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다음 날 아침.
평소 작업실에 가려고 맞춰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성현.
여느 때와 같이 습관처럼 일어나던 그는 밀려오는 두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제야 어제 새벽까지 심훈영과 술잔을 기울였던 것이 떠오른 성현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성현은 자신이 어제 술을 마시던 도중 기억이 날아간 것을 깨닫고 기억을 더듬었다.
오아시스 바에 가서 신현식의 녹음파일을 듣고, 심훈영과 대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심훈영이 양주병을 가져오면서 그걸 비우고, …그 뒤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없다.
그것이 성현이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 그 이후에는 그대로 필름이 끊겨 버렸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며 또다시 울리는 알람을 껐다.
그러다 심훈영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던 걸 발견했다.
-심훈영: 잘 들어갔어?
새벽에 온 것을 보니 성현이 걱정되어 보낸 메시지 같았다.
성현은 그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휴대폰을 두드렸다.
-성현: 네. 지금 일어났어요. 우리 어제 얼마나 마신 거예요? 숙취 때문에 머리 깨질 거 같아요.
빠른 속도로 심훈영에게 답장을 보내는데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똑같이 마셨으면서 부지런하기 짝이 없었다.
바 사장이라서 간 구조가 다른 사람과 다른 건가.
성현은 심훈영의 경이로운 답장 속도에 다시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심훈영: 숙취만 있는 게 아닐 텐데? 눈도 퉁퉁 붓지 않았어?
눈? 성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더듬거렸다.
그러고 보니 시야가 약간 좁은 거 같기도 하고.
심훈영의 문자를 본 성현은 빠르게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봤다.
오아시스바에 가서 노래를 듣고, 그러다 신현식의 숨겨진 노래도 듣고.
프로듀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울었나? 아닌데.’
성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운 기억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발끈한 성현은 심훈영에게 재빨리 정정 문자를 보냈다.
-성현: 어제 저 안 울었는데요?
-심훈영: 에이, 눈물 또르르 흐르는 거 내가 봤는데.
-성현: 아니라니까요.
마지막 답장을 끝으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성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숙취 때문에 다시 머리가 댕댕 울렸다.
성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냉장고에 들어 있던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살 것 같다.’
목이 탔던 성현은 생수병을 거의 다 비웠다.
그래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정신을 차리려고 기지개를 피는데 순간 성현의 머릿속에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지금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지만
기억해 우리가 함께 놀던 놀이터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땐 내가 너에게 쉼터가 돼 줄게-
신현식이 녹음했다던 짧은 3마디의 노래.
술에 절어 있었던 성현에게도 또렷하게 꽂힐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쉬이 잊혀지지 않는 짧은 노래는 성현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어느새 숙취는 잊어버린 성현은 테이블 앞에 가서 앉아 빠르게 볼펜을 찾았다.
오선지 악보를 찾을 겨를도 없었다.
아무거나 빈 공책 하나를 집어들은 성현은 음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되짚으며 낙서하듯 어제 들었던 멜로디 음계를 빠르게 그려나갔다.
이내 공책에 그려진 신현식의 세 마디 노래 악보.
머릿속의 노래를 떠올리며 여러 차례 악보를 확인한 성현은 대충 세수만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빠르게 집을 나섰다.
***
성현이 빠르게 도착한 곳은 자신의 스튜디오였다.
곧장 미디 앞에 앉는 성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제 작업하던 곡을 찾았다.
곧 있으면 시작될 5라운드를 대비하려고 예전부터 작업 중이던 곡 중 하나였다.
성현은 지체없이 노래를 틀어 어제 하던 곡 작업을 이어서 했다.
“하아….”
그렇게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평소의 작업 속도의 반도 따라오지 않는 작업량에 성현이 미디에서 손을 뗐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자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새벽에 들었던 신현식의 세 마디 노래가.
일부러 머릿속을 맴도는 노래를 비워내려고 종이에 악보를 쏟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오늘 목표한 작업량을 절대 채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성현은 원래 하고 있던 작업을 중단하고 집에서 가져온 공책을 꺼내 미디 옆에 두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노래와 써놓은 악보를 번갈아 확인해가며 음표를 찍었다.
딱 세 마디.
이 세 마디로 악보를 채우기엔 너무나 짧았다.
세 마디 이후론 어떤 음표도 없이 백지 그 자체라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빈 마디들을 내 손으로 채워보고 싶어.’
성현은 신현식이 마저 채우지 못한 남은 마디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채우고 싶었다.
신현식 노래를 들었을 때 자신이 받았던 위로와 감동, 복합적인 감정들을 자신만의 음표로 표현해내는 것.
성현의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작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성현은 일단 이 작업을 끝마치고 다른 노래 구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곧장 작업에 들어가려는 순간, 성현의 휴대폰이 길게 울리며 전화가 왔다는 걸 알렸다.
발신인은 임하나.
성현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하나씨.”
‘성현씨, 저 연습하다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하나씨 저 지금 곡 작업 중이라 그런데 완성하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성현은 하나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머릿속에 가득한 음악을 쏟아내기 전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거 마스터링 작업만 남았다 하지 않았어요?’
수화기 너머로 임하나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새 곡 쓰는 중이에요.”
‘새 곡이요? 그럼 한참 걸릴 거 같은데 그냥 지금-’
갑자기 새로운 곡을 준비한다니.
성현이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면 얼마간 연락이 안 될 것이 분명했다.
임하나는 그 전에 자신의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하나씨, 진짜 미안한데. 저 지금 빨리 작업부터 해야 돼서 이만 끊을게요.”
임하나의 말을 잘라내고 전화를 끊은 성현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음표를 채워나갔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심정과,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느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성현은 그때 그 감정들에 몰입해 무아지경으로 멜로디를 구상했다.
