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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57화 (157/273)

157화

갑작스러운 성현의 고백으로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진 작업실.

성현은 천소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서서히 털어놓았다.

어느새 천소울은 자신이 왜 여기 왔었는지에 대한 것도 잊은 채 성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클래식 전공자인데 클래식이 아닌 음악은 음악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 대중음악 프로듀싱을 시작할 때 반대가 심했고, 아버지 입에서 절연이란 말까지 나왔어요.”

절연이란 말이 나오자 천소울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항상 나서서 멤버들을 독려하고, 순수하게 음악을 하는 것만 생각하던 성현에게 이러한 과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성현의 모습만 떠올려서는 아무런 구김 없이 하고 싶은 음악만 하면서 살아온 인상이었는데, 이런 수난을 겪었다니 의외였다.

“마지막으로 싸우고 집을 나오던 날, 그때 아버지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분노, 배신감, 실망감…… 한동안 우연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그때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고 제가 하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음악 하는 게 두려웠어요.”

한동안 음악을 듣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생각보다 클래식은 다양한 곳에서 흘러나온다는 것도 집을 나와서 처음 깨달았다.

지하철 환승역 안내음, 다양한 초인종 소리, TV CF 배경음악, 누군가의 컬러링 등등.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짤막한 클래식 음절은 성현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성현은 그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미디어를 멀리하고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기도 했었다.

조금씩 뱉어내는 과거 이야기에 성현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고, 실시간으로 성현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천소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그런가요?”

천소울의 걱정스럽게 물음에 성현은 괜찮다는 듯 억지로 웃어 보였다.

“지금은 극복했어요.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아요?”

성현의 물음에 천소울은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게 뭐냐는 듯이 성현을 쳐다봤다.

성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음악이요. 음악 때문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고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그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던 것도 음악 때문이었어요. 천소울씨, 불이 난 집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불이 꺼지진 않아요. 천소울씨한테 어떤 과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묻고 외면한다 해서 상처가 낫진 않아요.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천소울씨가 가진 상처가 뭔지.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싶어요.”

온갖 일이 있었음에도 성현이 음악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음악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삶이 황폐해졌건만, 다시 성현을 되살린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음악의 존재에 성현은 체념하고 생각을 다르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음악을, 자신만은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성현의 말에 천소울의 눈빛이 흔들렸고, 그는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천소울은 성현이 아픈 과거를 용기를 내서 말해준 것이 고마웠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 바보인줄 알았던 성현의 숨겨진 모습과, 지금 반지하 작업실에서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그의 처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현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됐다.

그러나 곧 그의 머릿속에 성현과 함께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성현을 만났을 때 팀원들과 끝까지 함께 올라가겠다 약속하던 성현의 모습부터, 자신이 실수를 했던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대신 허릴 굽혀 사과하던 모습까지.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 믿고 싶어.’

천소울은 어느덧 성현에게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성현에게만큼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말하고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천소울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성현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Misty. 그 곡을 싸클에 올리자마자 유명 프로듀서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계약을 하고 싶다 했고 조건도 나쁘지 않아 곧 계약을 했는데,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프로듀서는 자신의 말을 안 듣는 연습생들한테 폭력을 일삼았고, 여자 연습생들한테는…….”

천소울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끊어진 말을 다 듣지 않았음에도 성현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엔터계에서 이런 일은 무섭도록 흔하기에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가 되었겠지.

“도저히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실장한테도 말하고 나중엔 대표 이사를 찾아가 봤지만 돌아오는 건 가수 생활을 못 하게 만들겠단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눈앞에서 그 쓰레기 자식이 다른 연습생을 때리는 걸 목격했고, 그걸 말리다 싸움이 커졌습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고 전 제가 본 것 그대로를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습생은 오히려 제가 자길 때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천소울은 아직도 그 배신감이 잊히지 않는 듯 분노하며 말했다.

밥상 밑으로 천소울의 두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성현은 저 상황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피해자들이 거짓 증언을 한 건 분명 잘못됐다.

가슴 아픈 건, 이 모든 게 당연히 잘못된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갔기 때문.

그들은 그저 가수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맞아도 안 맞은 척을 해야 했다.

아마 천소울이 폭행을 했다는 증언을 하게 된 것도 기획사에서 미리 말을 맞추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가능성이 컸다.

