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미안하다. 그 부탁은 못 들어주겠다.”
오래도록 침묵하던 심훈영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 자리가 부담스러워서 그러시는 거면-”
“아니. 대표 자리든 프로듀서 자리든 그쪽 업계에 다시 발 담그고 싶지가 않아. ……그럴 자격 없는 사람이야, 난.”
심훈영이 고심 끝에 말했고, 성현은 그가 과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아시스 바에 와서 심훈영에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역시 그 일 때문인 거겠지.’
그는 자신의 가수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 때문에 음악계를 떠나 라이브 바를 차렸다.
그러면서 두 번 다시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한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가수를 잃은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심훈영이었지만, 성현은 그런 사정이 있기에 더욱 자신의 회사에 그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만큼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하지 않으려 할 테니까.’
성현이 봤을 때 심훈영만큼 음악 이전에 가수와 프로듀서를 인간으로서 아끼고 케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부탁드릴게요. 저와 제 가수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세요.”
“미안하다.”
성현의 계속된 부탁에도 심훈영은 고개를 저으며 연신 거절을 했다.
이쯤 되자 결국 성현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역시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
그에게 부탁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시간을 두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현은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이런 말을 건넨 성현이 곁에 있어 봐야 심훈영의 마음만 심란해질 것이 뻔했다.
“제 부탁 진지하게 다시 고민해봐 주세요.”
“안 된다니까.”
“사장님, 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부탁 아니에요. 몇 주를 고민하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장님도 너무 빨리 결정 짓지 말아 주세요. 최소 며칠, 몇 주는 고민해주시면 좋겠어요.”
심훈영은 성현 말에 어떤 대답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마지막 부탁을 남긴 성현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오아시스바를 떠났다.
***
며칠 후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성현은 곧장 휴대폰을 찾아 받은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혹시나 심훈영에게서 온 연락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심훈영에게서 온 메시지가 한 통 있었다.
성현은 그걸 확인한 순간 잠이 확 깨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제발…….’
성현은 처음 제의를 한 이후, 두 번을 더 오아시스바에 찾아가 재차 부탁을 했다.
K22
심훈영은 그때마다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성현의 제안을 거절했다.
계속 이런 부탁과 거절이 반복되자, 성현은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마지막 부탁이니 잘 생각해 보고 연락을 달란 말을 했었는데 마침내 답장이 온 것.
성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심훈영: 성현아, 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할 수 없을 거 같아.
순간 맥이 빠져 다시 벌러덩 침대에 누운 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네.’
이미 심훈영에게 마지막 부탁이라고 말한 후였다.
이 일로 더 이상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그를 포기할 마음도 없었다.
성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획사를 차리기로 결정한 만큼, 이보다 더한 고난과 역경이 닥칠 텐데 고작 이런 걸로 풀이 죽을 수는 없었다.
‘반드시 우리 회사로 모셔올 거야. 그분보다 아티스트를 아껴줄 사람은 없으니까.’
포기할 마음은 없었기에 성현은 방법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확실한 건 이번 일이 시간이 걸린다는 거였다.
천천히, 스며들 듯이 그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성현은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답장을 보냈다.
이성현: 알겠습니다. 오늘 소극장 공연은 보러 오실 거죠?
심훈영: 초대장까지 받았으니까 공연은 보러 가야지.
오늘 TOP7 멤버들이 모여 준비한 소극장 공연 스케줄이 있었다.
추첨을 통해 팬 500명을 무료로 초대하여 팬미팅 형식의 공연을 하는 것.
이제 국내에서의 활동이 마지막이라는 걸 아는 성현은 괜찮은 일정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참가자들 역시 정확하게 다음 미션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사를 통해 각 국의 대표가 정해진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막연하게 해외 스케줄이지 않을까 여겨 이번 소극장 공연 준비에 열심이었다.
공식 일정 중에 유일하게 음악과 관련된 스케줄이었기에 모두의 기대가 큰 공연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TOP 7 멤버들은 가수/프로듀서 역할로 나뉘어 공연을 일주일가량 준비했다.
성현은 천소울과 임하나의 무대를 각각 하나씩 맡아 준비했다.
그 공연이 벌써 오늘, 성현은 그 소극장 공연에 심훈영을 초대한 것이다.
초대를 할 때만 해도 별 뜻을 가지고 한 건 아니었다.
어쩌다 대화를 보니 소극장 이야기가 나왔고, 심훈영이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예전에 자신도 소극장 공연에 자주 참여했다는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떠올라 초대한 것.
어쩌다 보니 이번 초대를 심훈영이 부담스럽게 여길까 봐 성현이 다시 한번 물은 것이었다.
성현은 심훈영이 이번 공연만큼은 부담 갖지 않고 찾아와 구경했으면 했다.
물론 온 김에 다시 한번 생각해 주면 더욱 좋겠지만.
-이성현: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답장을 보낸 성현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나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설 준비를 시작하는 성현은 어느새 걱정보다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날 밤, 소극장 공연이 열리는 이대 삼성홀.
그곳엔 벌써부터 초대된 많은 팬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첨을 통해 뽑은 인원이 500명밖에 되지 않는 바람에 주최 측이 욕을 많이 먹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급하게 장소를 물색하느라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고, 생각보다 한국 대표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기도 했다.
인기의 원인으로는 단연,
“천소울씨 리허설 시작할게요!”
믿을 수 없는 외모로 인기몰이 중인 천소울이 꼽혔다.