망설임 없이 쉬지 않고 음표를 찍었다.
그렇게 성현이 24마디 1절을 채우는 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끝까지 곡을 완성하자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던 신현식의 노래가 어느새 그쳤다.
성현은 숙취가 한 방에 사라진 듯한 개운함을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도 이만큼 시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완성한 곡을 살피던 성현은 곧장 휴대폰을 들어 임하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까 그렇게 전화를 끊은 것이 이제야 생각난 탓.
-성현: 궁금한 게 뭐예요?
-임하나: 급한 거 아니니까 곡 작업 끝나면 여쭤볼게요!
-성현: 작업 다 끝났어요. 말씀하세요.
임하나는 오늘 내내 황당한 성현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멀거니 휴대폰 액정만 쳐다보았다.
아까 새로운 곡을 쓴다고 했던 것이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작업이 다 끝났다고?
지금 자신이 물어볼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임하나는 궁금했던 것을 깡그리 까먹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임하나: ......곡을 벌써 완성했다구요?
-성현: 네.
성현은 놀라는 임하나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답장을 보낸 뒤, 기다렸지만 임하나에게는 답장이 없었다.
한동안 휴대폰을 기다리던 성현은 임하나가 반응이 없자 노래가 담긴 USB를 들고 작업실을 박차고 나갔다.
***
아직 해가 중천에 뜬 낮 시간.
오아시스 바의 출입문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손님의 입장을 알렸다.
장사 시작 전, 홀을 청소 중이던 심훈영은 문 열리는 소리에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도 들지 않고 소리쳤다.
단골들은 꼭 이렇게 심훈영이 청소하는 시간에 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곤 했다.
“영업시간 좀 지키시라니까. 나가요. 오늘은 진짜 안 봐줄 거야.”
심훈영은 영업시간 따윈 전혀 개의치 않고 원할 때마다 들어오는 손님들이 익숙해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놀랍게도 돌아오는 목소리는 익숙한 단골 아저씨들이 아니었다.
“오늘은 술 마시러 온 거 아닌데 나가야 되나요?”
어제 새벽까지 듣고 있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모자를 푹 눌러쓴 성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놀란 심훈영이 청소기 전원을 껐다.
“어? 뭐야? 왜 왔어? 뭐 두고 갔어?”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성현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다니.
의아한 표정을 한 심훈영이 묻자, 성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곡 좀 들어봐주세요.”
성현의 뜬금없는 부탁에 심훈영은 황당해하며 웃고는 청소기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무슨 곡인데? 이렇게 아침부터 쳐들어올 정도로 엄청난 곡이야?”
“일단 들어봐 주세요.”
“알겠다. 줘봐.”
심훈영은 성현에게서 usb를 받고는 노트북에 연결했다.
성현은 빠르게 조작해 방금 작업한 곡을 실행시켰다.
곧 조용한 오아시스바 스피커에서 성현이 작업한 곡이 크게 흘러나왔다.
잔잔한 멜로디와 피아노 반주가 이어졌고 그렇게 1분가량의 짧은 노래가 끝났다.
곡을 들은 심훈영이 깜짝 놀라 성현을 쳐다봤다.
빠르게 작업하다 보니 곡 구성도 가사도 조금 더 다듬을 필요가 있었지만 심훈영은 쉽게 깨달은 듯했다.
성현이 가지고 온 곡의 첫 세 마디는 심훈영 자신도 아는 멜로디였기 때문.
“너, 너…!”
‘설마 그 세 마디를 듣고 노래를 완성했다고?’
어제 잠깐 들려줬던 세 마디 정도의 짧은 신현식의 녹음.
성현은 그것을 가지고 1절 가량의 노래의 밑그림을 완성해 온 것이다.
미완성의 상태라지만 감성만큼은 신현식이 녹음할 당시의 감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 것도 놀라웠다.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는 심훈영에게 성현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은 1절밖에 완성 못 했어요. 아무래도 허락을 받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요. 이 곡 제가 완성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성현은 신현식의 노래를 처음 듣던 순간을 떠올렸다.
성현이 짧은 녹음을 처음 들었을 때, 이때의 신현식이 느낀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을 이 노래를 통해 표현해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것.
성현 역시 다음날 작업실에서 눈을 떴을 때,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이 곡을 완성해 보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이 치솟았던 그 순간의 다급함.
성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하던 작업도 제치고 이 곡을 완성 시킨 것이었다.
물론, 신현식이 이 곡을 완성했을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현식이도 바라는 일이겠지.’
성현의 진지한 눈을 본 심훈영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신현식이라면 어땠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신입이 자신의 곡을 건드린다고 화를 냈을까?
아니, 그 역시 성현이 이 노래를 완성하길 바랄 거라고 심훈영은 확신했다.
한번 판단이 서자 심훈영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해봐. 대신 잘해야 한다.”
심훈영은 성현이라면 신현식이 남긴 짧은 노랫말을 이어나갈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어제 들은 성현의 이야기를, 그 진심을 들으며 자신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신현식이 품었던 생각을, 지금의 성현 또한 품고 있었으니까.
신현식이 세상을 향해 못다 들려준 음악을 성현이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이유를, 성현이 이번 곡으로 증명해주길 바랐다.
‘현식아, 두고 봐라. 이 녀석 한국 음악계를 이끌게 될 거다.’
심훈영은 오랜만에 친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생긴 것이 한없이 기뻤다.
만약 성현이 이번 곡에서 정말 신현식의 못 이룬 바람을 실현했다는 걸 증명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그때는 정말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성현이 신현식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신현식을 넘어선 프로듀서가 될 거란 것을.