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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58화 (158/273)

158화

성현은 천소울이 새벽에 자신의 작업실을 떠난 후에도 뜬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이대로는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성현은 아침이 밝자마자 김인호 AD와 약속을 잡았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아이고. 더 넥스트 슈퍼스타 한국 대표 TOP7에 선정된 귀하신 분께서 미천한 저를 다 만나주시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김인호는 성현이 오자마자 일어나서 두 손으로 미리 주문한 커피를 건넸다.

그의 장난을 받고도 성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김인호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잘 지내셨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성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며 자리에 앉자, 김인호는 그 표정을 보고 성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김인호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마주 앉았다.

안 그래도 연락을 받고서 이번에는 또 어떤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연락을 했나 싶었다.

이제 본선 5라운드까지 마치고 한국 대표가 되었으니 정말 친목의 자리인 줄 알았던 김인호였다.

굳은 성현의 표정을 보아하니 또 무언가 일이 생긴 거 같은데, 김인호는 못마땅한 내색도 내비치지 못하고 성현에게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에요?”

“AD님 혹시 WE 엔터테인먼트 관련해서 뭐 아는 거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성현은 또 앞뒤 다 잘라먹고 자신의 용건부터 들이밀었다.

김인호는 WE 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이번 1위는 가수 천소울과 프로듀서 이성현, 두 사람.

게다가 둘은 스폰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스폰서에 흥미가 생겼나 싶은 김인호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WE? 이번에 스폰 참가한 엔터잖아.”

“네. 거기서 이번에 스폰 참가한 프로듀서나 가수 스폰서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사소한 거라도 다 알려주세요.”

이것 봐라.

김인호가 눈을 빛냈다.

성현이 정말로 스폰서에 관심을 가질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스폰 계약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하지만 김인호의 속내와는 다르게 성현은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다.

어쨌든 제드가 소속된 회사는 WE 엔터테인먼트.

성현은 이 회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생각난 것은 주최 측, 주최 측 중에 자신과 가까운 김인호한테는 정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온 것이다.

물론 김인호에게서 제드 소속사인 WE 엔터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해서 제드 프로듀서를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드가 회사 몰래 따로 일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령 성현이 뭔가를 안다 해도 그가 죗값을 치르고 용서를 빌게 할 만한 힘도,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정을 다 안 마당에 이대로 물러나기는 싫었다.

최소한 성현은 프로듀서로서 천소울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그래서 성현은 김인호를 떠올렸다.

제드와 그의 소속사와 관련된 사소한 정보라도 얻기 위해서.

“이유는? 이성현씨는 스폰서 관심 없잖아.”

성현은 이미 두 번이나 스폰 계약을 거절한 상태.

거기다 재차 스폰서는 관심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랬던 성현이 갑자기 한 기획사에 대해 묻자 의아했던 것이다.

“관심 있어요. AD님 말처럼 혼자 준비하는 게 쉬운 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혹시 다음 스폰 계약 기회가 있으면 계약을 맺을 생각이에요.”

“진짜?!”

성현의 말에 은근히 떠보면서도 설마 했던 김인호가 기뻐서 되물었다.

성현은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김인호가 안심하게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하지! 휴, 내 속이 다 시원하네. 것봐, 내가 말했지. 스폰서 없으면 힘들 거라고. 그러니까 진작 내 말 듣지.”

“그러니까요. 진작 AD님 말 들을 걸 그랬어요.”

김인호는 뒤늦은 성현의 부탁에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면서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성현은 있는 대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김인호를 더욱 띄워주었다.

덧붙여 성현은 김인호가 관심을 가지게끔 술술 바람을 불어 넣었다.

“이왕 계약하는 거 대형 소속사랑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관심 가는 회사 중 하나가 WE 엔터거든요. 혹시 뭐 아는 게 있나요?”

성현의 물음에 한껏 신이 났던 김인호 AD는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도 딱히 아는 정보는 없는데.”

“그렇군요......”

성현은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김인호 말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김인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탁자를 쳤다.

“뭐 들은 게 있긴 한데 이게 중요한 정보인지는 모르겠네.”

“괜찮습니다. 그냥 뭐든 말씀해주세요.”

지금 성현은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시급한 상황이었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리송한 얼굴을 한 김인호를 성현이 재촉해댔다.

“그래? 이건 어제 내 동료 AD가 해준 말인데 최근 WE 엔터가 제드 프로듀서 이름을 내세워서 어린 여자 참가자들한테 마구잡이로 영입 제안을 하고 있다나 봐. 조건도 파격적이야. 계약 후 바로 데뷔.”

