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천소울은 갑자기 무대에 오른 성현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성현은 그런 천소울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곧장 무대에 설치된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았다.
성현은 가볍게 손가락을 풀더니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관객들은 갑자기 난입한 성현이 다짜고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자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저 사람은 또?”
“어, 이성현이다. 그, 프로듀서 참가자 있잖아.”
“저 사람은 갑자기 왜 올라온 거야?”
객석에서 갑작스러운 성현의 등장에 의아해하는데, 곧 그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는 멈추게 되었다.
성현의 현란한 연주 실력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
지금 천소울이 불렀던 곡을 재즈로 변주시켜 자유자재로 연주해나갔다.
대중가요였던 곡이 순식간에 연주곡으로 탈바꿈해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현은 앞선 천소울의 실수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무대를 자신만의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객석들은 어느새 방금 무대 위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잊고, 성현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성현은 그렇게 한동안 연주를 이어가더니 갑자기 현란한 연주를 멈췄다.
띠링, 띵.
성현은 단순 멜로디만을 가벼운 터치로 이어가며,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천소울과 눈을 맞췄다.
성현은 오른손만으로 천천히 건반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이 보내는 노래를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
이를 본 천소울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성현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있다가 성현이 눈짓으로 신호를 주며 양손을 모두 피아노에 올렸다.
본격적으로 천소울이 준비한 노래 반주가 성현의 손을 통해 흘러나오고, 천소울은 그 반주에 맞춰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뭐해 안 찍고?!”
둘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PD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있는 카메라맨에게 소리쳤다.
카메라맨은 다급하게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성현은 여전히 천소울을 바라본 채로 건반도 보지 않은 채 연주를 이어나갔고, 천소울 역시 성현의 리드에 맞춰 한 자 한 자 가사를 뱉어냈다.
“오늘 분량은 다 뽑았구만.”
PD는 신이 나서 큰 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면 오늘 뽑아낼 스토리는 충분히 뽑은 거였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
성현의 등장으로 무사히 첫 번째 곡을 끝낸 천소울은 두 번째 음원 곡까지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천소울의 마지막 곡까지 반주를 마친 성현은 곧장 무대를 내려가지 않고, 천소울에게 다가갔다.
의아해하던 천소울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성현은 무대 가운데에 서서 객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더 넥스트 슈퍼스타 TOP 7 프로듀서 지원자 이성현입니다. 저번 음원 미션에서는 천소울 임하나씨 곡을 프로듀싱했고, 이번 무대에선 천소울씨의 반주자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성현의 인사에 성현을 알고 있는 팬들, 특히나 천소울과 임하나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두 사람의 팬들 사이에서는 성현 역시 만만치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성현의 노래로 음원 차트 1, 2위를 하게 됐기 때문.
이 영향으로 지난 경연 영상에서 성현이 나오는 부분이 편집되어 다시 화제가 되기도 할 정도였으니 다들 어렵지 않게 성현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런데 성현이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팬들에게 갑자기 사과를 했다.
“우선 천소울씨의 첫 번째 무대 실수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현이 객석을 향해 허릴 숙여 사과하자, 객석에 있는 사람들 당황해서 순간 조용해졌다.
객석의 분위기를 확인한 성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번 무대는 저와 함께 콜라보가 예정된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제 불찰로 무대에 오를 타이밍이 안 맞았고 갑자기 천소울씨 혼자 무대를 준비하게 되는 바람에 무대에서 실수를 조금 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무대 실수는 천소울씨가 아니라 제 잘못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다시 한번 사과 말씀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성현이 재차 사과를 하자, 이내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치며 괜찮아를 연호했다.
이미 팬들에게는 이번 사고가 깜짝 이벤트로 받아들여졌기에 모두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
경연 무대였다면 이러한 실수가 치명적이었겠지만, 지금은 거의 팬미팅에 가까운 공연이었다.
팬들은 모두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현의 실수를 눈감아 주었고, 돌발 이벤트로 여기고 즐거워했다.
몇몇은 벌써 SNS에 성현과 천소울의 콜라보가 팬미팅 무대에서 이루어졌다고 후기글을 남겼고, 빠르게 이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뒤에도 좋은 무대 준비돼 있으니까 재밌게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성현은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천소울은 그런 성현의 모습에 별다른 말없이 같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퇴장했다.
이 모습을 객석 가장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심훈영과 서지현, 요하는 모두 말이 없었다.
팬들은 속일 수 있어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셋을 속일 수는 없었다.
모두가 방금 전 있었던 무대가 천소울의 실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에 성현의 재빠른 대처 덕분에 무대를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는 것까지.
천소울의 방금 무대는 명백한 실수였고, 성현의 행동은 즉흥적이었다.