무대 리허설 준비가 한창인 공연장에서는 곧 TOP 7의 리허설이 진행됐다.
차례대로 리허설을 마치고 현재는 천소울 차례였다.
무대로 올라간 천소울은 여유롭게 리허설을 진행하고, 성현과 임하나는 관객 모드가 되어 이 모습을 지켜봤다.
“항상 잘생겼지만 노래하는 천소울씨가 제일 잘생긴 것 같아요. 성대에 꿀을 발라놨나? 어쩜 저렇게 노래를 하지.”
“괜히 레이팍이 탐내는 가수는 아니겠죠.”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천소울을 키운 부모 마냥 흐뭇하게 천소울의 무대를 지켜봤다.
성현은 임하나 말에 동의하며 말하는데, 그때 성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발신인은 심훈영이었다.
“네, 사장님. 어디쯤이세요?”
“어, 나 5분이면 도착해.”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성현이 전화를 끊자, 임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성현을 쳐다봤다.
말투를 들어보니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초대 손님이 있나 싶어서였다.
“멤버들 말고 초대한 사람이 또 있어요?”
“네. 오아시스 바 사장님이요.”
“그렇구나. 성현씨는 그분이랑 되게 잘 지내는 거 같아요.”
“네.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배울 점도 많아요.”
그런데 그때 다시 성현의 휴대폰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서지현이었다.
“네, 지현씨.”
“저 지금 요하랑 같이 로비에 있어요. 어디로 가면 돼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나갈게요.”
성현이 이번 공연에 초대한 멤버는 서지현과 김요하.
다른 멤버들은 시간이 맞지 않아 초대하지 못했다.
서지현과 통화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이미 꽤 많은 팬들이 도착했는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성현이 전화를 끊는데, 리허설을 마친 천소울이 내려오고 스탭이 임하나를 불렀다.
“임하나씨 리허설 준비하세요!”
“네!”
“다녀오세요. 지현씨랑 요하는 제가 챙길게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임하나는 성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무대로 올라갔다.
“어땠어요?”
“뭘 또 물어봐요. 잘한 거 알면서.”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서 물어보는 천소울의 말에 기가 찬 성현이 대꾸해주자, 천소울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리허설을 하는 임하나를 남겨두고 서지현과 요하를 데리러 홀을 떠났다.
***
성현은 서지현과 요하를 데리고 소극장 대기실로 먼저 들어왔다.
천소울 역시 대기실에서 본 무대 전까지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떨려요. 공연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음악 잘하는 7명만 모아서 공연하는 거잖아요.”
요하는 연신 공연을 보는 게 설렌다며 들떠서 말했다.
그런 요하보다 조금 더 차분한 서지현은 성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지금 구할 수 없어서 난리라는 공연 표를 지인 찬스로 쉽게 얻었으니 주변에서 부러움도 많이 산 터였다.
“성현씨 덕분에 요즘 연예인보다 핫하다는 top7 공연도 다 보고. 고마워요.”
“지금 멤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초대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고마울 거 없어요.”
성현의 말에 서지현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어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뗐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성현은 그런 서지현을 보고도 모른 척 기다려주었다.
서지현은 얼마간 계속 뜸을 들이다가, 곧 결심을 했다는 듯 입을 뗐다.
“저…… 성현씨.”
“네, 말씀하세요.”
“사실 제가 어제 대형 기획사한테 영입 제안을 받았거든요. 조건도 괜찮고 다 좋은데 확신이 안 서서요.”
성현은 올 게 왔다는 생각이었다.
멤버들 모두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것은 아직 성현의 섣부른 욕심일 수도 있었다.
지금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멤버들을 잡을 권리가 아직 성현에게는 없었다.
성현은 자신에게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을 서지현을 생각해서 입을 열려다가, 저기 구석에 앉아 있는 천소울을 발견하고 일부러 서지현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서지현은 갑자기 성현이 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눈치챘다.
지금 이곳은 한국 대표들 7명의 참가자가 모두 같이 쓰는 대기실이었다.
아직 성현의 계획은 비밀스러운 것이라는 걸 깨달은 서지현 역시 작게 소리를 낮춰 성현에게 조곤조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전 사실 성현씨랑 음악 하고 싶은 마음도 커서 어떤 선택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고민을 성현씨한테 얘기하는 것도 실례인 거 알고, 지금도 너무 죄송한데 이런 얘길 할 수 있는 사람이 성현씨뿐이라…… 미안해요.”
서지현은 성현이 기획사를 차릴 거란 걸 알기에 입을 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성현 역시 서지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보다는 어두운 서지현의 얼굴이 걱정스러워서 성현은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계속 말씀하세요. 일단 제안받은 회사 이름이랑 대표 프로듀서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성현은 서지현에게 괜히 부담을 주기 싫어 평소대로 웃으며 물었다.
그의 반응에 안심한 서지현은 곧 작게 한숨을 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WE엔터테인먼트에 제드 프로듀서요.”
‘WE엔터테인먼트라면 확실히 대형급에 속하는 기획사고 제드는 히트 앨범도 제작한 수준급 프로듀서 아닌가.’
고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확실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이 일이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기에.
성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멤버들이 잘 되는 것 역시 자신의 바람이었다.
“지현씨한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괜히 저 때문에 부담 갖지 마시고-”
“안 돼.”
마음을 다잡은 성현의 말을 가로채고 단호하게 말한 건, 대기실 한켠에서 쉬고 있던 천소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