, 동료들에게 미안하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소속사를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동료들은 성현이 소속사를 차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면서도 혹시 성현이 부담을 느낄까 봐 그러한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다.
‘앞으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내가 울타리가 돼 주고 싶어.’
천소울을 비롯해 릴리 또한 연예계에서 강압적인 폭언과 속박을 당했던 상처가 있었다.
앞으로 남은 동료들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당장 서지현만 해도 천소울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제드 프로듀서가 있는 WE 엔터와 계약을 맺고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 거였으니까.
성현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힘으로 소속사를 차리고 싶었다.
더 이상 자신의 동료들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겠다.’
자신이 동료들에게 그 마음을 보답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기획사를 설립하는 것뿐이란 생각을 하는 도중에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다.
“성현씨, 뭐해요. 우리 여기서 내려야 돼요!”
서지현이 성현의 옷 소매를 붙잡고 말하자, 성현이 그런 서지현을 향해 말했다.
“지현씨, 조금만 기다려줘요. 최대한 빨리 준비할 테니까.”
성현은 지하철에서 내리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챈 서지현은 말없이 그저 웃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