두 사람이 재빠르게 시선을 교환해 합을 맞추는 것만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심훈영을 비롯해 다들 무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스처와 행동만 봐도 파악이 가능했다.
성현은 가수의 실수를 감싸기 위해 프로듀서로서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대신 사과를 한 거라는 걸.
“이건 너무 감동인데.....”
서지현은 성현의 행동에 감동해서 중얼거렸고, 감동을 받은 건 요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입을 벌리고 눈가가 촉촉해져서 두 사람이 퇴장한 무대를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요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성현이 형 같은 프로듀서는 다시 못 만날 거 같아요.”
“그렇겠지? 음악을 떠나서 저렇게 인간적으로 멋있는 사람 만나는 게 쉽지가 않으니까.”
요하와 서지현은 프로듀서로서 성현이 가수를 아끼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지금까지 중에 제일 감동적이라며 소곤거렸다.
천소울의 실수를 보고 어떡하냐며 걱정스러웠던 마음까지 싹 가실 정도로 성현의 대처는 훌륭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심훈영이 갑자기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가수로서 프로듀서 이성현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나?”
심훈영의 질문은 실력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신뢰와 믿음에 대한 질문.
두 사람은 심훈영의 말에 순간적으로 서로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들은 서지현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제 WE엔터에서 좋은 조건으로 캐스팅 제안을 받았어요. 가수 지망생이라면 당연히 고민도 없이 계약을 하겠지만, 선뜻 그러지 못했어요. 성현씨 때문이었어요. 기획사를 차릴 거라고, 함께 음악을 하자고 했거든요.”
“설마 같이 음악을 하자는 성현이 제안 때문에 대형 소속사 제안을 거절할 고민까지 하고 있단 거야?”
“네. 그 정도로 성현씨는 저한테 특별한 사람이에요. 절 아껴준 저의 첫 프로듀서고 항상 믿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서지현의 진심 어린 대답에 심훈영은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요하 또한 서지현의 말을 거들며 말을 이었다.
성현에 대한 고마움이라면 자신이 빠질 수 없었다.
“전 사실 성현이 형 아니었으면 음악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집안에서 반대도 심했고 스스로도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 오디션에 지원했어요. 떨어지면 음악 관둘 생각으로. 그러다 예선에서 성현이 형을 만났는데 처음으로 저한테 재능이 있단 말을 해줬어요. 누군가한텐 별거 아닌 말일 수도 있지만, 저한텐 그 말이 너무 소중했고 그 말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고 힘든 오디션도 견딜 수 있었어요. 성현이 형은 저한테 처음으로 음악이 즐거울 수 있단 걸 알려준 사람이에요. 전 큰 욕심 없어요. 그냥 형이랑 누나들이랑 계속 음악하고 싶을 뿐이에요.”
요하는 그 말을 하며 서지현을 힐끗 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말하다 보니 생각난 것이 있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대형 소속사에서 연락을 받았다는 서지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현실적으론 힘들겠지만요. 전 누나가 어떤 선택을 해도 응원할 거예요.”
요하 또한 단순히 즐겁게 음악을 즐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잘 알았다.
이번에 오디션을 통해 더욱 실감이 나도록 그걸 느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멤버들이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요하였다.
“우리 요하 다 컸다?”
서지현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생각해서 이런 말까지 해주는 요하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하는 간만에 멋진 말을 했다는 것이 내심 뿌듯한지 가슴을 쫙 펴고 웃고 있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심훈영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릇이 훨씬 큰 친구긴 해.’
심훈영은 성현이 음악적인 재능이 있고 자신의 가수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걸 알았다.
아니,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직접 확인해보니 자신이 생각한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성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그릇이 훨씬 크다는 걸, 방금 전 천소울의 무대와 둘의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심훈영은 단단하게 못질을 해놨던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난 실패 했지만 그 녀석이라면 가능할 수도......’
어찌보면 성현의 지금 모습은 과거 심훈영이 꿈꾸던, 이상적인 프로듀서로서의 모습이었다. 자신은 가수를 잃고 음악계를 떠나 그 꿈을 포기했지만, 어쩌면, 혹시 성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훈영은 성현이 자신을 찾아와서 무리한 부탁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제안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실패해본 사람이기에 자신보다 더욱 가수들을 아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성현의 생각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제대로 틀렸다.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 싶긴 하네.’
심훈영은 성현이 처음 오아시스 바를 찾아와 새로 차릴 소속사의 리더 역할을 부탁했던 것을 떠올렸다.
성현은 심훈영이 리더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심훈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냐.’
심훈영은 리더가 아니라 성현,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가수와 프로듀서들이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는 방패막이의 역할이 자신의 것이라 확신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다른 존재들이 이들의 행복, 즐거움을 앗아가려고 할 때.
그들의 행복, 즐거움을 지켜줄 수 있는 방패막이.
‘그런 역할이라면 내가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