“경찰도 더는 조사를 하려 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신고를 원치 않는다, 해서 폭행 문제는 마무리됐지만 전 위약금 때문에 그 지옥 같은 회사에 묶여 매일을 협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밖에 누설하면 두 번 다시 가요계엔 발을 못 들이게 하겠다 하더군요.”

“설마 아직도 그 회사와 계약된 상태인 겁니까?”

성현은 혹시나 해서 묻는데, 다행히 천소울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비자금 문제로 회사가 공중분해 됐고 자연스럽게 제 계약도 해지됐습니다. 그 이후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만 지냈습니다. 사람한테 받은 상처도 컸고 이런 게 음악계라면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우연히 오디션 공고를 보게 됐고, 제힘으로 음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지원을 하게 된 겁니다.”

성현은 그의 말을 다 듣고서야 천소울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였던 까칠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싸클에 올렸던 곡을 들었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어진 프로듀서라는 자신의 소개.

이 모든 것이 천소울로 하여금, 성현이 제드와 비슷하게 느껴지게 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성현의 발언 하나하나가 천소울에게는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 역할을 했을지도 몰랐다.

“이성현씨 아까 말했죠. 불 난 집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불이 꺼지진 않는다고. 그 회사가 공중분해 됐다고 해서 그들이 지은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벌을 받지 못했고 전 아직도 그게 너무 화가 납니다.”

천소울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분노를 겨우 삭이며 말했다.

성현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었어도 천소울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 내 가수한테 그런 짓을 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몸서리치는데, 순간 대기실에서 들었던 서지현의 말이 생각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그 프로듀서란 사람이 아까 대기실에서 말하던……?”

성현은 아무래도 오전에 봤던 천소울의 반응이 걸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데, 천소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드 프로듀서. 서지현씨 입에서 그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그때 일이 다시 생각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소울의 말을 들은 성현의 표정은 더욱 무섭게 굳어졌다.

그의 확답까지 듣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프로듀서란 새끼가 어떻게 그딴 짓을.”

평소 온순한 성품의 성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천소울은 항상 흥분하지도 않고 차분한 모습으로 멤버들을 이끌던 성현의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모건와의 일로 자신이 트라우마에 발버둥 칠 때보다 더욱 격양된 성현의 모습.

천소울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성현은 이번 일로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제드 프로듀서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누구에게 이해받아서도 안 됐다.

천소울뿐만 아니라 같은 회사에서 연습생들이 받아야 했던 상처와 트라우마까지 떠올린다면…… 성현은 저도 모르게 눈앞이 아득해졌다.

‘게다가 천소울씨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놈한테 서지현씨를 보낼 뻔했잖아.’

성현은 순간적으로 아찔한 생각까지 들어 천소울을 쳐다봤다.

이렇게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대기실에서 천소울이 보여주었던 반응에 고마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동시에 천소울 또한 서지현을 동료로서 아끼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현은 천소울에게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 다시 동료를 믿기 쉽진 않았을 텐데.’

성현은 과거 일로 마음을 닫았던 천소울이 서서히 동료들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무대를 준비했던 그 과정이, 그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소울은 성현의 화난 모습을 보고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까는 앞뒤 경황없이 서지현에게 소리친 것 같아 그도 마음이 안 좋았던 차였다.

“제드 프로듀서가 아직도 활동 중인 줄은 몰랐습니다. WE엔터가 참가한 건 알았지만 제드가 스폰서로 참가하진 않았으니까요. 아까는 저도 당황해서 무작정 말리긴 했지만, 혹시나 서지현씨가 제드와 계약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

천소울은 서지현의 상황이 걱정되어 말하고, 성현 또한 그 마음이 백번 이해가 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에서는 여러 명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말해줄 수 없었기에 그 또한 서지현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천소울이 할 수 있는 것은 짤막한 반대의 한 마디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서지현씨한테는 제가 잘 둘러서 얘기할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성현은 그런 천소울의 마음을 전해주겠다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하고, 천소울은 성현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새벽이 돼서야 천소울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성현은 천소울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껴야 했다.

‘절대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거야.’

성현은 자신이 아끼는 가수인 천소울에게 그런 트라우마를 준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서지현까지 건드리려고 한 제드를 용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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