“여자 참가자들이요?”

“그렇다니까. 뭐,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사소한 거라도 말해보라길래 말해 봤어.”

김인호의 말을 들은 성현은 곧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

원했던 제드 프로듀서의 이름이 나오긴 했으니, 무언가 실마리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서지현씨한테 했던 제안도 저런 비슷한 제의 중 하나였겠지?’

어린 여성 참가자에게 마구잡이로 영입 제안을 했다면, 서지현에게 했던 제안도 그중 하나로 보였다.

잠깐, 그런데 조건이 조금 의아했다.

어린 여자 참가자들한테만 영입 제안을 한 것도 이상한데, 거기다 계약 후 바로 데뷔?

‘그 많은 참가자들을 계약만 해주면 전부 다 데뷔를 시켜주는 게 가능한가?’

‘더 넥스트 슈퍼스타’를 통해 미디어에 등장한 참가자들은 적게 잡아도 수십 명.

아무리 생각해도 계약 후 바로 데뷔라는 조항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티스트 하나 데뷔시키는 데 몇천도 아니고 몇억, 많게는 몇십억이 들어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냥 계약만 하면 무조건 데뷔라니?

‘확실히 수상해.’

데뷔까지 시켜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것을 보면 이번 일은 단순히 제드만의 문제가 아니라 WE 엔터 전체가 연결됐을 확률이 컸다.

프로듀서 한 사람이 계획했다기에는 어림잡아도 규모가 너무 엄청났다.

***

저녁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성현의 머릿속은 천소울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젯밤부터 시작돼 새벽까지 이어진 천소울과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지금까지 혼자 안고 있었단 거잖아.’

성현은 천소울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고, 그 트라우마를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단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이번 기회로 확실히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돼.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되니까.’

천소울이 만약 이번에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추후에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의 트라우마는 앞으로 가수 생활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천소울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모건과의 시크릿 라운드와 어제 소극장 무대를 통해서 확인해 본 적이 있었다.

이대로 두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컸기에 어떻게든 수를 써야 했다.

천소울 본인에게도 이대로 약해진 멘탈을 가지고 가수를 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 분명했다.

‘방법은 하나야. 직접 부딪혀야 해.’

트라우마를 갖게 한 상대. 그 상대와 직접 부딪히는 것만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천소울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드 프로듀서와 직접 부딪혀서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성현의 결론이었다.

물론 성현은 자신 역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현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클래식이라는 틀에서 나오는 데 애를 먹어야 했으니까.

심지어 아직까지도 그 트라우마를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성현의 경우, 아버지와의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도망 나온 상태이니 말이다.

그만큼 트라우마 극복이 어렵다는 것을 직접 경험을 통해 알고, 천소울 역시 혼자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는 힘들 것이란 걸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도와주고 싶어. 내가 아끼는 가수니까.’

성현은 진심으로 천소울을 도와주고 싶었다.

모건의 한 마디에 술병이 이러 저리 굴러다니는 작업실 한구석에서 생기를 잃어가던 모습.

제드 프로듀서의 이름을 듣고 무대에 올라가 노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던 모습.

하나씩 떠오르는 기억에 성현은 고개를 저어 떨쳐내려 했다.

또다시 그가 트라우마에 잠식되어 무대를 망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트라우마의 원인인 제드를 직접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어떤 자식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성현은 당장 그를 본다 해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

지금처럼 그와 관련된 수상한 정보를 찾아낸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아직 몰랐다.

항상 차분하게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성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당장 그 자식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냥, 그냥 너무 화가 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성현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애써 화를 삭이려고 좁은 작업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래도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는 탓에 화가 식질 않았다.

이대로는 오늘 계획해두었던 작업량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런데 문득, 오늘 오전에 김인호 AD에게 들었던 제드 프로듀서에 관련된 정보들이 떠올라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1년 정도 프리랜서로 활동. 현재는 WE 엔터 소속. 최근엔 자신의 이름으로 어린 여성 참가자들한테만 영입 제안.’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가장 수상한 계약 조건.

계약만 한다면 곧바로 데뷔를 시켜준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안 그래도 아이돌이니 여자 솔로 가수가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계약만 하면 데뷔를 시켜준다? 아직 이쪽 업계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성현이 들어도 수상하다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계약 후 바로 데뷔라......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걸까.’

단체 활동, 외국 투자…… 아무리 여러 상황을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계약 조건이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추리해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성현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이걸로는 WE 엔터와 제드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한데.’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이내 무언가 떠오른 성현은 휴대폰을 찾아 들고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성현: 혹시 내일 시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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